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르 2세(식혜)

식혜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4일 (목) 19: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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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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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제3대 국왕
페타르 2세
Петар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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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페타르 2세
Петар II
출생
1923년 9월 6일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 베오그라드
사망
1970년 11월 29일 (47세)
베오그라드 로얄 컴파운드 왕궁
묘소
다뉴브 토폴라 오플레나츠
재위
유고슬라비아 왕국국왕
1934년 10월 9일 ~ 1970년 11월 3일
이름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
Пет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가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배우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자녀
알렉산다르 2세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
어머니
루마니아의 마리야
형제
토미슬라브, 안드레이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Kralj Petar II portrait.jpg

공식 초상화

개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제3대 국왕.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가 1934년 암살당하자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작위

유고슬라비아 국왕 휘장.pngRoyal Monogram of King Peter II of Yugoslavia.svg
문장모노그램
  •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инц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ник Пет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СХС (1923년 9월 6일 ~ 1929년 1월 6일)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ник Пет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Југославије (1929년 1월 6일 ~ 1934년 10월 9일)
  •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 카라조르제비치 국왕 폐하 Његово Величанство краљ Петар II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Југославије (1934년 10월 9일 ~ 1970년 11월 3일)

생애

출생과 성장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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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살이 된 페타르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왼쪽부터 페타르 왕자, 토미슬라프 왕자, 마리야 왕비, 안드레이 왕자

페타르 2세는 1923년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의 왕이었던 알렉산다르 1세를 아버지로, 루마니아의 공주였던 마리야를 어머니로 하여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마리야는 영국 왕실과 혈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페타르 2세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 페타르에서 따온 것이었다. 페타르 2세는 비록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냈으나 몸이 약하여 자주 병치레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국에 가서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알렉산다르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했을 때(1934년) 영국에 머물러 있었다. 페타르 2세는 암살 사건 후 세르비아로 돌아와 베오그라드에 있는 궁에 살면서 정규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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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2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기간 중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던 페타르는 그리스 공주 알렉산드라를 알게 되어 1944년 3월에 결혼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리스 왕실,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었다.

결혼 후, 1년 만인 1945년에 런던 메이페어 클라리지 호텔 212호실에서 첫자식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다르를 낳았고, 출생 직후 알렉산다르를 왕세자에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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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왕세자를 안고 있는 알렉산드라 왕비와 페타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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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찍은 가족사진

그들은 알렉산다르를 출산했으나 페타르 2세도, 알렉산드라 왕비도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금방 회복되었다. 둘의 결혼 생활도 페타르 2세가 1970년에 간경변으로 사망하면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페타르 2세의 사망하면서 알렉산드라도 큰 충격에 앓기도 했지만, 무려 100세까지 장수했다.

왕위 즉위와 섭정단

페타르 2세는 1934년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가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암살 당시 페타르 2세는 11세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미리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섭정단이 구성되어 페타르 2세를 대신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사촌인 파블레를 섭정인으로 지정하였으며 파블레에게 자신의 재산 관리까지 위임하도록 명시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파블레를 중심으로 한 3인(파블레, 라덴코 스탄코비치, 이보 페로비치)의 섭정단이 구성되었다. 이후 파블레는 페타르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야를 제쳐놓고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으며 심지어 페타르 2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유고슬라비아의 왕위에 오르려는 방향으로 정치를 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페타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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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망명 시절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윈스턴 처칠 수상과 함께 한 페타르 2세(1941년)

1939년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침공을 시작으로 주변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유고슬라비아도 나치 독일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은 1940년 결성한 3국동맹(독일-이탈리아-일본)에 가입하도록 유고슬라비아에 압력을 넣었으며, 독일의 이러한 요구에 직면한 파블레 공(公)은 결국 3국동맹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당시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수반이었던 드라기샤 크베트코비치와 외무장관 알렉산다르 친차르 마르코비치가 1941년 3월 25일 비엔나에서 3국동맹 가입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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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열 중인 페타르 2세, 1941년 베오그라드

하지만 3국동맹 가입 서명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국내에서는 커다란 불만이 야기되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친영국 세력은 1941년 3월 25일 정부와 3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군부 내에서도 두샨 시모비치 장군과 보리보예 미르코비치 장군을 중심으로 한 반란 세력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1941년 3월 26일과 27일 밤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베트코비치-마체크 정부는 전복되고 친영국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구성되었다(수상에 두샨 시모비치, 부수상에 블라트코 마체크).

