이수현/생애

개요

대한국 제36대 내각총리대신 이수현의 생애를 적은 문서.

성장기

1960년 7월 14일 함경남도 흥남시 구룡면 운중리(現 함흥광역시 흥남구 구룡면 운중리)에서 3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래 출생할 적에는 위로 연년생 누나 한명이 있었지만 8살에 요절하면서 맏이가 됐다.

그의 부친 이병호(李炳浩, 1936. 3. 29 ~ 1993. 12. 17)는 흥남시에서 8대째 살아온 흥남 토박이였으며, 흥남항에서 하역 노동자로 근무했다. 어머니인 신옥선(申玉善, 1930. 5. 6 ~ 2019. 5. 2) 또한 방직공장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수현 형제들은 많은 시간을 집에서 농사를 짓던 조부모들과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인 국민교육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어머니에 의해 산을 하나 넘어 1시간쯤 걸어야 있는 운중국민학교에 다녔다. 통학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학교를 못갈 일이 생기거나 본인이 사정을 만들거나 해서 어느 달은 결석일과 출석일이 같은 수준까지 갔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통학길에 산짐승이 워낙 많았기에 사냥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것 같아 당시 꿈이 사냥꾼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은 모두 공장이나 항구에 취직하여 돈을 벌길 바랬으나 교육열이 강했던 그는 딱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공부는 말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결국 할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고, 구룡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때에도 통학요건은 나아지기는 커녕 시간이 더 길어져서 학교까지 1시간 반을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물론 중학교 2학년때 길이 개통되며 다시 1시간(...)으로 줄어들긴 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전교 2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부모님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고등학교 진학의 꿈은 접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상황을 딱하게 여긴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그를 끊임없이 설득했고, 그가 부모님과의 약속을 핑계로 계속해서 거절하자 1시간의 하교길을 같이 걸어가 그의 부모님을 잡고 설득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부담스럽다며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거절하자, 선생님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취업할 수 있는 상고로 진학하는 것을 추천했다. 상고 진학 제안에 부모님은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고, 그의 학업은 더 연장될 수 있었다.

1980년, 흥남상고를 졸업하기 6개월 전 그는 대한신탁은행에 입사했다. 그러나 '상고 출신' 이라는 벽은 높았고, 이에 큰 반발을 느낀 그는 1981년에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황북대학교 야간개설학부 행정학과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이때 은행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모두 흥남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며 본인은 장학금을 아끼고 아낀 돈으로 단칸방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어 1984년 대학교를 졸업하며 직장인 은행에 완전 복귀하나 싶었지만 교수의 권유로 제27회 행정고등고시에 응시, 놀랍게도 이게 한번에 붙으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관료 시절

1984년 은행에 사직서를 내고 총무성에서 일하게 됐다. 사무관 수습을 받을 때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서울 사람들은 일머리도 없고 영 질이 좋지 못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 생각나서 지방으로의 발령을 희망했다.[1] 그래서 발령된 곳이 안동세무서였고, 그곳에서 총무과장을 지낸 뒤 귀경길에 올라 재무성 세재실 국제조사과 사무관, 기획예산처 서기관, 기획예산처 재정전략과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국장실에서 일을 맡기게 할 사람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직속상관이 오히려 자신보다 고시 기수가 낮고 사회 경험이라고는 없는 서울대 출신 후배를 추천하고 "그래도 지방대 나온 애 보다야 서울대 나온 애가 낫지 않겠냐"고 장난스레 말하는 것에 관료생활에 큰 회의감을 느껴 사직서를 던질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서연고 등 명문대 출신들이 꽉 쥐고 있는 경제관료계에서 황북대 야간학부 출신의 이수현이 느낀 감정은 마치 6년 전 은행에서 상고 출신이라는 차별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저번처럼 불굴의 의지력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으면서 학력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2000년에는 수상비서실 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획재정성으로 복귀한 후에는 종합정책과장과 대변인을 역임했다. 2008년에 예산총괄심의관, 2011년에는 기재성 제3차관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획재정성 예산실장에 임명됐다. 당시 사회간접자본 예산을 축소하며 이명박 내각의 정책 기조에 맞춰 재정 건정성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았고, 2012년에는 이명박이 기초보장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을 막았다. 김성연 전 예산실장의 소외계층 고등학교 졸업생의 해외 유학 사업인 드림장학생 사업을 더욱 확대시켰고, 전임 예산실장이 공을 들인 대부분의 사업을 확대, 혹은 유지했다.

이수현 악수.jpg
기획재정성 사무차관으로 임명된 이수현

2013년에는 기재성 공무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직위였던 기획재정성 사무차관으로 발탁되었다.

