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연방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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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영연방제국의 역사를 나타낸 문서이다.

선사 시대

크로마뇽인들이 BC 4만~3만년 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빙하기 때 종적을 감추었다. 중석기 시대 말까지도 브리튼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어 떠돌이 사냥꾼들이 가끔 드나들었는데 BC 1만 1천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자 툰드라가 삼림으로 바뀌고 매머드 사냥 대신 붉은 사슴과 노루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해빙기 이후 BC 6천~5천년경에 브리튼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는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천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BC 2천년대 초에 네덜란드 지방과 라인 강 중류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를 들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브리튼 섬을 장악한 것은 웨식스의 족장들이었는데 이들의 호화스러운 무덤 등이 남아 있고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 기념물을 세울 수 있었다. 스톤헨지는 그 당시 대표적인 순례지로 그 치유력을 믿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에는 콘월과 아일랜드에서 중부 유럽과 발트 해에 이르는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켈트시대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해 구릉 지대에 성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BC 2세기에 이르면서 브리튼에는 켈트 고유의 섬 국가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돼지 고기와 맥주를 주로 먹고 드루이디즘 의식이 발달했고 켈트족 특유의 토조 성채를 쌓는 등의 기술이 발전했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도 이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명목상의 왕들도 존재했고 사람에 따라 계급도 나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살아갔다. 이후 갈리아의 가까운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지만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로만 브리튼 시대

켈트족이 살고 있던 브리튼은 수백 년 동안 로마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하게 된다. 브리튼이 로마의 침공을 받은 것이 나오는 첫 번째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브리튼의 켈트 족이 갈리아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구실로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튼을 침공해 명목상의 복속 약속과 인질을 받고 떠난다. 이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자 한 번 더 침공하게 되지만 역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1세기 동안이나 브리튼은 로마 제국과는 무관하게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여러 귀족들이 새로운 땅을 지배하기를 갈망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다시 공격받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잉글랜드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했다. 이후에 도미티아누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즈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켈트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 로마 제국에게 점령된 브리튼은 거의 300년 동안 통치를 받으면서 하드리아누스 때는 스코틀랜드와의 접경에 장벽을 세워졌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때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까지 공격받았다. 그러나 칼레도니아 정복은 끝내 실패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는 스코틀랜드가 되고 남부는 잉글랜드, 웨일스가 된다.

로마가 점령한 브리튼은 로만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는데 현지 켈트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로만-브리튼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만-브리튼 문화는 대영의 지명이나 영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로마 제국이 훈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0년에는 로마 군단이 철수했다.

중세 시대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떠난 뒤로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방면에서 계속 픽트족, 스코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본토에서 대규모로 앵글로색슨족 용병이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그러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잠시나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 결국 바다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을 견디다 못한 브리튼인들이 복속되어 7세기경까지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였고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 사이의 전쟁 끝에 칠왕국이 나타났다.

8~9세기에 브리튼 섬에 바이킹들이 침략했다.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에 의해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간신히 영토를 지켰다. 10세기 초에 웨섹스의 국왕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합쳐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확고해졌다. 이후 11세기에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영국을 잠시 정복해 잠시 잉글랜드를 지배했다가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인 웨식스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내세워서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해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고 월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을 대신해 정복 왕조와 이들을 따라 온 프랑스 노르만 영주들이 빈 자리를 차지했다. 공작, 백작, 자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위가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던 데다가[8]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노르만 왕조는 스티븐 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2세(헨리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 잉글랜드 등을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았고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이다. 로빈 후드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어 스코트인들의 망치라고 불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양털을 보유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확보에 더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연대 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워 승기를 잡았지만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쫓겨난다. 백년 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져 헨리 튜더가 승리를 차지했다.

근세시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험프리 길버트 경이 현재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대영의 아메리카 최초의 영유권을 선포하고 1585년 월터 롤리 경이 보낸 함대가 현재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스테리하게 사라져버렸고, 실질적인 대영의 식민지 건설의 시작은 1607년으로 본다.

