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구려)

고구려 초대 태왕
태조
太祖
출생기원전 80년 4월 8일
북부여 분릉
사망기원전 19년 음력 9월
고구려 황궁
성별남성
국적북부여 → 고구려의 국기.png 고구려
학력제왕교육
경력북부여의 단제
직업초대 태왕
부모父 강모수 母 강유화
배우자강소서노, 예씨 부인,
자녀유리명태왕, 강비류, 온조왕
병역해당사항 없음

개요

북부여의 제7대 단제이자 고구려 제국의 초대 태왕이며 심양 강씨 왕조 최초의 태왕. 시호는 추모태왕, 동명성왕이다.

칭호

성씨

동명성왕의 성씨는 흔히 알려진 사서 출처는 다음과 같다.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등장 사료 비고
삼국사기, 동사강목 부여에서 쓴 성씨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중국 사서 고구려 건국 후 사용한 성씨

하지만 위와 내용과는 달리 강사 고구려국본기 라는 사서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등장 사료 내용
강사 강철상[1]은 문자명왕의 막내 아들이다.

고구려의 국성은 고씨가 아니라 강씨로 나오며 이는 곧 고구려의 국성이 심양 강씨임을 나타낸다. 진주 강씨 황가의 시조 강이식 장군이 고씨에서 강씨 성을 득성하지 않은 이상 고구려의 국성은 심양 강씨로 분가인 진주 강씨는 고구려 황실의 적통임을 드러낸다. 횡성 고씨 경우에는 고인승이 고구려 황실의 고씨 호를 성으로 취해서 횡성 고씨이다.

이름

휘는 매우 다양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순 우리말 이름을 음차해놓은 것이다. 대중적인 주몽 이라는 이름은 우리 고유여어를 한자로 음차할 때 "朱蒙" 자를 쓴 이름이다.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등장 사료 비고
鄒牟 추모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고구려 공식 표기
朱蒙 주몽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중국 사서 중국 왕조들이 기록한 이름
朱背 주배 신천성씨록 -
仲牟 중모 일본서기
中牟 중모 삼국사기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만 등장
衆解 중해 삼국사기
都慕 도모 신찬성씨록 신찬성씨록
鄒蒙 추몽 삼국유사 삼국유사 왕력편에만 등장
象解 상해 삼국사기 -

묘호, 시호

묘호 등장 사료 비고
태조(太祖) 삼국사기, 신찬성씨록 붙는 시호는 중모왕, 도모대왕
칭호 등장 사료 비고
시조(始祖) 삼국사기, 삼국유사 거의 모든 시호에 다 붙음. 칭호에 가까움
시호 등장 사료 비고
추모왕(鄒牟王)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이름을 그대로 사용
추모성왕(鄒牟聖王) 모두루 묘지명 이름을 그대로 사용, 미칭 추가
중모왕(中牟王) 삼국사기 이름을 그대로 사용
동명왕(東明王)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대부분 한국 사서가 기록한 시호
동명성왕(東明聖王)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동명 계열 왕호의 풀버전
동명제(東明帝) 삼국유사, 민간 전설 동명 계열의 제호
동명성제(東明聖帝) 삼국유사, 민간 전설, 고려사 동명 계열 제호의 풀버전

기록 원문

옛날을 생각컨데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
— 광개토태왕릉비 제 1면
하박의 손자요 해의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는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이 이 국군이 가장 거룩함을 알지니...
— 모두루 묘지명
백제 시조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와 온조로 하였다.
—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덕좌왕은 도모왕의 손자다.
— 신찬성씨록 우경제번 편

생애

건국

기원전 58년, 강주몽은 부여의 단제로 재위하다가 고조선의 제후국이던 고구려를 제국으로 바꾸겠다는 목적으로 국호를 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꿨다.

비류국 병합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참고로 이때 비류국왕인 송양과의 일화가 구삼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류국 송양이 "너네 나라보다 우리 나라가 더 오래됬음 만든지 얼마 안된 너네 나라가 우리 나라 밑으로 들어오는 게 맞는 것 같은데"라고 하자 동명성왕은 "나는 하늘의 자손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까불는 꼴이 우스움"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송양이 활쏘기 대결을 청하는데 송양은 사슴 그림을 100보 밖에다 두고 활시위를 당겼지만 힘겨워 햇다고 한다. 반면 그 모습을 본 동명성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들고 오게 하고 100보 밖에 매달아 놓게 했는데 활을 쏘자마자 옥가락지가 박살이 나버렸다. 그걸 본 송양은 깜짝 놀랬다고.
  • 송양이 떠나고 동명성왕은 신하들에게 "저 놈이 짐을 무시하는 건 우리 나라에 간지나는 뿔피리가 없어서 그렇슴"이라고 말하자 부분노가 "제가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라고 한다 그 말에 동명성왕은 "쟤들이 꽁꽁 숨겨놓았을 물건인데 어떻게 가져옴?"이라고 하자 "태왕께서는 천제의 아들이기에 각종 고난을 이겨내고 오셨습니다. 천제가 우리를 돌봐주는 한,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져온다. 한편 자신의 북이 사라진 걸 알게 되면 비류국에서 고구려에 따지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동명성왕은 북에다 시커멓게 칠을 해 오래된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결국 그 모습을 본 비류국 사신은 데꿀멍 해버렸고 그 소식을 들은 송양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송양이 "고구려와 비류국 어느 나라의 수도가 먼저 세워졌는지 확인해서 더 일찍 세워진 나라 쪽을 섬기도록 ㄱㄱ"라고 주장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동명성왕은 궁궐 지으면서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마치 천년도 넘는 듯한 모습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걸 본 송양은 데꿀멍.