취임 후에는 약자와의 동행을 가슴에 새기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근무했던 흥남항 노동자들의 합숙소에 방문하거나 어려운 상황으로 꿈을 펼치지 못하는 전국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마음이음장학사업'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박 정부에서 발탁된 인사라는 이유로 박근혜 내각에서는 한직인 한국수출입은행 은행장으로 좌천됐다. 좌천 후에는 중앙 관료계와 거리를 두고 생활했다고 한다. 결국 2015년, 30년 공직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정치 활동

정계 입문

퇴임 후에는 모교인 황북대학교의 교수로 들어가서 행정학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평소 친분이 있었던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 유승호 의원의 적극적인 중앙당 설득으로 25대 총선에 영입 제안이 들어왔고,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 7호로 정치에 입문했다. 중앙당은 당시 부실한 지역구 관리와 사이다를 빙자한 막말 논란으로 사리원 갑 내 지지율이 하락세였던 최성봉 의원을 컷오프하고 이수현 의원을 전략공천했다.

25대 총선에서 황복 사리원 갑에 전략공천된 후 예비후보로 등록한 뒤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지역위원회 내에서의 민심 이반은 있었다. 컷오프된 최성봉 지역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당직자 300여명이 중앙당의 이수현 차관 전략공천 철회를 요구하며 집단 탈당을 예고하고 나선 것. 이에 문재인 대표는 탈당한 인원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경고하는 등 이수현 감싸기에 나섰고, 결국 이에 굴복하지 않은 최성봉 의원과 지역위원회 당직자 200여명은 집단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다행히 도의원이나 시의원들의 탈당은 이뤄지지 않았다.

개표 결과 46.1%의 득표율로 여유롭게 승리했고,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됐던 최성봉 후보에게 그 어떤 행정동도 빼았기지 않고 전승했다. 아직 상임위원회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경제관료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산업통상자원위원회나 기획재정위원회 등지로 배치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위원회로 배치되었다.

26대 총선에서 사리원 갑에 재출마, 새보수당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최성봉 의원의 무소속 출마 감행으로 표 분산이 우려되었으나 2016년 9월 11일~12일 알앤써치가 실행한 여론조사에서 45.8%로 31.6%로 2위를 기록한 새자유당 후보를 여유롭게 제치며 선두에 섰다.

최성봉 전 의원이 새보수당의 추천을 받고 무소속으로 다시 출마해 제대로 된 1:1 리턴매치가 성사됐다. 그러나 최성봉 후보가 유세현장, 토론회를가리지 않고 이수현 후보에 대한 막말과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고발당했고, 지지율은 급격히 내림세를 그리며 26대 총선에서는 67:33이라는 더블스코어 차로 승리했다.

27대 총선은 대체적으로 민주당의 패배였지만 (구)자유민주당에 입당해 세번째 도전에 나선 최성봉 전 의원을 72:27, 6만표 차로 찍어눌렀다.

28대 총선에서 4번째 도전에 나선 최성봉 전 의원과 또 다시 맞붙는가 싶었지만 최성봉 전 의원이 고령을 사유로 투표일을 2주 앞두고 자민당 후보를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해서 자유민주당 후보와의 1:1 매치로 바뀌었다. 사실상 극우 유튜버로 변질된 최성봉의 지지율이 자민당 후보로 가면서 자민당 득표율이 38%를 기록하는 등 선전했지만 62.4%를 득표하며 승리했다.

이때쯤 유승호 의원과의 연합을 통해 혁신회를 발족했다. 혁신회는 당시 민중민주당 중도계열의 민정호, 은수원, 전윤우 등 서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소규모 파벌이였으나, 29대 총선 직전 오태양 전 대표의 탈당으로 위태로워진 사회운동계가 혁신회로 편입하면서 혁신회가 민진당 온건파의 새로운 주요 파벌로 떠올랐다.

29대 총선에서 민진당이 대승하며 자신도 69.8%의 득표율로 5선에 성공했다. 이후 제2차 한동원 내각에 혁신회 소속 국무위원 3인이 진출하며 명실상부 5대 파벌로 거듭났다. 6회 지선에서는 강원, 인천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출마한 혁신회 소속 후보가 광역자치단체장에 당선(충남, 대전, 황북, 평북)되며 민진당이 새누리-화합의 야합으로 광역자치단체장을 대부분 빼았기는 와중에도 텃밭을 제외한 3곳의 광역자치단체장 방어에 성공하며 정구연과 함께 지방에서의 내실을 다졌다.