이후 대영은 발견한 카리브 해의 무인도를 장악했고 7년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인도의 벵골 지방과 캐나다의 퀘벡 주도 정복한다. 그러나 1783년에 미국 지역에 있던 아메리카 13개 식민지가 영국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일으킨 미국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파리 평화 조약에서 대영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대영의 아메리카 주요 영토 지배 시기는 다음과 같다.

  • 카리브 섬
-세인트키츠 (1625년~)
-바베이도스 (1627년~)
-앤티가 (1632년~)
-자메이카 (1655년~)
-그레나다 (1763년~)
-트리니다드 (1797년~)
-대영 기아나 (1803년~)
  • 북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 (1607년~)
-매사추세츠 (1620년~)
-메릴랜드 (1632년~)
-코네티컷 (1635년~)
-로드아일랜드 (1644년~)
-노스캐롤라이나( 1662년~)
-사우스캐롤라이나 (1662년~)
-뉴욕 (1664년~)
-뉴저지 (1664년~)
-뉴햄프셔 (1679년~)
-펜실베이니아 (1681년~)
-델라웨어 (1704년~)
-조지아 (1713년~)
  • 캐나다
-노바스코샤 (1713년~)
-로어/어퍼 캐나다 (1759년~)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철기군(Ironside)를 조직하여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내전 초반 왕당파에 군사적으로 밀리던 의회파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크롬웰은 철기군을 중심으로 신형군(New Model Army)을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648년 스코틀랜드군 9천 명이 찰스 1세의 복위를 외치며 잉글랜드 북부를 심하게 약탈하자 8,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프레스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섬멸했다.

의외지만 찰스 1세와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사로잡히고 나서도 크롬웰이 깍듯이 예우 했으며, 찰스 1세는 군대가 의회보다 자신에 우호적이라 여길정도로 착각하며 재기를 꿈 꿀정도였고, 말이 포로지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찰스 1세의 편지보관함 궤짝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변하는데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들에게 사로잡혀서 좋은 말로 속이고 있고, 추후에 남김없이 모가지를 칠것'이라고 으스대는 내용의 찰스 1세가 왕비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크롬웰은 국왕 처형에 찬성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이후 국왕과 협상하려는 장로파에 맞서 국왕을 극형에 처하자는 독립파의 수장이 되었으며, 결국 장로파를 몰아내고 결국 찰스 1세 처형의 주동자 중 하나가 된다.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1650년, 찰스 왕세자를 데려와서 국왕 찰스 2세로 추대하자, 크롬웰은 이를 응징하고자 1650년 7월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이 전면전을 회피하고 청야전술로 괴롭히자, 크롬웰은 결국 많은 병사들을 질병과 굶주림으로 잃은 채 잉글랜드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던바 남쪽에 주둔한 스코틀랜드군이 퇴로를 가로막자, 그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이후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크롬웰은 100명의 손실만 입은 채 적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크롬웰은 본국으로 돌아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651년 9월 잉글랜드로 쳐들어온 스코틀랜드군을 우스터 전투에서 괴멸시키고 왕당파 세력을 전부 일소시켰다.

이후 독립파가 중심이 되어 대영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부인 '잉글랜드 연방 혹은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우자 크롬웰은 국가 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한다. 정식 명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연방 호국경(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으로, 최고 통치권과 정부권을 호국경에게 위임하는 것을 규정한 헌법이 대영 역사의 유일한 성문법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이다. 이는 의회가 아닌 장로교회의 아이디어였다.

