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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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결코 자신의 내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 봤다.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휴자본(과잉자본)이 증가하고, 또한 자본에 고용되지 못하는 인구(과잉인구)도 증가할 수밖에 없어서다. 과잉자본은 금융시장에서 미래 소득에 대한 청구권 형태, 즉 증권(주식·국채·사채·모기지증권 등)으로 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증권(가공자본)은 기대일 뿐이기 때문에 제한 없이 팽창할 수 있다. 거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본주의 기술진보의 모순이 이윤율 하락을 이끌고, 이윤율 하락이 과잉자본을 만들며, 과잉자본은 가공자본 형태로 무제한 팽창하다가 불황ㆍ공황을 이끈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의 경향과 유효슈요 하락의 경향을 함께 가지고,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도 동반되며, 이들은 이윤율 저하 경향과 더불어 불황ㆍ공황의 한 원인으로 기능한다. 21세기의, 특히 코로나19 이후의 금융시장은 마르크스의 이런 예상을 잘 증명해 준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불황ㆍ공황을 통해 자신의 내적 모순을 완화하지만, 내적 모순은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될뿐이며, 이는 계급 투쟁을 격화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결코 자신의 내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 봤다.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휴자본(과잉자본)이 증가하고, 또한 자본에 고용되지 못하는 인구(과잉인구)도 증가할 수밖에 없어서다. 과잉자본은 금융시장에서 미래 소득에 대한 청구권 형태, 즉 증권(주식·국채·사채·모기지증권 등)으로 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증권(가공자본)은 기대일 뿐이기 때문에 제한 없이 팽창할 수 있다. 거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본주의 기술진보의 모순이 이윤율 하락을 이끌고, 이윤율 하락이 과잉자본을 만들며, 과잉자본은 가공자본 형태로 무제한 팽창하다가 불황ㆍ공황을 이끈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의 경향과 유효슈요 하락의 경향을 함께 가지고,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도 동반되며, 이들은 이윤율 저하 경향과 더불어 불황ㆍ공황의 한 원인으로 기능한다. 21세기의, 특히 코로나19 이후의 금융시장은 마르크스의 이런 예상을 잘 증명해 준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불황ㆍ공황을 통해 자신의 내적 모순을 완화하지만, 내적 모순은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될뿐이며, 이는 계급 투쟁을 격화한다.
  
== 마르크스주의와 교회의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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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주의와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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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논평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마르크스 특유의 '강렬한' 표현임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종교를 지배 계급의 지배를 돕는 관념적 요소의 일종으로 규정하며,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계급 관계로부터의 소외감등을 극복하기 위해 이것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 위의 언급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교가 계급 관계의 소멸과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를 통해 사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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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기독교를 비평하는 반(反)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는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실천되지 못했지만, 현대교회와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주의를 비롯한 공통된 주제들을 찾아서 대화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민중들과 연대한 사회주의자였다고 주장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사회참여를 무시하면서 내세만 찾는 기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기독교의 정신과 일치하며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회주의를 존중해야 하며 그 힘을 자신의 신앙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보았던 파울 틸리히,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몸이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는 전복적인 주장을 한)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사회주의의 영혼이라고 본 게오르크 분슈같은 종교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대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진보적인 개신교 계열의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성서는 구원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변증법으로 양립시키고자 했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기독교를 비평하는 반(反)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는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실천되지 못했지만, 현대교회와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주의를 비롯한 공통된 주제들을 찾아서 대화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민중들과 연대한 사회주의자였다고 주장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사회참여를 무시하면서 내세만 찾는 기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기독교의 정신과 일치하며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회주의를 존중해야 하며 그 힘을 자신의 신앙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보았던 파울 틸리히,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몸이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는 전복적인 주장을 한)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사회주의의 영혼이라고 본 게오르크 분슈같은 종교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대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진보적인 개신교 계열의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성서는 구원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변증법으로 양립시키고자 했다.
  

2024년 3월 24일 (일) 15: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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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독일어: Marxismus, 문화어: 맑스주의) 또는 마르크시즘(영어: Marxism) 혹은 과학적 사회주의는 엥겔스에 의하면 철학(유물론적 변증법), 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에 관한 이론)로 구성되는, 사회 계급의 관계와 사회적 충돌에 초점을 둔 사회적 분석의 방법이자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역사전개를 헤겔의 변증법의 해석으로부터 관념론적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분석하며, 사회 변동을 유물론적, 변증법적 견해로 해석한다.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은 경제 및 사회정치적 탐구를 하고 이를 자본주의 전개에 대한 분석 및 비평과 체제상의 경제 변화내의 계급 투쟁의 역할에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중후반 마르크스주의는 두 독일 철학자들—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서 사상의 영감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방법론들은 다수의 정치 이론과 사회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경제학, 마르크스주의 사회학, 정치적인 마르크스의 방법(Marx's method) 및 사회 변화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revolutionary socialism) 관점을 수반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확정적인 단일 이론은 없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다양한 주제에 적용되었고, 발달 과정 동안 오해를 받고 수정되어 마르크스주의나 마르크스적 분석 밑에 들어가는 때로는 수많은 모순되는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