혁신회는 6회 지선 참패의 영향으로 한동원 총리가 사임하고 제2차 한동원 내각이 붕괴한 후 새로 조각된 도민정 내각에서도 이현진 교육대신, 김병진 국방대신, 이종현 문화체육관광대신, 이은혁 환경대신이 입각에 성공하며 주요 계파임을 입증했다.

상경과 민주진보당 비상대책위원장

그러나 지속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타던 도민정 내각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도민정 총리가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사퇴하면서 공석이 된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 지금까지 중앙 정계와는 먼 사이였던 이수현 의원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실제 2032년 12월 7일, 민주진보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된다.

2032년 12월 13일에 도민정 총리가 "당의 총선 수도권 승리를 이끌어 달라"라며 서울 종로·중 출마를 제안받았다는 단독 기사가 나왔다. 바로 다음 날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께 위로와 희망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출마지인 종로·중에서 인지도는 미약했지만, 지역 밀착형 공약과 거물 정치인들이 다녀간 종로에 남은 건 없다는 선거 전략으로 새누리당 최재형 후보를 9%p 차이로 꺾고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상경한 주요 이유였던 수도권 선거 승리에 실패, 결과적으로 민주진보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빛 바랜 승리가 되었다.

그래도 대중들에게는 무명의 정치인에 가까웠던 이수현이 종로에서 생환하고, 비대위원장에 계속 머물게 됨으로써 인생 처음으로 주류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비대위원장으로 지내며 케이넨 내각 견제에 최선을 다하며 '실력 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비대위원장 임기 동안 그는 많은 수의 지지층을 끌어모았고, 어느새 야권 총리 적합도 후보 1위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단 2년만에 사리원 무명의 정치인이 유력 총리 후보까지 올라간 것이다.

검찰의 칼 끝에 서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던 그였지만, 검찰이 그가 당대회 도중 지지 후보(유승호)의 당선을 돕기 위해 보좌관을 통해 돈봉투를 돌렸다고 발표하며 그의 정치사상 첫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와 민주진보당은 이를 검찰의 '야당 탄압'으로 규정하고, 이를 총선에서도 사용하는 등 슬기롭게 대처하며 위기를 넘겼다.

2033년 9월 19일, 제4차 민주진보당 당대회에서 유승호 후보가 당대표에 당선되면서 당 지도부 자리에서는 내려왔지만, 유승호 후보는 처음 그를 정계에 입문시켰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우스갯소리로 이계자, 수핵관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였다. 따라서 그는 신임 지도부에 자신의 사람이 새로 임명되는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었다.

2034년 4월 16일, 그가 총리로 취임하자 검찰이 그의 모든 혐의에 대해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하면서 이것이 진짜 검찰의 야당 탄압이였음이 들어난 것은 덤.

지역구 낙선과 총리 취임

2034년 제31대 총선이 치뤄지면서 그는 본래 지역구였던 종로에 출마했다. 그의 상대는 용인 수지에서 우수한 활약을 하고 지지자들의 험지 출마 요구를 받고 종로에 출마하게 된 전원우 내각부총리대신이였다.

부총리 vs 야당의 실질적 지도자 라는 빅매치가 성사된 종로에 전국민적인 관심이 모였으나, 그는 당의 전국단위 선거에 집중하느라 정작 지역구 선거에 모습을 비추지 못했고, 이것이 그의 큰 패인이 되었다.

선거 막바지가 되어서 전 부총리와 지지율이 역전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서둘러 종로에 복귀, 100시간 릴레이 유세를 진행하며 지역구 선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약 1%p 차로 아까운 패배를 맞았다.

기묘한 것이, 저번 총선에서는 지역구에서 이기고 수도권에서 대패하며 총선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지역구에서 지고 수도권에서 대승하며 선거를 승리로 이끌게 되면서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 장수'와 '전쟁에서 이기고 전투에서 진 장수'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안게 되었다.

그래도 연립여당(민주진보당-생활정치-퍼스트제주)가 294석이라는 대규모 의석을 차지하면서 총선 승리의 선봉장이라는 타이틀도 얻었으며, 무엇보다 당 총리 적합도 순위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면서 이수현이 민주진보당의 대세임을 보여줬다. 이에 연립여당은 합의를 통해 원내 1당 당수(유승호)가 아닌, 이수현을 총리로 지목했다. 대한국 최초 원내 1당의 당수가 아닌 총리이자 지역구에서 낙선하고 총리가 된 케이스다.

이수현 내각

  1. 이후 안동의 상황을 보고 이 결정을 매우 후회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