근대 시대

존 처칠 시기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된 후 크롬웰은 국교를 청교도로 바꾸었고

이에 스코틀랜드 전역과,잉글랜드 일부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크롬웰은 농민봉기 진압도중, 1658년 런던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크롬웰이 죽고 의회의 反크롬웰파는 크롬웰의 3남이자 당시 날라리였던 리처드 크롬웰을 호국경에 추대하였으나, 의회다수를 장악였던 크롬웰파는 크롬웰의 장남인 올리버 크롬웰 2세를 추대하였으며, 1658년 의회에서 올리버 크롬웰 2세가 과반이상 표를 확보해 2대 호국경에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 2세는 1658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와 제임스를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이에 찰스와 제임스는 복귀하였고 그후 현제까지도 왕족으로써 연금을 받고있다

그후 23년간 아버지와 같은 금욕생활을 추진하였던 올리버 크롬웰 2세는 1681년 런던에서 왕당파 리처드 스티브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 올리버 크롬웰 3세가 있었으나 7살의 어린나이였고, 이에 의회는 리처드 크롬웰은 3대호국경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리처드 크롬웰은 사치와 지나친 파티로
재정을 낭비하였고, 1683년 의회가 불신임안을 재출하자 바로 의회해산을 때려버렸다(리처드 해산)

이에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존 처칠은 불만을 표출하였고 의회에 크롬웰을 몰아내자는 구호를 내걸며 사실상의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

결국 크롬웰의 군사와 처칠의 군사는 런던 외곽 캐임브릿지에서 대격돌을 하였으며 리처드는
잉글랜드 버밍엄과 브리스톨등지에서 자신의 지지새력을 모아 대치하였으며, 2년간 내전이 발생하였다(크롬웰 박멸전)

1685년 12월 12일 브리스톨이 함락하자 크롬웰은 아일랜드로 도주하였고 의회에서는 내전을 이끈 존 처칠에게 호국경직 취임을 권유했으며, 존 처칠은 1685년 12월 15일 35살의 젋은 나이에 호국경에 오른다.

존 처칠은 호국경이라는 직책에 올랐으나 국민과 의회는 그가 언젠간 크롬웰처럼 될것같다고 판단, 그는 자리를 못마땅히 여겨, 호국경 취임 1년 후(1686년 9월 7일), 의회에서 독재체제를 버리고 다시 황제가 군림하되, 민의에 의해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의회는 크롬웰에게 극딜당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적극 환영하고 그를 지지하였고, 국민 대다수도 이에 찬성하여 존 처칠이 황제에 오르고, 군주제가 다시 시행된다. 이것이 처칠 가가 황족이 된 시발점이 되었다. 그가 실시한 의회 담화는 '존 처칠 담화'로 유명한데, 그 중 아래의 대목이 가장 유명하다.
짐은 의회를 적극 존중하며, 민의를 따르는 정치 안에서 최소한의 권한만 행사할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687년, 그는 웨식스-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을 연방제로 합친 대영연방제국의 건국을 선포하며 커먼웰스 공화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잉글랜드왕국에서 웨일스를 분할시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4개의 왕국으로 분할시키는 한편, 각국을 행정구역상 주의 형식으로 구성시켜 사실상 연방제를 실시하게 된다.

존 처칠은 양원제를 채택하였는데, 존 처칠은 서민원의 의회의장이 '서민 대표자 (Representative of Commons)'라는 직책에 임명하기로 하였다. 이는 지금의 총리과 같은 직책이다.

크롬웰 정권 몰락이 시작된 것이 의회의 반발이 아닌 처칠의 군사였던만큼, 사실상 처칠이 정권을 잡은 이후 의회에 대해선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면서, 힘을 잃은 기성 귀족들은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나,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자문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의 자녀들을 서민원에 진출시키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존 처칠이 사망할 때까지 '서민 대표자'는 전부 귀족 출신 인사들로 선출된다.
초대 서민 대표자는 찰스 1세의 차남 제임스가 결정돼었다 전 웨식스/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출된다.

이는 제임스가 크롬웰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 다시 브리튼 섬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황실에 적대적이었는데
그는 카톨릭 신자였으며 황제의 직책역시 애초의 자신의 것이었던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686년 신년 연설에서 '성공회는 이단조직,카톨릭이 답'이라는 발언으로 황제 존 처칠과 사이가 좋지않았다

이에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걱정때문에 1686년 9월 그는 아일랜드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스튜어트-말버러 전쟁)

그러나 존 처칠은 사전에 제임스의 장녀 메리에게 모든 진상을 받았고 , 이미 북아일랜드에 군을 배치한상황이었다.