소국 토벌

한편 동명성왕은 비류국 이후 행인국과 북옥저를 병합한다.과연 고구려는 정복의 나라....

겨울 10월, 임금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태성태자 책봉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아들 강유리가 도망쳐오자 태성태자로 삼았고 동명성왕 사후 강유리가 태왕이 되자 강소서노와 그 두 아들 강비류, 강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죽음? 승천?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40살 때 승하하여 용산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구삼국사의 동명왕 편과 광개토태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전했다고 한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하셨다
— 광개토태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는 40세였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찌을 대신 용산에 장사하였다 한다.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 편

제왕운기에선 특이하게도 동명성왕이 재위 중에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정치를 배워 내려왔고 재위 19년인 9월 하늘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아 거룩한 아들 강유리가 보위를 이어 남은 옥 채찍을 무덤에 묻었고 그것이 지금의 용산의 무덤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엔 아들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손자 대무신태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다.

그가 승천했다는 설화가 굉장히 많은데 어느 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채찍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채찍을 모셔서 묘를 썻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옥 채찍은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가 있다. 평양에는 구제궁 옆에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 굴'이 남아있었으며 동명성왕이 밟고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광개토태왕과의 관계

지안현의 광개토태왕릉비를 보면 광개토태왕이 추모왕으로부터 17대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두 태왕의 생년은 약 430년의 차이가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였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남이였다. ...(중략)... 遺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世孫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 광개토태왕릉비

정체에 대한 논란

부여 시조 동명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엔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을 존중해 동명왕보다 추모왕이라는 칭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향인지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설이 생겨났다.

참고로 동명왕 전설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나오는 부여 건국 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하며, 백제의 왕족들의 성씨를 보면 주몽은 일단 부여계라는 게 거의 정설이다. 즉, 고구려의 건국왕인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조상인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고리국 → 부여, 부여 → 고구려로 이동하는 부분도 그렇고 설화 자체가 거의 똑같아 상당 부분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북부여기에는 동명왕이 졸본국의 왕으로서 한 무제를 물리치고 후기 북부여의 단제檀帝 가 되는 강두막이다

백제의 태조?

일본의 사서 《속일본기》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족, 귀족들은 백제 태조 도모대왕, 주몽의 다른 이름 혹은 일본식 발음인 도모를 백제의 태조라고 기록하였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에서 나왔다. 황태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이 뛰어났다. 코닌 덴노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해서 맞아들여 지금의 덴노와 사와라 친왕(早良親王)과 노토 내친왕(能登內親王)을 낳았다. 호키(寶龜) 연간[34]에 성(姓)을 (야마토에서) 다카노노아소미(高野朝臣)로 고쳤다. 지금의 천황이 즉위하여 황태부인(皇太夫人)이라 하였는데, 엔랴쿠 9년에 추존(追尊)하여 황태후라 하였다.

그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해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는데, 황태후는 곧 그의 후손이다.

— 속일본기 엔랴쿠 8년

백제인들은 온조가 아니라 온조의 아버지 주몽을 시조로 보고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정작 고구려인들은 주몽이 아니라 6대 왕을 태조대왕이라 칭했다는 점이 특이사항.

삼국사기 기록

一年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二年夏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三年春三月 황룡이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경사스런 구름이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다.
四年秋七月 성곽과 궁실을 짓다.
六年秋八月 신기한 참새가 궁전에 모이다.
六年冬十月 행인국을 정복하다.
十年秋九月 난새가 왕대에 모이다.
十年冬十一月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삼다.
十四年秋八月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동부여에서 죽다.
十四年冬十月 부여에 토산물을 주다.
十九年夏四月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해오다.
十九年秋九月 동명성왕이 죽다.

구삼국사 기록

一年 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 비류국왕 송양과 활쏘기를 하였다.
?? 비류국에서 북을 훔쳤다.
?? 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 七月 검은 구름이 끼었고 일주일후 궁궐이 완성되었다.
?? 四月 부여에서 도망쳐온 유리를 태자로 삼다.

?? 九月 왕이 하늘로 승천하고 내려오지 않았다.

  1. 강이식 장군의 친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