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토 왕국/역사

개요

가무토 왕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다.

선사시대

야쿠모 민족(八雲民族)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 옛 가무토 땅에는 석기 문화와 함께 농경 생활을 영위하며 씨족 단위의 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도래한 이민족이 토착 민족과 결합하면서 야쿠모 민족이 형성됐다. 이후 이들은 청동기 문명을 이룩했고,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평등사회는 점차 계급사회로 변해갔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저지대는 물에 잠겨 하나였던 가무토는 적열도와 청한도, 초명도, 일백도, 신월도 5개의 섬으로 나뉘게 됐다.

팔운시대[1]

서로 고립된 섬들에서는 각각의 풍토에 맞춰 국가가 탄생하고 있었다. 현 반월시 지역을 도읍으로 세워진 팔운(八雲), 현 설화시 지역을 도읍으로 한 서유(西惟), 현 경무시를 중심으로 건국된 양원(陽原)의 등장으로 가무토는 삼국시대를 맞이했다. 팔운은 일본의 문화와 일본로 전래된 한반도 문를 수용하면서 국력을 점차 키워나갔고, 주변 약소 부족들을 하나둘씩 복속하면서 활동의 반경을 넓혀나갔다. 서유와 양원도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문화을 이룩하면서 국력을 키어는 중에 있었다.

그러던 458년, 팔운과 서유가 창해에서 전투를 벌였다.(창해전투, 458) 외부로 세력을 펼치려는 두 국가의 충돌이었다. 창해전투에서 양국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지 못한 채 462년에 전쟁은 종결됐다. 무리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지자 곳곳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며 난이 발생했다. 특히 470년에 발생한 암천 농민의 난은 암천성을 장악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금문대왕은 왕권강화를 통헌 정국 안정을 꾀하기 위해 귀족들의 사족회의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의 비서 기관인 사감부의 수장인 사감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또한 도읍을 중천(현 반월시)에서 장경(현 금뇌시)으로 천도하여 반월시의 귀족들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왕실의 재정 수입은 증가하였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다. 금문대왕은 이후 양원과 동맹 관계를 맺어 팔양동맹을 수립했고, 마침내 서유를 공격한다. 팔양동맹의 공세에 항복한 서유의 통치권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 팔양동맹은 파기됐고, 결국 양원의 선제공격으로 팔양전쟁이 발발했다. 팔운의 승리로 끝난 팔양전쟁에서 금문대왕은 전사했고, 그 뒤를 이어 문주왕이 즉위한다. 문주왕은 금문대왕의 기조를 이어 받아 삼국을 통일한 팔운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문주왕은 서유와 양원 출신 인물을 차별하기보다는 주요 공직에 앉히거나 왕실 호위대에 이들을 선발하는 등 민족 통합 정책을 전개했다. 그 결과 통일 직후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은 금세 가라앉았다.

한편 안정된 상황이 지속되면서 이 안정에 대한 감사함과 오래도록 지속되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수호신을 기리고 제사를 올리는 가무토 토착 신앙이 등장했다. 일명 가무토 신토. 초기에는 가무토 전체를 수호하는 하나의 수호신만이 있다고 여겼으나 이후 각 섬에서 지역주의가 고착화되면서 각 섬을 수호하는 수호신이 있다고 여기게 돼 현재의 가무토 신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각 섬에 사당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적열도의 풍요의 사당, 청한도의 뇌우의 사당, 초명도의 맹아의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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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사당

점점 세를 불려가는 가무토 신토는 곧 왕실 종교로 수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실의 주관 아래 진행되던 제사는 현재의 '제례제'라는 축제로 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세가 강해졌다. 왕은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국정을 뒤로 한 채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막대한 세금과 지방관의 횡포에 버티지 못한 농/어민들은 산적이 되거나 해적이 되었고 일부는 일본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조파와 창조파, 급진파로 나뉜 국론은 더욱 혼란한 상황을 야기했다. 결국 급진파는 초명도 지역에 연호를 금수, 국호를 연원으로 하는 새 나라를 세웠고 창조파는 청한도 일대에 진웅을, 개조파는 팔운을 계승해 가무토를 세웠다. 그리하여 가무토는 새로운 정국을 맞이했다.

