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주요 종교 | ||||
기독교 |
이슬람 |
힌두교 |
불교 |
불교 佛敎 Buddhis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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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불교기 | 법륜 | |||
계통 | 인도-이란 계통 종교 └ 인도 계통 종교 | |||
유형 | 이신론(자연종교) | |||
창시 | 창시자 | 석가모니 | ||
창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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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 기원전 5세기경 | |||
지역 | 성도 | ㅡ | ||
주요
신앙 지역 |
전 세계 └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일대 | |||
규모 | 신도 | 약 5억 7천만 명 (세계 4위) | ||
경전 | 불경 |
개요
불교(한자:佛敎) (영어:Buddhism) (도그리어:बौद्ध धर्म)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고, 불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이다.
종교라는 한자어를 맨 처음 만들어낸 종교이기도 하다. 유교, 도교, 경교 등이 모두 부차적인 가르침이고 불교가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이란 뜻으로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 다른 종교들(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믿음을 제1의 가치로 두는 모습'을 종교의 기준으로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질적인 면모에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나, 둘 다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 즉 종교(宗敎)이니 딱히 틀린 번역은 아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다음으로 교세가 크며, 절대자로서의 신을 섬기지 않는 종교 중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석가모니 및 부처는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불교에서 믿는 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불교 교리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최종목표 해탈까지의 과정을 안내하는 일종의 선배나 멘토에 가까운 존재다.
핵심 교리
自歸依法歸依自燈明法燈明 (자귀의법귀의자등명법등명)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
대반열반경에 실린 석가여래의 마지막 설법 |
무아(無我)
'아트만'이 없다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an-atman 의 번역어로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이다. 없다를 의미하는 an- 이 무(無)로 번역되었고 atman은 我로 번역된 것이다.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 나', 즉 '영혼'을 의미하므로, 안아트만인 무아는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의어는 아트만, 진아(眞我)다. 불교의 가르침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4장에도 언급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
숫타니파타 4장의 15.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 sutta) |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는 내 몸을 항상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재산, 사회 등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대로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언젠가 상황이 변해, 보내 주어야 할 때가 오면, 붙잡지 않고 보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변(變)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내 것' 또한 변해가며, 변해가는 '내 것'에 괴로워한다. 삼법인에서 제행무상, 아함경의 '무상-고-무아' 등이 여기에 해당. 근본 불교에서도 무아와 연결하여 기본적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연기에 적용되어 여러 변화의 기본이 된다.
탐진치(貪瞋癡)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될 3가지 악덕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 역시 가장 오래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숫타니파타에서 그 원형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 동굴에서 떠나라.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한 것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동굴'에 비유하였다. 동굴 속 '익숙함'과 '편안함'에 취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 상황은 변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때까지의 익숙했던 상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황이 다시 좋게 바뀌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괴로움은 심해지나, 이때까지 했던 것들이 생각나서 동굴을 떠나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변해버려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 인생을 살든지' 하라는 것이다. 건강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재산,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사랑, 사회생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걱정도 동굴에 해당된다. 탐진치에서 말하는 "탐욕"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집착의 뜻과 같다. 집착은 한자로 '잡을 집', '붙을 착'. 즉, 딱 잡고 붙어 있다는 뜻. 따라서 동굴에서 떠나라는 말은 '집착을 버려라'는 말과 같다. 잡지 말고 놓아버리고 붙어 있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것. 도망칠까봐 개에 목줄 걸고는 죽을 때까지 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목줄을 풀고 개가 스스로 다가오는지 아닌지를 시도해 볼 것인가? 놓는다고 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거리를 둔다고 개가 도망을 칠거라곤 볼 순 없다. 도망치느냐 아니냐는 내가 개한테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개는 다 죽어가는데 개 목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삶 역시 '절대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며 붙잡고 있지만, 놓아버려야 비로소 '괴로움'에 변화가 시작된다. 괴로움이 심해지면 놓아야 될 때인 걸 알고 놓을 줄 알아야 되는데, 해온 게 아까워서 놓을 줄 모르는 것이 '집착'이다. 즉,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이 점점 변해서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랑 다른데도 불구하고 보내주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 내가 옳다고 남을 비난하지 마라. 내가 옳다고 여겨서 '나는 이렇게 한다'고 뽐내면서 가르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 여기서 옳음은 자기만의 옳음을 뜻한다. '자기만의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까지 하지마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논하는 것들이 많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면, 남에게 반드시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싸움이 일어난다. 탐진치에서 말하는 "성냄"의 원형이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옳다고 여겨,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일'이나 '실패 후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스스로와 싸우는 셈)
- 결점 없는 완벽한 순수를 찾지 마라. 보고 듣고 느껴지는 그 어떠한 진리나 가르침에도, 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점 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어서, 그 깨달음을 묻고 다니며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해서, 종교적 가르침이나 삶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따르거나 하진 말아야 한다. 설사 완벽하고 순수한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완벽한 순수를 구현해내기란 불가능하고, 삶을 더 괴롭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완벽한 순수를 찾았는데, 완벽을 추구하여 도리어 괴로워진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은 애초부터 괴로움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왜 괴로움이 없는 삶(진리)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탐진치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의 원형이다. 이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 최고를 생각하곤 비교하지 마라.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면, 최고가 아닌 다른 것을 볼 때는 '수준이 낮다'며 비교하게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어떠한 것에도 "최고"를 두지 말라는 것. '좋아하는 것'을 두게 되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지고, 여기에 매달리게 되어 집착이 되므로 괴로워진다. 이렇게 비교는 집착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탐진치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나, 숫타니파타에서는 언급된다. 원래 탐진치는 4개였는데 후대에 전해지면서 가르침도 미묘하게 변하고 그중 하나는 빠져버리게 된다.
