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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8일 (일) 13:47 기준 최신판

난방공화국 국회 상징.png 난방공화국 국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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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국회
??? ~ ???
여당
난방대통당 로고.png
난방대통당
221석
야당
난방민주당 로고2.png
난방민주당
11석
난방공화국 사회당 로고2.png
사회당
8석
사라왁 정당연맹 로고2.png
사라왁 정당연맹
5석
화인제일당 로고2.png
화인제일당
2석
사바 인민연합전선.png
사바 인민연합전선
2석
사라왁 단결당 로고2.png
사라왁 단결당
1석
재적 250석 · 공석 0석
난방대통당 로고.png
난방대통당
蘭芳大統黨 | 兰芳大统党
Partai Kepresidenan Lanfang
Parti Presiden Lanfang
국가 난방공화국 난방공화국
영문명 Presidential Party of Lanfang
약칭 PPL
슬로건 단결과 헌신
團結和獻身
perpaduan dan pengabdian
창당일 1942년 3월 9일
당수 리우라이관(廖萊原)
사무총장 리티오롱(李潮朗)
국회의원 221석 / 250석 (88.4%)
청년조직 청년대통회
당보 PPLN
이념 아시아적 가치
사회보수주의
다문화주의
시장자유주의

개요

난방대통당(蘭芳大統堂)은 1942년 유원경(劉園卿)이 창당한 난방공화국의 집권여당이다. 현지 약칭은 대통당(大統堂). 난방대통당은 난방공화국 국회의 집권여당이다 사실상의 독재 정당이다. 창당 초기 무장 투쟁 정당으로써 대난항쟁을 비롯한 난방 건국을 위한 민족단결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나, 난방공화국이 사라왁, 사바를 합병하면서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였고 더이상 중국계 국민의 이해관계만을 고려할 수 없게되어 다문화주의를 표방하고 빅텐트 정당으로서의 성격을 고수하고 있다.

무장 투쟁과 제2공화국 출범​

유원경(劉園卿)은 광둥성 산웨이의 시골마을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 어부의 아들로, 유은태(劉恩台) 제16대 대당총장의 양자이다. 당시 난방공화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보호령으로 자치권을 인정받고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던 시절이었다. 1942년 3월 일본의 침공과 더불어 네덜란드 판스타르켄보르흐스타하우어르 총독의 항복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당해 3월 9일, 유원경은 그가 속해있던 공사연맹(公司聯盟) 서칼리만탄 지부의 인원 대다수를 이끌고 폰티아낙(현 카푸아스 폰티아낙)을 거점으로 난방대통당을 창설하였다. 명칭은 초대 대당총장 나방백이 제시한 정치 시스템인 '난방대통제'에서 따온 것이다.

난방대통당은 보르네오섬 서부의 대다약 자치령(Groot Dajak)과 수마트라의 보안대(保案隊) 일부를 통합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로부터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보르네오의 화인 조직 대다수가 난방대통당에 협력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영향력을 완전히 뿌리뽑고자 하였다. 초기의 난방대통당은 일본 제국에 협력하여 동인도 경제 관료 휘베르튀스 판모크를 생포하는 등 무력항쟁까지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후 일본이 패전하고, 1945년 난방공화국은 자치령의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하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다시 보르네오섬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는데, 수카르노를 주축으로 한 인도네시아 국군과 네덜란드 사이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난방공화국은 혼란기를 겪는다. 인도네시아측은 보르네오섬의 난방공화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아 화인 공동체에 대한 탄압을 진행하였는데,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확정되자 인도네시아는 난방공화국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1945년 난방대통당의 당수 지충석(池忠石)은 미국에 여러차례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분쟁 및 내분을 우려하여 링가르자티 협정 당시 난방공화국의 자치권을 보장하였다. 네덜란드는 더이상 서방 국가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난방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지지를 얻게되면서 1946년 제3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난방공화국 헌법을 선포한다.

결국 미국의 도움을 바탕으로 난방공화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영향력 하에 있던 칼리만탄 대부분과 사라왁주 서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난방대통당은 사라왁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서리푸르와의 영토 협상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난방공화국의 건국에 크게 기여한 정당으로써 국민 대다수의 압도적 지지를 받게된다.

냉전 및 독재​

중국공산당의 제2차 국공내전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제2공화국 초기만 하더라도 난방대통당은 여러 이념을 가진 화인 중심 정당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 내부의 정치적 충돌이 우려되었다. 결국 중국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난방공화국 내부에서도 친-공산당파 세력이 득세하게 되는데,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당수 지충석은 공산당파 세력을 대규모로 청산하고 민주진영에 서게 된다. 이후 지충석은 화인민족주의 진영의 하손명(河孫明)을 포섭하여 제1대 대당총장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고, 난방공화국 내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지충석은 하손명을 대당차장으로 임명하고 난방공화국군의 통솔과 사라왁주 반란군 탄압을 지시한다. 지충석은 간선제와 연임제를 도입하여 독재의 기반을 마련하고 화인중심주의를 제창하며 사라왁 통합전쟁을 도모한다.

하손명 정부와 제3공화국 출범​

사라왁 분리주의 세력과 서리푸르의 충돌, 냉전 상황까지 어우러져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하손명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통해 사라왁주와 사바주의 분리주의 세력을 탄압하여 무력 점거하였다. 하손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을 등에 업고 지충석을 숙청하여 대당총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미국은 하손명의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친중 행보를 우려하며 경고한다.

하손명은 제3공화국을 선포하고 중국과 공식으로 수교하였으며, 제3공화국 시기 대거 유입된 중국인들의 영향으로 난방대통당의 화인중심주의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제4공화국 출범과 빅텐트 정당으로의 도약​

난방대통당 오도웅(吳道雄) 총장은 마카사르 타나붐부 출신의 군인으로, 지충석 대당총장의 최측근이었다. 하손명의 급진주의와 친중 노선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과도한 규모의 국토 개발 사업으로 민생이 불안정해졌다. 간선제를 통한 독재 정치에 대한 반발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1960년대 초 대대적인 민주항쟁이 빗발쳤으며, 본토 중국인의 유입으로 난방국민과의 갈등이 가속화되어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도웅은 1962년, 다문화주의와 아시아적 가치를 표방하며 난방대통당 내에서의 입지를 충분히 다진다. 국민 여론에 힘입어 결국 하손명은 퇴임하였고, 오도웅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는 대당총장 직선제를 추진하였고 다문화주의 노선을 공고히 했으며, 난방대통당이 빅텐트 정당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오도웅은 사라왁과 사바 통합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자 친-무슬림 정책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브루나이주를 브루나이 자치주로 개편하여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1963년에 치뤄진 제6대 대당총장 선거는 제4공화국 출범 이후 최초로 실시된 대당총장 선거이며, 오도웅은 난방대통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국민의 투표으로 당선된 최초의 대당총장이 되었다.

1963년 오도웅 대당총장의 취임 이후 두 번을 제외하고 계속 난방대통당 소속 대당총장 후보가 당선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사실상의 일당독재 시스템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나, 워낙 역사가 깊고 난방공화국의 설립과 고통을 함께한 정당으로 그 위상을 고려할 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만 하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