제임스군은 더블린에서 농성, 이에 존 처칠은 친히 2만을 이끌고 갔으며 1686년 12월 6일 더블린성이 함락돼었으며 제임스는 측근 10여명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후 존 처칠은 제임스의 장녀인 메리에게 여성 최초의회의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윌리엄에게 서민대표자를 임명했다

그후 1689년 7월 30일 존 처칠은 코크성을 함락시키면서 아일랜드 왕국을 완전히 병합했다. 1694년 메리가 천연두로 사후 의장직은 그녀의 여동생 앤이 뒤를 이었으며, 1702년 서민대표자 윌리엄 역시 사망하면서
앤에게 서민대표자를 위임한다

1719년 서민대표자 앤이 죽자, 존 처칠은 "이제부터 귀족들뿐만 아니라 서민역시도 정치에 참여가 필요하다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상원을 추밀원으로 명칭전환 추밀원의장에는 하노버 공국의 왕인 조지를 임명, 서민대표자의 명칭을 수석장관[1] 으로 바꾸었으며, 로버트 월폴 공작을 수석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비왕족 서민대표자가 탄생했다.

1719년 8월이후 존 처칠의 기력은 나날히 줄어들며 배가나오고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탈모르파티

결국 1720년 4월 31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1달간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에 로버트 월폴 수석장관은 살리카법안을 파기하고 장녀인 헨리에타 공주를 황제승계1순위로 지정해야한다라고 건의했고

결국 상하원과 추밀원에서 통과후 헨리에타 왕녀가 황태녀로 책봉 아버지 존 처칠 황제를 보좌하였다

1722년 6월 16일 윈저성에서 서거하시니 향년 72세이시며 재위 38년의 일이다. 후대 사람들은 존 2세라고 부르거나 존 대제라고 불렀다

헨리에타 여왕 시기

존 처칠 황제가 죽은후 장녀 헨리에타가 41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헨리에타 여왕이다

헨리에타 여왕은 1723년 신년사에서,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1725년 첫 하원의원선거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었다

1727년 서더크 백작의 땅을 구매를 하였으며, 1731년까지 그곳에 궁전을 지었고 그곳은 말버러 궁전이라고 불린다[2]

1731년 7월 자녀가 없던 헨리에타 여왕은 자신의 조카 찰스 스펜서를 황태자로 정하며, 1732년 1월 1일에 스펜서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1733년 6월 9일 버크셔 별궁에서 고열로 서거하시니, 향년 52세였으며 재위기간은 10년이었다.

찰스 2세 시기

찰스 스팬서는 이모 헨리에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취임한다. 그가 취임하면서 말버러 왕조의 직계는 단절된다.

1740년 1차 아이슬란드 정복전쟁을 시도하나 기상악화로 철수, 1742년 2차 아이슬란드 정복전쟁역시 실패한다. 1743년에 아일랜드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자 친히가서 진압한다.

1754년부터 1758년 7월까지 7년전쟁에서 프로이센과 함께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싸우다 총상후 본국이동, 1758년 10월 1일 말버러황궁에서 전쟁휴우증로 서거한다

재위기간은 26년이며 향년 52세였다

조지 1세 시기

1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했으나 아버지와 다르게 문화를 즐기는 황제였다. 어렸을때부터 손재주가 있어 건축을 즐겼으며, 12살때 독일에서 오페라연주회를 하였다. 음악에서도 뛰어난 면모가 있었다.

1773년 에든버러에 스코틀랜드 총리대리관저를 직접 건축하였으며(현제의 부트하우스), 1781년에는 현제 런던의 버킹엄공작의 대규모의 뽕나무숲을 구매한다

또한 1783년부터 1812년간 대영의 첫 대사전
조지 대사전을 만든다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때 웰링턴 백작을 기용하여 나폴레옹을 토벌하게 했으며,1810년 말버러황궁이 좁고 낡아서 버킹엄공작에게 구매한 토지에 궁전을 짓는다 궁전의 이름은 버킹엄공작의 이름을 붙여 버킹엄궁전이라 불리몇 1817년 1월에 완공한다.