차례대로, '가진 것'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결점(완벽)'에 대한 집착, '더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최근에 팔리삼장(니까야) 보다 더 오래된 원본이 발견된 『현겁경』에서 "마음에는 네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탐내는 마음과 음욕이고, 둘째는 성내고 미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아만심이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며 첫째, 둘째, 셋째는 탐진치에 해당된다. 또한 12연기 중 4취(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와도 비슷하다. 여기서 앞의 3가지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명상(冥想)
숫타니파타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며 사성제의 결론이다. 보통은 사성제의 결론은 팔정도로 생각하지만, 이는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결론일 뿐, 숫타니파타에서는 다르다. 숫타니파타에서 사성제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아보면, "지각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지각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마음' 마저 잊어버리라"고 한다. 즉, 명상을 말하는 것. 지각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에 대한 지각도 여의고, 지각에 대한 잘못된 지각도 여의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소멸된 것도 아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로 인해 지각된 물질적 형상이 소멸한 상태를 '적멸'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어떤 평범한 사건이 발생하면 연상작용을 통하여 이에 대한 생각을 확대 재생산한다. 근본 불교에서는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생각이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희론 (팔리어: papañca, 한자: 戲論)(Papañca)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언어학의 격 중에서 처격, 탈격, 소유격을 왜곡된 사유, 즉 희론의 산물이라고 풀이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무언가를 대격으로 경험한 후 그 지각된 바를 기억에 저장해서 사유화하는데, 이때 그 지각을 '나'처럼 여기는 단계에서 처격('지각의 가운데에서')이 나오고, 그 '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이를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생각이 덧붙는 단계에서 탈격('지각으로부터')이 나오며, 이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소유격('나의 지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희론이 인간의 언어 세계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그만큼 자아 관념을 비롯한 망상을 고도화시킨다고 본다. 종종 사람들은 희론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는 실제 입은 피해보다 사람들을 더 과도하게 걱정하고 괴로워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잡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희론을 경계하는 연습이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 5장에 따르면, 어떤 것을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두지 말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고 '매달리지' 마라.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감정의 흐름을 끊임없이 경계해서, 이윽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고 말한다.
다만 '호불호를 두지 않는 평정심'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러한 명상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며,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마음가짐은, 결국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허무해지고자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점마저 극복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삶이 괴롭다고 여겨질 때 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기에, '호불호'를 버리고 나면은, '호불호를 버리고자 하는 마음'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명색(名色)
'명색'은 팔리어로 nāma-rūpa. '정신과 형체'. 즉, 형체에 대한 정신적인 작용을 말한다. 한자로는 '형체에 이름짓다'는 뜻. 물질에 뜻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물체에 주의를 기울이다', '물체에 관심을 가지다' 정도로 해석된다.
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원시적인 연기 12연기의 원시적 형태. 투쟁과 논쟁(괴로움) - 좋아하는 대상(집착) - 욕망 - 쾌락과 불쾌 - 접촉 - 명색 순 이며, 12연기와는 다르게 6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와 사성제를 설명하는데 이 때 괴로움(부정적 감정)의 가장 근본 원인이 바로 명색(名色) 이다.
