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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섬으로 도망간 총사령부는 충칭에서 저항군에 가담했던 수십~수백만의 국민들이 러시아에 의해 대규모 학살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저항운동의 대부분 동력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수십 년 뒤, 아무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삼두반군]] 시대가 열리면서 조금 숨통이 트이기는 했으나 이고르 쉐바네프스키는 사할린 섬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1848년 11월 20일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후임 총사령관은 자신의 아들이자 부사령관이었던 [[마오스 쉐바네프스키]]가 이어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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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섬으로 도망간 총사령부는 충칭에서 저항군에 가담했던 수십~수백만의 국민들이 러시아에 의해 대규모 학살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저항운동의 대부분 동력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수십 년 뒤, 아무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삼두반군]] 시대가 열리면서 조금 숨통이 트이기는 했으나 이고르 쉐바네프스키는 사할린 섬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1848년 11월 20일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후임 총사령관은 자신의 아들이자 부사령관이었던 [[마오르 쉐바네프스키]]가 이어받게 된다.

2024년 1월 9일 (화) 15:23 기준 최신판

베로스 국기.jpg 베로스 저항군 역대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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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로스 베로 (1768~1822) 이고르 쉐바네프스키 (1822~1848) 마오르 쉐바네프스키 (1848~1878)
이고르 쉐바네프스키
Igor Shevanevsky
베로스 저항군 2대 총사령관
이고르쉐바네프스키 사진.png
본명 이고르 쉐바네프스키(Igor Shevanevsky)
출생 1761년 2월 13일
아무르 일대
사망 1848년 11월 20일 (향년 87세)
러시아 제국 극동부 사할린 일대
직책 베로스 저항군 2대 총사령관
재임기간 1822년 ~ 1848년 (20년)
부모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 (?~1857)
자녀 아리안 쉐바네프스키(1790~1845)
마오르 쉐바네프스키(1800~1882)
돌찬 쉐바네프스키(1809~1884)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철학과 석사
종교 개신교(개혁교회)
신체 181cm, O형
약칭 IGOR

개요

베로스 공화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저항군 조직 총사령관

생애

성장과 대학 생활

쉐바네프스키는 1761년 아무르 일대에서 태어났다. 베로스 민족의 언어와 문화, 관습에 익숙해 있었으며 이쪽은 테로스 베로와 다르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어린 시절부터 키울 수 있었다. 성인이 되자 쉐바네프스키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는데, 철학 수업을 들으며 당시 유행하던 베로스 민족사를 구입해 밤을 새워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시민군 가담과 부사령관까지의 승진

석사 학위까지 수료한 쉐바네프스키는 고향인 아무르로 돌아와서 시민군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군 내에서도 엘리트 지식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 군대와 협상, 정치적 전략을 마련할 때 주로 등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활약이 좋아서 몇 년 만에 저항군 주요 보직을 맡게 된다. 이후에는 막역한 동지인 테로스 베로의 눈에 들어 부사령관까지 승진하게 된다.

아무르 지역에서의 승리

1800년대가 되자 러시아제국의 팽창주의 정책으로 현재의 아무르 시 북쪽 지역에서 저항군과 잦은 충돌이 생기게 된다. 쉐바네프스키는 뛰어난 전술 전략을 통해 러시아제국 정규군을 패퇴시키고 아무르 북쪽 일대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으며, 한동안 러시아제국은 저항군의 심장부인 충칭까지 들어가는 루트를 마련하지 못했을 정도로 애를 먹었다. 이만큼 최전방에서 활약이 뛰어나자 테로스 베로는 자신의 총사령관 권한을 대부분 위임하며 말년을 보냈고, 쉐바네프스키는 총사령관 직위를 테로스 베로 사후 이어받게 된다.

세인트 루이스 지역의 정복(1822~1830)

총사령관에 오른 쉐바네프스키는 극동부 북해안선을 따라 현재의 아얀광역시를 거쳐 세인트 루이스 산맥에 접근했다. 이곳을 장악하게 되면, 러시아제국군이 충칭으로 가는 사실 상 모든 루트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항군은 수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세인트 루이스 지역까지 정복하고야 만다.

블라디보스토크 전투와 청군의 개입(1830~1840)

극동부 대부분을 장악한 저항군은 남쪽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원래 청군은 현재의 하얼빈, 연변, 압록-두만강 유역 일대만을 자신들의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에 베로스 저항운동에 개입할 명분이 없었는데, 저항군이 연해주를 압박해오자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저항군은 러시아제국의 정규군 전술과는 달리 빠르고 날쌨던 청군의 전술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이 과정에서 저항군 절반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 피해를 입고 연해주 이북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 블라디보스토크 전투의 저항군 참패로, 틈을 타 전열을 가다듬은 러시아제국 군대는 다시 세인트 루이스 산맥을 넘어 충칭으로 진격했고, 결국 충칭까지 내주고 총사령부는 사할린 섬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1839년 충칭 함락을 참조.

말년(1840~1848)

사할린 섬으로 도망간 총사령부는 충칭에서 저항군에 가담했던 수십~수백만의 국민들이 러시아에 의해 대규모 학살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저항운동의 대부분 동력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수십 년 뒤, 아무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삼두반군 시대가 열리면서 조금 숨통이 트이기는 했으나 이고르 쉐바네프스키는 사할린 섬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1848년 11월 20일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후임 총사령관은 자신의 아들이자 부사령관이었던 마오르 쉐바네프스키가 이어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