1817년 2월 29일 버킹엄 궁전에서 노환으로 서거하시니, 재위기간은 59년이며 향년 78세였다.

조지 2세 시기

1817년 국왕에 오른 그는 할아버지와 같이 정복전쟁을 좋아하던 사람이며 2달에 한번은 가족을 대리고 사냥을 다녔다

조지 2세는 즉위하자마자 외고조할아버지 존 처칠의 처칠 성을 사용한다고 밝혔으며 스팬서 처칠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824년 할아버지 찰스 2세의 숙원사업인 아이슬란드를 점령하였다. 1835년에 무굴의 수도 델리를 점거한후 무굴제국의 외교권박탈과 군대해산 지시하였다

그는 제국주의자였으나, 한편으로는 철적한 신앙주의자였기때문에 그가 점령하는곳에 성공회를 믿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1840년 청나라의 영국 상인 습격사건이 발생, 청나라에 있는 영국인을 지키기위해 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840년 6월 6일 사냥터에서 낙마해 3일뒤 서거한다

재위기간 23년이며 향년 73세였다.

조지 3세 시기

아버지 조지 2세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이다

1843년 1차 영.청전쟁에서 승리후 난징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및 홍콩을 할양받았다.

1846년~1849년 스패인의 2차 카를로스 내전에 끼어들어 지브롤터를 획득하였다

1851년 8월 이집트를 침공 이집트를 함락시켰으며 케나다역시 점령한다

1857년 무굴제국을 멸망시켰으나 무굴제국 멸망시켰다

1857년 12월 7일 심정지로 인한 쇼크사로 버킹엄궁전에서 서거하시니, 재위기간은 17년이었으며 향년 64세였다

존 3세 시기

존은 즉위 3년인 1860년 제2차 영.중전쟁으로 승리하여 베이징조약 채결로 홍콩,선전,둥관 3곳을 할양받았으며 막대한 배상금 역시 받았다.

이때 중국,일본등의 엄청난 사람들이 자신 나라를 벗어나대영 본토로 이동했다. 이때문에 대영은 아시아인이 많은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동안 아프리카의 식민지가 독립돼었으며 아이슬란드 봉기와 인도 봉기역시 발생하였다.

1881년 차남 로버트가 낙마로 죽었으며, 1883년 7월 3일 장남이자 황위서열 1위 에드워드가 인도 봉기 진압중 전사하여 충격으로 쓰러졌으며 15일뒤 버킹엄궁전에서 쇼크사로 서거한다. 재위기간은 26년이며 향년 61세였다

왕위 공석기간

1883년 존 3세가 사망후 황위계승권은 원칙대로 3남인 랜돌프 스팬서 처칠에게 양도돼야 하지만 에드워드의 부인 사라 스팬서 처칠이 임신 3개월이었으며

존 3세의 황후인 심슨 스팬서 처칠은 "사라가 자식을 낳기전까지 황권은 본인이 가지고있겠다고 밝혔다"

1884년 2월 사라 스팬서 처칠은 아들인 에드워드 스팬서 처칠을 사산하여 황위는 랜돌프가 뒤를 잇는다

랜돌프 1세 시기

1884년 랜돌프 처칠은 즉위하자마자 경제개혁을 이루었으며 군제 개혁역시 발생한다

그러나 1884년 10월 아이슬란드 독립, 1889년 11월 무굴제국 독립, 1890년 남부아일랜드 봉기 등 악재가 터졌고, 1885년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겨우 점령한다.

1893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세워지는하지만 다시 되찾았다고.. 악재와 더불어 지브롤터까지 빼앗길뻔 하였으나 간신히 찾아온다.

1895년 군사 행진을 관람하던중 암살범의 총에 맞아 서거하신다. 재위기간은 11년이며 향년 45세이다.