즉, 어떤 물질에 우리가 의미(또는 이름)를 부여하면 그 때부터 그것에 대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 행복에 의미를 부여하면 행복해지고,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괴로울 때, 스스로가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
우파니샤드에서 전래된 오래된 가르침 불교의 제사 배격, 아트만, 업보, 윤회와 해탈 등은 원래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나(아트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인간 내면의 근원 정신으로써, 여기에 육체를 더하면 불교의 오온에 해당한다.이 상좌부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 근본 불교에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므로써 나온 개념이 안-아트만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무아'이다. 무아를 강조한 근본 불교에는 '아트만'의 개념이 잠시 사라졌다가, 근본 불교의 뜻이 희석되자 상좌부 불교에서 다시 '오온'과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여기서 아트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아트만)의 특징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카르마)'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윤회, 업보, 신의 유무, 지옥과 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영원불변의 영혼(아트만)은 없다는 것.)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면 윤회나 업보를 믿을 필요가 없고, 아트만을 긍정하면 '무아(안-아트만)'의 깨달음은 헛된 것이 된다. 아트만을 부정하여 나온 개념이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이기 때문에 두 개념은 본디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의 개념'과 '불교의 안-아트만의 개념'은 서로 공존하게 되어 모순을 만들게 된다. 정작 붓다가 살아있을 적의 초기 불교에선 대놓고 정확히 이런 오해와 모순이 발생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무아' 개념은 영원불변한 자아(= 아트만)는 객관 세계에선 없다. 딱 거기서 멈추며 자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붓다는 경험론적이던 초기 불교답게 우리가 경험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래서 확인이 불가능한 오온 외의 자아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無記) 의외로 이쪽에선 모순이 발생하진 않는다. 업 개념 역시도 결정론의 우파니샤드&자이나교, 단멸론의 물질주의 학파들과는 다르게 업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라는 입장을 취해 환경, 상황, 결과, 동기등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사람들은 대부분 동일성 = 연속성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헷갈리는 단어 상의 문제까지 맞물려 이미 당대부터 신학자들까지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학사 - 데이비드 J.칼루파하나의 '불교철학 역사분석' 참고.
atman | an,ruby=없다.-atman,ruby=아트만 |
영혼, 나, 아트만 | 무아 (안아트만) |
상좌부 불교에서의 '나 우파니샤드에선 아트만, 상좌부에서는 오온에 해당한다.'는 어떻게 정의되고 응용되는지 살펴보면,
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蘊)"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와 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따라서 업보나 인과응보 등은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올바른 아트만'을 만드는 일은 상좌부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 이지만, 이는 '무아(안아트만)'해라는 근본 불교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 된다.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와 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 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올바름을 쌓아라'는 개념은 근본불교에는 없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은 법구경의 내용이나 부처님 오도경을 들고나와 근본 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얘기이다. 법구경은 '올바름을 쌓아야 된다'는 개념과 승단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 영향하에 있는 저술이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도 숫타니파타 4,5장보다 훨씬 늦게 지어졌다.) 이는 근본 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셈. 숫타니파타 4,5장은 근본 불교, 숫타니파타 1,2,3장은 상좌부 불교에 해당되며, 이후 저술된 아함경과 법구경 등도 상좌부 불교의 영향하에 있다. 숫타니파타 4,5장에는 '윤회' 개념이 없다. 정리하자면, 근본 불교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1대1로 반영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괴로움(탐욕, 싸움, 어리석음)을 유발한다고 보았고 사회와 가정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반면, 상좌부 불교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 받은 장로들이 모여서 승단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올바른 것들을 쌓아' 계와 율을 지켜야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행위(카르마)'를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근본 불교의 명색(名色)보다는 무명(無明: 올바른 행위를 알지 못하는 것. 무명도 우파니샤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과 행(行: 행동, 행위)을 중요시 여기게 되고, 이에 따라 근본 불교의 원시연기(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나오는 원시적 형태의 연기. 명색이 근본 원인으로 나오며, 여기서 무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상좌부 불교의 12연기로 변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과거의 우파니샤드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모순되는 두 개념,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나)은 상좌부 불교 하에서 공존하게 된다.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나 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오해이고 사실 단견 윤회하지 않음과 상견 영혼과 같은 실체가 항상함을 부정하며 연기의 원리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하고 있고 그 윤회가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는 한, 이러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정의와 논리학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윤회 개념은 아트만의 개념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아트만을 인정해야 하나,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과 서로 논리학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
연기(緣起)
결과에 따른 원인.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잇따라 추측해보는 과정. 따라서 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모든 승려들의 연구처이기도 하다. 공(空)개념도 여기에서 나왔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되는 4장과 5장인 원시 숫타니파타에서의 연기는 명색 - 접촉 - 쾌불쾌 - 욕망 - 좋아하는 대상(집착) - 투쟁과 논쟁 순이며, 근본 원인은 명색에 있다. 명색은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며, 물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싸움과 슬픔이 생기고, 자만하거나 남을 헐뜯게 되어 괴로움에 빠진다.
