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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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 영황제
武宗英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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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황제
재위 1926년 4월 25일 ~ 1970년 5월 1일
전임자 순종 효황제
별칭
휘(諱) 은(垠)
별호 명휘(明暉)
연호 덕치(德治)
묘호 무종(武宗)
시호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영황제(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英皇帝)
능호 영릉(英陵)
신상정보
출생일 1970년 5월 1일 (72세)
출생지 대한국 경성부 경운궁 숙옹재
사망일 1970년 5월 1일
사망지 대한국 경성부 창덕궁 낙선재
매장지 대한국 양주군 금곡동
왕조 이조(李朝)
가문 전주 이씨
부친 고종 태황제
모친 순헌황귀비 엄씨
배우자 현덕영황후 민씨
자녀 혜종 순황제
종교 유교(성리학)
군사 경력
복무 대한국 국군
복무기간 1926년 4월 25일 ~ 1970년 5월 1일
최종계급 대원수

무종 영황제(武宗 英皇帝, 1926년 4월 25일 ~ 1970년 5월 1일)는 한국의 제5대 황제이다. 재위 중 연호는 덕치(德治)를 사용하였다.

생애

탄생과 군왕 책봉

1897년 10월 20일에 경운궁 숙옹재에서 대한국 황제 고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8월 8일 호부상서 조병식이 군왕봉호망단자(郡王封號望單子)를 고종에게 올렸고, 궁내부 영사 서리 판사 윤정구는 황자의 정명단자(定名單子)를 상주하여 은(垠)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8월 17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이은을 원주왕(原州王)으로 책봉하며 금책과 금인, 칠장복을 하사하였다. 한편 생모 궁인 엄씨는 무종의 탄생 이후 1897년 10월 22일에 귀인, 1900년 8월 3일에 순빈(淳嬪) 1901년 10월 14일에 순비(淳妃), 1903년 12월 25일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1906년 12월 7일부터 황족과 귀족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치된 근대식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

결혼

1907년 3월 12일에 원주왕비에 대한 초간택이 이루어져 재간택 대상자로 7인이 뽑혔으며, 민영규의 손녀가 수망(首望)으로 뽑혔다. 재간택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여흥 민씨 일문의 위상을 고려하여 민영돈의 딸 민갑완이 군왕비로 선발되었다. 두 사람은 약혼을 거쳐 1909년 5월 7일에 혼례를 올렸다.

동궁 시절

1921년 병약했던 이복 형 순종에 의해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1920년 8월 18일에 장남 이진(李晉)이 태어났지만, 1922년 5월 7일에 병이 생겨 5월 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돌연 훙서하였다. 5월 17일에 이진의 유해를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永徽園) 옆에 장사지내고, 원호는 숭인원(崇仁園)으로 정하였다.

재위 시절

1926년 4월 26일을 기해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두자 한국의 제5대 황제로 등극하였다.
1927년 5월 24일에 무종과 현덕황후는 부산 항에서 광화호(光華號)에 승선하여 유럽 여행을 떠났다.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양을 건너 이집트에 들린 다음 7월 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영국의 조지 5세,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 교황 비오 11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을 차례로 예방하였다. 1928년 3월 3일에 모나코에서 배를 타고, 4월 9일에 한국 인천 항에 도착하였다.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요서 싸움에서 20만 군사를 잃은 채병덕을 어명으로 총살하였다. 오월 군대가 의주와 평양을 점령하고 남하해오자 부산으로 몽진하였다. 곧 이어 일본의 쇼와 천황과 만나 동맹을 체결하였다. 한·일 연합군이 오월군을 서쪽으로 몰아붙이고 포위하자 쇼와 천황과 함께 충칭에까지 나아가 장개석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삶을 세울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어 오월이 항복하자 무종 황제는 군신 관계의 요구, 군정 실시 통지, 비무장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칙을 내렸다.

내 너희들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니 너희는 나의 정삭(正朔)을 받들어 스스로 새로워져라. 너희가 다시는 패륜을 범하지 못하도록 당분간 우리 두 나라의 군정 아래에 놓을 것이니, 너희는 황제의 크나큰 애휼(愛恤)에 안기는 것이니 사사로운 정한으로 황제의 귀로를 소란케 하지 마라. 또 너희의 군대를 양성하고 병장기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며……

전후 오월의 전쟁범죄자의 재판 및 처벌을 위한 대동군사금오헌장을 1946년 1월 19일 일본 쇼와 천황과의 공동 조칙으로 발포하였다. 이에 따라 상해 전범 재판에서 오월의 침략 전쟁과 하카인(객가인) 학살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진행되어 오월 군부·국민당을 비롯한 주요 전범들이 심판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을 비롯한 일부 공산당 계열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이승만 묘당의 안내에 따라 대전을 거쳐 부산까지 피신하였다. 이후 반란군이 토벌되어 경성으로 복귀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경자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가 반공, 구악 일소, 경제 재건 등을 골자로 하는 봉사 6조를 올리자 읽은 즉시 물리쳐 불쾌함을 표시하였으며, 이후에도 수 차례 무신 정권에 비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정권을 찬탈하고 무단 통치를 하는 것에 대해 항거하였다.

최후

1963년 11월 22일에 고혈압에 의한 뇌일혈로 쓰러졌고, 이후 중태에 빠져 있었다. 1964년 2월에는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도 하였지만 다시 상태가 악화되기를 반복하였다. 1970년 5월 1일 새벽 3시에 전신경련을 일으킨 채 의식을 잃었고, 오전 7시 30분에 국군수도병원에서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져 오후 1시에 붕어하였다.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