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논쟁 (매지컬 다이너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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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논쟁
癸未論爭
참가자영조·인원황후·화완내친왕·정조 선황제·노론·소론
장소틀:나라자료 조선
날짜1763년 (성광 39) 1월 5일 ~ 3월 1일
사망자인원황후
원인임오화변
후계자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등
결과인원황후의 승하, 정조의 황위 계승

계미논쟁 (癸未論爭)은 성광 39년(1763년)에 대한제국에서 황위를 이을 계승자 책봉을 두고 발생한 논쟁이다.

배경

임오화변 이후 사도태자가 숨을 거두면서 황위를 이을 계승자가 공석이 된 것이 배경이 된다. 사도태자태자비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손영조정성황서 사이에서 태어난 사도태자의 여동생 화완내친왕을 두고 누구를 계승자로 책봉할 것인가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충돌한 것이다.

전개

노론-소론 간 충돌

임오화변 1년 후 영조가 고령으로 인해 정순황서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낳지 못한다는 어의의 진료 결과가 나오자 사도태자를 견제하던 노론은 황위를 원손이 이을 경우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역모죄로 폐위된 태자의 뒤를 이어 원손이 아닌 황녀이신 화완내친왕께서 황위를 이으셔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며 조정에 논란이 일기 시작한다. 이에 사도태자를 지지하던 소론은 '원손이 계시니 태자를 이어 원손께서 태손에 오르셔야 한다'고 주장하며 충돌한다.

논쟁 초기에 영조는 노론 측의 손을 들어주며 화완내친왕에게 '황녀는 황태녀 자리를 이어받을 준비를 하라'는 하교를 내렸고, 화완내친왕은 경악하여 궐에 들어와 하교를 거두어주실 것을 청하며 석고대죄한다. 태황태후이던 인원황후 역시 '멀쩡한 손자를 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 정녕 천륜을 끊을 셈인가'라며 영조를 다그쳤다.

인원황후 - 영조의 충돌

영조는 인원황후의 반대에 반발해 '황위를 이을 자조차 제 뜻대로 하지 못한다면 퇴위하겠으니 태후께서 황위 계승자를 지명하시라'며 격노했고, 인원황후 역시 이에 '윤허하오, 내명부 지밀원은 지금 새 황제를 맞을 것을 준비하라.'고 하교하며 정면으로 충돌했다.[1] 이 소식을 들은 원손 역시 퇴위를 거둘 것을 청하며 석고대죄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지밀원에서 태황태후에게 '내친왕전하와 원손저하께서 한겨울에 석고대죄하시니 마마께서 거두어주시라'고 고하였고, 태황태후는 이에 '지금껏 내 너무 오래 살아 문제다'라며 기거하던 대비전(경복전)문을 걸어잠그고 단식시위에 이른다.

노론과 소론의 언쟁이 황실 내 집안싸움으로 번진데다 추운 겨울 석고대죄를 하고 있는 화완내친왕, 원손과 고령의 나이에 단식 투쟁을 벌이는 인원황후의 건강이 악화될 경우 발생할 역풍을 우려한 소론은 영조에게 '내친왕 전하와 원손저하를 인정전으로 들여 직접 뜻을 들어보소서'라는 간언을 올리고 영조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화완내친왕은 원손을 인정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하여 궁인들이 원손의 진입을 막도록 한 후 홀로 인정전에 들어가 영조와 대신들에게 '소녀는 덕이 없어 치국에 적합하지 않으니 총명하고 명석한 원손을 황태손으로 삼으소서'라고 고한다.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내친왕의 결단이 참으로 어질도다'라며 크게 칭찬하며 화완내친왕과 부군에게 저택과 전답을 내려 포상하였다.

봉합

황태손 책봉 교지


황제는 이르노라. 임오년의 화로 인해 동궁이 빈지 어언 8개월이 되어감에 동궁을 다시 정위하고 제위를 이을 후사를 세움이 마땅한지라. 내가 얇은 덕으로 대업을 이어받아 계서의 중함을 생각하여 항상 마음에 품고 있는데, 원손은 총명하고 그 효와 충이 그득하여, 지금 마땅히 동궁에 정위하여야 하므로, 공경하게 사직과 종묘, 선원전에 고하여 황태손으로 삼노라.

영조는 화완내친왕의 청을 받아들여 원손을 황태손에 책봉하고 이를 윤허할 것을 청하는 교지를 경복전에 보냈는데, 인원황후는 '직접 황상이 오기 전까지 윤허하지 않겠다'고 하교하여 결국 영조가 직접 윤허를 청하며 경복전에 들어 인원황후와 화해했다고 전한다.

결과

다시는 황태손을 공격하지 말며 를 황태녀로 올리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 혹여 그런 말을 한 자는 내 필히 목을 벨 것이다.
— 대한제국실록 영조현황제실록 계미년 기사

결국 영조는 원손을 황태손으로 책봉했다. 화완내친왕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은 오히려 화완내친왕에게 일갈을 당했다. 화완내친왕은 '한번만 더 황태손을 흔드는 자가 있다면 내 친히 목을 벨 것이다'라며 엄포를 놓았다.

영조의 행동에 반발하며 단식에 들어갔던 인원황후는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황태손 책봉식 직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때 인원황후는 유언으로 남긴 교지에 '내친왕의 황태녀 책봉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혹여 그리 되었을 시에 정쟁에 빠져들어 위험에 빠질 내친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던 이 할미의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미안하다. 내 소유 전답을 모두 화완내친왕에게 상속한다.'고 남겼다. 화완내친왕은 이 교지를 받아들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전한다.

분석

영조의 해프닝

이 모든 것이 영조가 화완내친왕과 정조의 황위계승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 한성대학 사학과 이성혁 교수 논문 中

이 논쟁 자체가 영조의 큰그림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사도태자가 역모죄로 몰려 숨을 거둔 터라 원손이던 정조가 정통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정조 자체도 법적으로는 일찍 죽은 큰아버지 효장태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현 황제의 직계혈족이자 황녀인 화완내친왕을 위시로 한 세력이 원손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본인 재위 시절에 화완내친왕과 정조의 황위계승권을 정리하여 원손과 화완내친왕을 모두 보호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완내친왕이 황위계승을 포기하자마자 화완내친왕을 지지하던 입장을 거두고 원손을 바로 황태손으로 임명했다는 것. 당시 오라비를 공격했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2]에 시달리던 화완내친왕에게 고모로서 조카를 보호해주고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이미지를 통해 화완내친왕의 평판 개선도 도모했다는 것이다.

각주

  1. '금상이 경복전에 들어 태황태후에게 격노하여 아뢰기를, '황위를 이을 자를 내 뜻대로 하지 못하니 퇴위하겠으니 태황태후께서 계승자를 지명하시옵소서'하였다. 이에 태황태후는 차분히 대응하며 하교하기를, '금상의 퇴위 요청을 윤허하니 내명부 지밀원은 새 황제를 맞을 준비를 하라' 하였다.'
    — 대한제국실록 영조성황제실록 계미년 기사
  2. 저자에 나도는 소문에 '내친왕이 오라비인 사도태자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르려 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여 황제가 근심하였다.
    —  대한제국실록 영조성황제실록 임오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