반면, 상좌부 불교의 12연기 숫타니파타 3장에 나오는 12연기를 말함. 이는 원시 숫타니파타의 연기(4~5장에 나옴)와 시대가 다르다. 자세한 것은 숫타니파타 참조.에서는 그 근본 원인이 '무명과 행'이 된다. 어리석은 생각(무명)과 행동(행)으로 인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쌓지 못하게 되므로 괴로워진다.
공(空)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 원인과 결과.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인과에서 벗어나는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과 개념은 다른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에 의해서 의존적'이므로 상의상대,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 즉, "양극단은 공존한다"라는 것이 '공(空)'이다. 여기서 '공'은 양극단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양극단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되, 양극단은 공존하므로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해보자"라는 것이다. (나누어서 봐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보자는 것) 여기서 '하나'로 보는 것을, 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범주로 볼 때에 두 개의 범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기준으로 볼 때에는 범주를 두 개로 나눈 그 하나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 이 기준을 없애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뜻에서의 '공'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개념은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하여 정리할 수 있으며, 이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된 언어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믿어왔지만,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공사상'에서 말하는 주요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상대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사상과 상대주의는 다르며,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주의는 공사상의 일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까 어떤 것에도 특정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가 상대주의라고 본다면, 불교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모든 것에 각각의 특정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상대주의가 '색즉시공' 만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과 함께 '공즉시색'까지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보자'는 것은, 개념을 '구별'하는 '기준'을 없애서 이해보자는 것이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자'는 '하나가 되자'랑 다른 것이며, '하나가 되자'는 것은 또다른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공(空)은, 모든 가치적 판단이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모든 게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다 될 수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가치적 판단이나 개념이든 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말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봐야 된다는 것.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것은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Śūnyatā)'라고 하며 "부풀어 속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주스를 담을 수 있으며, 우유를 담을 수 있고,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비어 있다고 '이 그릇은 의미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것의 의미는 확정할 수 없어 비어 있다는 것까지가 공(空)이고, 그러한 빈 부분에 어떤 것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아닌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공과 유식을 다 말한 것이다.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삶이 괴로울 때 '혹시 내 생각이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다른 생각을 살펴보는 데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이 너무나 괴로울 때,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여러가지 대안들을 살펴보자는 취지이며, 따라서 '포기'나 '체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된다.
'반야'도 '공(空)'과 비슷한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나누어 보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
유식(唯識)
오직 생각의 문제라는 것.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눈, 코, 귀, 입, 피부 등을 통해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들은 왜곡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길가던 나그네가 순간 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무서웠는데, 다시 보니 노끈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무서운 감정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들의 대부분은 왜곡되고 확대-재생산되어 우리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왜곡된 정보로 인해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이다.
이렇게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였다.
이타심
이타심은, '나'와 '남'이라는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로 의존하므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오게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개념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다시 자비(慈悲)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타심을 강조하는 것은 상좌부불교와는 차별되는 대승불교의 특징인데, 물론 상좌부불교 내에서도 이타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승불교는 유독 이 이타심을 상좌부불교와는 다른 차별점이라고 특정지었다. 비교하자면, 상좌부불교에서는 '개인'의 올바른 수행을 강조하는 팔정도가 주된 가르침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수행을 하자는 '자비'가 주된 가르침이 된다. 한때 이런 관점에서 상좌부불교를 '소승 불교'라고도 불렀지만, 이는 대승과 비교하여 비하적 단어로 여겨져서 최근에는 쓰여지고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상좌부 불교 참조.
이러한 이타심의 수행 방법은 대체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순간, '남의 반응'에 맞춰서 대응하는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게 하는 '분별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자면, 남이 나를 싫어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싫어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것은 '너는 너, 나는 나'를 더 명확하게 구분 짓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서로 다른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앞서 말했던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강조한다. '남'과 '나'를 구분 짓는 마음은 '나'라는 존재를 더 부각시켜서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나'는 괴로움에 빠진다. 따라서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자 한다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무아(無我)를 하고 싶다면 이타(利他)를 해야된다"는 것.