시작점으로서, 경제활동을 인간 사회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들로 받아들이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전개에 대한 유물론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다. 즉, 생산 양식(mode of production)의 형태가 정치 및 법 체계, 도덕 및 이상, 문화 등의 토대인 것[1]이라 이해한다. 그러므로 생산 양식을 토대 또는 하부 구조라 부르고 사회의 관념적 요소들을 상부구조(base and superstructure)라 부른다.

생산 양식은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사회의 생산 요소들의 성능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노동 수단의 대략적인 종류 등을 기준으로 분류된다.)과 생산 관계(생산력에 의해 규정된 생산 요소들의 배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의 통일체로 이해되며, 여기서 생산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보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때, 생산력의 진보와 기존의 생산 관계가 대립함으로써 생산 양식의 내적 모순이 발생ㆍ전개된다. 이 내적 모순은 생산력의 진보와 생산 관계의 유지를 각각 대변하는 신흥 혁명적 계급과 기존 지배 계급간의 계급 투쟁으로써 구체화되며, 이들을 각각 대변하는 관념적 요소들 또한 대립함으로써 그 사회의 관념적 요소들의 운동을 이룬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의하면, 자본주의 내의 계급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간의 계급 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가변자본으로 기능하는 노동 인구와 산업예비군들로서, 생산에 관한 전문적인 경험ㆍ지식을 통해 생산력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적인 계급이다. 반면, 부르주아 계급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하여금 인간 소외를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혁명성을 억압하려는 지배 계급이다. 두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은 자본제적 생산 양식의 내적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또한 심화되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또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이 됨으로써,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됨으로써, 달리 표현하자면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됨으로써 종결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고정자본에 해당되던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경제적 시스템, 제공한 노동량 기초한 분배 및 사용 등이 정착하면 소멸(이때부터의 사회주의 사회는 원론적으로 '낮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라 불린다. )된다. 칼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기술이 계속해서 진보함에 따라 사회주의가 결국 사회 발달이라는 공산주의(정확하게는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 무너지리라 가정했다. 공산주의는 계급, 국가가 사라지고 "능력에 따른 개인으로부터 필요에 따른 개인으로(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의 원칙과 고정자본에 해당되던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 위에 세워진 인간 사회가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에 대한 다른 분파와 학파들로 발전했다. 각기 다른 학파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classical marxism)의 특정한 면을 크게 강조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면은 강조하지 않거나 거부하며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비마르크스적 개념과 결합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몇몇 변형체들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한 부분을 사회 발전의 결정적인 힘으로 보고 초점을 맞춘다. 이를테면 생산양식, 계급, 힘의 관계 또는 재산 소유와 같은 것들이 있다. 반면에 다른 면들은 덜 중요하다거나 현재의 연구는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전제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학파는 서로 다른 모순된 결과에 이를 수가 있다. 그 사례로 서로 다른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경제 공황에 대한 설명들이 모순되고 그러한 공황에 대한 다른 예상을 하는 걸 들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변형체들은 사회의 다른 면들을 연구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적용한다( 예: 대중 문화, 페미니즘 등)