삼국시대[2]

삼국의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민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들은 친민(親民) 정책을 수립해 민심을 사는 등의 노력을 진행했다. 그 결과 삼국은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3개의 나라로 쪼개진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 침략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면서 민란이 발생했다. 연원에서는 진흥의 농민들이 봉기했고 진웅에서는 옥천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가무토에서는 암천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삼국은 민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편 외부의 침략을 마냥 두고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국방력 강화에도 열을 올렸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멀리하면서 삼국에서는 독자적인 문화가 싹을 트기 시작했다. 가무토에서는 가무토 신토에 기반하여 문화가 발달했고 진웅에서는 불교 문화가 자리잡았다. 연원은 종교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에 상당히 세속적인 문화가 자리잡았다. 이는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적열도 지역에서는 가무토 신토 신자 비율이 높은 반면에 청한도 지역에서는 불교의 세가 강하고, 초명도 지역은 두 지역에 비해 무교의 비율이 높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통일된 정부가 세워지자 삼국은 일본과 밀접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을 통해 조선과도 교류를 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일본과 조선의 선진 문물과 조선을 통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삼국은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었다. 반면 연원은 가무토와 진웅이 길을 막고 있어 외국과의 교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무토, 진웅과 연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게 됐다.

그러던 16세기 중반, 진웅은 연원을 공격했다. 연원이 약해진 틈을 타 기습한 것이다. 조선, 일본, 중국의 선진 문물로 한층 강해진 진웅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연원이었기에 연원은 진웅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가무토는 진웅의 확장에 경계심을 거두지 않는 한편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고자 대화의 창을 마련했다. 하지만 진웅은 이를 거절하고 가무토를 공격하면서 과거의 창해전투가 다시 재현됐다.(제2차 창해전투, 1762)

8년에 걸친 전쟁은 가무토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이후 약 200년 간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기간동안 가무토는 내부적으로는 경제, 정치, 사회가 안정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주변국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전성기는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끝이 나고 말았다.

국권피탈과 독립

미국의 페리 제독은 원호시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했고, 결국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시작으로 가무토는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가무토의 이권은 하나둘씩 뺏기고 말았다. 서양에서 대거 유입된 상품과 은화의 급증은 가무토 경제의 폭락을 의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도 불평등 조약을 요구해오면서 가무토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1910년 가·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면서 가무토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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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토에 게양되는 일장기

일본은 식민지 운영 초기 칼과 폭력을 앞세워 무력통치를 표방했지만, 한국의 3·1 운동과 가무토의 독립운동을 보며 일본은 문화통치로 그 노선을 변경했다. 겉으로는 유순한 통치 방식이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간사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문화통치에 다량의 친일파가 배출되기도 했다. 대공황과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일본 내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가무토의 수산물을 약탈해 가 전국적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30년대 들어서 일본은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총동원령과 징용령, 징집령을 차례로 선포하면서 가무토의 인력 수탈을 본격화했다. 그러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가무토를 점령해 일종의 군사기지로 활용했다. 이후 다시 일본에게 점령당했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가무토는 광복을 맞이함과 동시에 미국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현대

중국으로 망명해 있던 가무토 망명정부는 광복 소식을 듣고 가무토로 귀국했다. 미국은 망명정부의 입국을 거부했으나 여론 악화로 인한 반미국가의 탄생을 우려해 마침내 망명정부의 입국을 승인했다. 돌아온 망명정부는 1948년 가무토 왕국 건국을 선포했고 같은 해 9월 의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또한 제헌의회는 반민족처벌위원회(반처위)를 발족해 친일파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성과를 올린다.

몰수한 친일파의 재산과 미국의 원조,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바탕으로 가무토는 2차 산업에 집중적인 투자와 인프라 개발에 주력한다. 2차 산업으로 창출된 자금은 3차 산업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가무토는 안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불어닥친 거품 경제 붕괴의 여파가 가무토에도 닿았고, 나아가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해 마땅한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힘든 상황에 봉착해 있다.

한편, 2000년대까지 정계를 장학하고 있는 민주당이었지만 자유당과 국민당이 합당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민주당이 밀려나고 국민자유연합이 집권하게 됐다. 현재 진보 정당의 연합체인 민주연대와 두 거대 보수 정당의 연합체인 국민자유연합이 양당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1. 일각에서는 삼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2. 일각에서는 후삼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