현대

윈스턴 1세 시기

전설의 시작
1895년, 아버지의 빠른 서거로 19세에 황제가 된다.
그의 즉위기간은 시련의 연속이였다고 할 수 있었다.

1896년 무굴제국의 상실권을 잃었으며 1898년에는 남부아일랜드 공화국이 건립돼는 수모를 겪었으나
1901년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운동을 직접가서 토벌하였고 대만과 막대한 배상금을 얻었으며
1909년 일본제국이 조선을 침공하자 이를 저지 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아마미군도(난세이제도)를 획득하였으며

1911년에 대만과 난세이제도에 대영령 동아시아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총독에 원문석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916년 남부아일랜드 공화국이 대영의 북부아일랜드를 공격했지만 토벌 1년뒤 남부아일랜드를 침공해 남부아일랜드를 병합한다
이때부터 그는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교를 없엤으며 아일랜드 내에 카톨릭사원을 증축한다

1940년 나치의 히틀러는 윈스턴 1세에게 투항을 권고하자 그는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짐이 자네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전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라. 육지와 영국 본토 항공전, 그리고 바다를 가리지 않고, 신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는 극악무도의 폭정에 맞써 싸우겠다.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짐은 한 단어로 대답하겠노라. 그것은 승리이다. 승리,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승리, 어떠한 공포가 닥쳐올지라도; 승리,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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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1세의 유명한 전시 긴급 의회 연설

그후 총리직을 전시기간동안 패지하였으며 1945년 전쟁이 끝났을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겼다고 이긴것이 아닙니다 마치 제가 물고있는 시가가 다 꺼져도 불 조심을 해야합니다 이제 그 불조심할 재떨이같은 기구를 만들겠습니다

그의 탁월한 리더쉽은 2차 대전을 대영의 승리로 이끌어내게 되었다. 또한, 영연방(커먼웰스) 체제를 만들어 대영의 식민지들이 더욱더 단합되도록 하여 독립러쉬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이후 안정이 찾아오자, 그는 1959년 2월 3일
"이제 총리가 나라를 이끄는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와야 한다 나는 모든자리에서 내려와 그것을 보고싶다"면서 퇴임의사를 밝혔고
1959년 7월 1일 조카인 젤코바 처칠에게 양위의사를 밝히였으며
1960년 1월 1일 권력을 내려놓고 편안한 삶을 보냈다.

그리고 1980년 4월 1일, 향년 105세로 서거하신다.

그의 장례식 때, 유례없는 대규모의 군중이 버킹엄 궁전 앞 광장[3]에 모여 그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당시 200만 이상의 군중이 한번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 서거 소식을 전하던 지상파(BBC, VNN) 앵커들은 소식을 전하던 중 슬픔에 눈물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젤코바 1세 시기

윈스턴 1세를 이어 1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사실 첫 아시아계 출신이 그는 할아버지 하철구가 랜돌프 처칠 1세의 동생인 앤드류 처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그는 세계 평화와 화합을 강조하며 현재 재임중이다. 뛰어난 유머감각젤코바 부장님의 유우머 깔깔으로 사랑을 받고있다.

또한 이때 연호를 정했는데 연호의 명칭은 仁悳이라고 발표하였으며 모든공문서에 인덕이라고 작성하였다
또한 이때 윈스턴 1세의 연호역시 光海라고 발표 하였다[4]

각주

계속되는 뇌출혈 증상으로 추후 생명이 위독해질 때를 대비하여 현재 황태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1. 수석장관이란 명칭은 1886년 3차 글래드스턴내각에서 총리(Prime Minister)명칭으로 바뀐다
  2. 말보러 궁전은 1731년부터 1817년까지 86년간 대영연방제국의 궁전으로 있었으며 지금은 런던에서 가장 높은 더 샤드가 있다
  3. 런던광장이였다. 현재 명칭은 윈스턴 처칠 광장.
  4. 이때 2개의 연호를 발표한 사람이 現 수상인 원세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