이러한 이론적 차이들은 다양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당과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한 다른 정치 전략을 포용하는 정치 운동을 이끌었고 서로 다른 프로그램과 정책들을 옹호한다. 이 한 가지 예는 20세기 동안 개혁적 사회주의자들과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나타난 사회개량주의자들의 분열이다. 비슷하게 비록 러시아의 볼셰비키파는 레닌주의와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만이 마르크스주의가 적법하게 발전한 것으로 선포했지만, 멘셰비키파와 세계의 많은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원래 노선에서 벗어난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는 고고학과 인류학, 미디어 연구, 정치 과학, 연극, 역사, 사회학 , 미술사와 미학, 문화적 연구, 교육, 경제학, 지리학, 문학 평론, 비판 심리학(critical psychology) 및 철학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개요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체계화된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제까지의 역사발전의 기초를 생산활동에서 찾았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에도 불가결한, 따라서 공통된 활동이고, 또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지표(指標)를 추출해냄으로써 그 역사를 개개인의 주관적인 원망(願望)과 우연이 만든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나 의식과는 관계가 없는 자연사적 과정(自然史的過程)으로서 파악[2]하였다. 또한, 그는 생산활동을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개의 요소가 조합되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전자는 내용(양)이고 후자는 형식(질)인데, 생산력이 발전의 누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낳고, 일정 수준에서 낡은 생산관계가 파괴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생겨난다. 이 변화를 이룩하는 구체적인 현상을 계급투쟁이라고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의 하나를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근대적 사적 소유의 모순으로 보며, 이 모순은 생산력을 대변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승리에 의해서, 즉 생산관계를 대변하는 근대적 사적 소유의 부정에 의해 해소된다고 본다. 그 과정이 사회주의 사회('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낮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가 본래의 표현)이며, 그 결과는 공산주의 사회('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가 본래의 표현)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주체가 될 것이라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결코 자신의 내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 봤다.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휴자본(과잉자본)이 증가하고, 또한 자본에 고용되지 못하는 인구(과잉인구)도 증가할 수밖에 없어서다. 과잉자본은 금융시장에서 미래 소득에 대한 청구권 형태, 즉 증권(주식·국채·사채·모기지증권 등)으로 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런 증권(가공자본)은 기대일 뿐이기 때문에 제한 없이 팽창할 수 있다. 거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본주의 기술진보의 모순이 이윤율 하락을 이끌고, 이윤율 하락이 과잉자본을 만들며, 과잉자본은 가공자본 형태로 무제한 팽창하다가 불황ㆍ공황을 이끈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의 경향과 유효슈요 하락의 경향을 함께 가지고, 산업 부문간의 불균형도 동반되며, 이들은 이윤율 저하 경향과 더불어 불황ㆍ공황의 한 원인으로 기능한다. 21세기의, 특히 코로나19 이후의 금융시장은 마르크스의 이런 예상을 잘 증명해 준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불황ㆍ공황을 통해 자신의 내적 모순을 완화하지만, 내적 모순은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될뿐이며, 이는 계급 투쟁을 격화한다.

마르크스주의와 교회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논평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마르크스 특유의 '강렬한' 표현임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종교를 지배 계급의 지배를 돕는 관념적 요소의 일종으로 규정하며,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 계급 관계로부터의 소외감등을 극복하기 위해 이것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 위의 언급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교가 계급 관계의 소멸과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를 통해 사멸할 것이라고 보았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기독교를 비평하는 반(反)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는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는 실천되지 못했지만, 현대교회와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주의를 비롯한 공통된 주제들을 찾아서 대화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는 민중들과 연대한 사회주의자였다고 주장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사회참여를 무시하면서 내세만 찾는 기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기독교의 정신과 일치하며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회주의를 존중해야 하며 그 힘을 자신의 신앙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보았던 파울 틸리히,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몸이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는 전복적인 주장을 한)예수의 산상설교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사회주의의 영혼이라고 본 게오르크 분슈같은 종교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공통점을 찾음으로써 대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진보적인 개신교 계열의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성서는 구원에 대해 말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변증법으로 양립시키고자 했다.

평가와 비판

마르크시즘은 하나의 방대한 세계관이다. 그 정치이론은 계급 투쟁이요, 그 역사이론은 유물사관이요, 그 경제학은 잉여가치설(剩餘價値說)이요, 그 철학이론은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 이 여러 이론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마르크시즘에 관해서는 사르트르의 비판이 있다. 즉, 유물론은 실증주의를 가장한 하나의 형이상학이요, 변증법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논리요, 유물변증법은 혁명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마르크스주의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은 출판 및 연구가 터부로 여겨졌으나, 1981년 초에 문교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비판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주는’ 이데올로기 교육의 방향이 제시되어, 문화공보부에서 1982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연구서들의 출간을 허용하였다. 이들에 대한 이해와 비판의 한계로 1980년대 중반에는 공산주의 비판서들이 다수 출간되기도 하였다.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은 군사독재정권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었다. 6월 항쟁 이후인 1987년 여름에 이론과 실천사에서《자본》을 한국어판으로 번역·출판하였으나, 이듬해 출판사 사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89년에는 각 대학교에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강의들이 신설되어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대학생의 마르크스-레닌 관련 서적의 개별적인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북한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음이 알려졌다.

  1.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관념적 요소들의 물질적 요소들에 대한 영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2. 다만, 이 부분은 대중적으로 오해가 있는 부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을 '의식의 경험'의 일종으로 파악한, 즉 의식의 전개 과정의 부차적인 요소로 파악한 헤겔의 극단적인 관념론적 견해를 부정하였고, 사회의 관념이 사회의 물질에게 부차적인 것이라고 보앟을뿐, 사회의 관념의, 사회의 물질에 대한 영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