쿠데타 세력에 의해 페타르 2세는 아직 만 18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인(成人)으로 공포되었으며, 실권을 잡게 되었다. 당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머물고 있던 파블레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슬로베니아로 이동했으나 베오그라드로 돌아와야만 했으며 베오그라드에서 곧 바로 케냐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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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폭격으로 허물어진 베오그라드의 건물

나치 독일은 3국동맹 가입을 철회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1941년 4월 6일 베오그라드를 폭격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공격은 4월 18일까지 지속되었다(4월 전쟁). 전쟁 준비가 미비했던 유고슬라비아군은 나치 독일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페타르 2세는 결국 자신의 정부 인사들과 함께 그리스로 도피, 이집트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왕국으로

페타르 2세는 영국 망명 정부 시절 '조국 내의 유고슬라비아군'의 사령관으로 드라고류브 드라쟈 미하일로비치'를 임명하여 나치 독일을 격퇴시키려고 했으나 미하일로비치가 나치 독일과 협력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국내외에서 지지를 상실했다. 또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파르티잔 활동에 밀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타르 2세는 자신의 동생인 토미슬라프와 안드레이를 전쟁에 참전시켰고, 왕실 자본을 항전 활동 지원에 쏟아부었다.

티토가 주도한 '유고슬라비아인민해방반파시스트위원회'는 1943년 11월 29일 개최된 제2차 회의에서 페타르 2세의 귀국을 금하고, 왕과 왕정에 대한 문제는 전국이 해방된 후 차후에 다루기로 결정했다. 이후 1944년 11월 2일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된 티토와 슈바쉬치 회담에서 왕을 대신할 섭정단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페타르 2세는 이러한 섭정단 결정을 상당 기간 추인하지 않았지만 1945년 3월 3일 어쩔 수 없이 섭정단 구성에 동의해야만 했다.

섭정단은 3월 6일 바로 티토에게 임시내각 구성권을 위임했다. 왕실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은 1945년 11월 29일 개최된 유고슬라비아 제헌의회에서 이뤄졌다. 당초 왕정을 폐지하는 의견으로 힘이 모였지만, 왕족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고, 왕실 자본을 항전 활동 지원에 쏟아붓는 등 국내 상황을 방관하기만 한 것이 아닌 점을 고려하여 왕실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왕실을 곱게 보지 않는 국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왕실 지지율은 매우 낮았다. 결국 왕실은 오랜 기간 반성과 자숙의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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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2세의 장례식, 1970년 오플레나츠
국왕 폐하께서는 오늘 오후 왕궁에서 평온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왕궁 발표문

1970년 11월 3일 오후, 왕궁은 "국왕이 왕궁에서 평온히 눈을 감았다."고 발표했다. 오후 3시경 사망했으며, 당시 페타르의 곁은 어머니 마리야 왕대비, 알렉산드라 왕비와 아들 알렉산다르 2세, 동생 토미슬라프 왕자와 안드레이 왕자가 지켰다. 사인은 간경변으로 알려졌다.

가족관계

본인부모조부모증조부모
페타르 2세
(Петар II)
알렉산다르 1세
(Александар I)
페타르 1세
(Петар I)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페르시다 네나도비치
(Персида Ненадовић)
몬테네그로의 류비카
(Љубица од црногорска)
니콜라 1세
(Никола I)
밀레나 부코티치
(Милена Вукотић)
루마니아의 마리아
(Марија од Румуније)
페르디난드 1세
(Ferdinand I)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 후작
(Leopold Fürst von Hohenzollern)
포르투갈의 안토니아 공주
(Antónia de Bragança)
에든버러의 마리
(Marie of Edinburgh)
알프레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Alfred Herzog von Sachsen-Coburg-Gotha)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남알렉산다르 2세
(Александар II)
1945년 7월 17일캐서린 클레어리 베이티스
슬하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