이러한 점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바라밀'과 '사무량심'에서도 나타난다. 바라밀에서는, '남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보시'와 '남의 모욕적인 반응에도 평정심을 가지는 인욕'을 통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이타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바라밀의 나머지 부분인, 지계(持戒)·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는 '개인의 깨달음'이나 '계율'을 강조한 팔정도와 비슷하다. 대승불교에서 유독 '보시'와 '인욕'을 강조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또한 '4가지 측정할 수 없이 큰 마음가짐'을 뜻하는 사무량심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가지 수행법이 있다. 자(慈)는 친절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고, 비(悲)는 상대방의 불행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을 뜻하며, 희(喜)는 상대방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고 불경에서는 자비희사 중 가장 수행하기 힘든 것이 '희(喜)'라고 말하였다., 사(捨)는 상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하거나 이러한 나를 남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해도 평정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상대의 아픔에 같이 슬퍼하고, 상대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며, 내가 준 마음을 남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정심을 가지는, '공감'의 이타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비'로운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해 '나'의 괴로움을 잊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의 괴로움마저 돌보아, 이 공통의 괴로움을 아우르고 거기서 평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에서 발전하여 세상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 사상이 생겨났다.
상징과 신(神)
사람은 언젠가는 잊어버린다. 오랜 수련으로 '깨달은 바'를 항상 염두에 둘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순간 잊어버리는 것"까지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모욕을 당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 못할 때가 있다. 또는 생활에 바빠서 '깨달음'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도 있다. 또는 '깨달음'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이렇게 사는 게 바빠 순간순간 깨달음을 잊어버리고 괴로움과 무기력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면, 상징을 통해 계속해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진언 범문을 번역하지 아니하고 음(音) 그대로 외는 일), 손가락 동작으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수인 불교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손가락 동작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를 말한다.), 반야심경 등을 노래로 만들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눈에 띄는 곳에 불상을 두어 볼 때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것 등이 있다.
진언이나 수인, 노래나 문양 등의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신의 존재도, 절대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교훈이나 깨달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종의 "상징"의 역할을 한다.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의미는 희박한데, 이는 불교가 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 나오는 신과 보살들은 교훈이나 깨달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선배'나 '멘토'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결단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는 마음의 평온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건 생각(또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번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고, 하고 싶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그 대상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거듭 떠올리는 데서 집착이 만들어지므로, 이러한 '생각의 반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결단'인 셈.
따라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반복된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는 '틀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 '삶의 관점을 항상 새롭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창조하는 피곤한 일을 매일 해야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제를 매일 버리면 오늘을 항상 새롭게 살 수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라는 것은 바로 어제를 버릴 때, 오늘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굳이 창조를 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이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다. 더럽고 엉망진창인 진흙탕에서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이, 괴로움의 삶, 그 한가운데서도 저절로 그 꽃을 피워내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매번 망각하는 것에 자신이 없거나, 창조하기 힘들다는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바꿔나간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배우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면 그 행동으로 자신만의 삶을 풀어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깨달음이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것은 아니며 실제로 행동하고 실천하기 쉽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즉, '배우겠다'는 액션의 중요성을 깨달으라는 것. 이것이 창작의 기본이고 망각의 출발이며 행동의 시작이고 실천의 근거가 된다. 오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덧붙여 말하자면, '망각'이나 '창조'나 '배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집중하게 만드는 핵심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도구가 '망각', '창조', '배움'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며 '결단'을 촉구했으며, 선종에서는 돈오(頓悟)가 '결단'에 해당되어 이 이론으로 선종이 교종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간화선에서 강조하는 것이,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도록 결단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묵조선은 결단보다 명상에 가깝다. 선종은 이렇게 '명상'과 '결단'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상은 모든 생각을 없애는 것이고, 결단은 모든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명상은 '공(空)'에 해당하고, 결단은 유식에 해당한다.
현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이 공(空)이고, 하나에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唯識)이다. 참고로 색즉시공은 공을 말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유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엽적이고 의미 없는 것에 목숨 걸어가며 산다는 깨달음은 공(空)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는 깨달음은 유식(唯識)을 말하는 것이다. 공으로 집착을 버리고, 유식으로 희망을 찾는 것은 하나의 일관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원효는 공과 유식을 하나로 보아 일심(一心)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세상을 등져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면서까지 일반 백성들과 함께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얼마나 현실을 중요시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눌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수련을 합쳐서, 배워서 깨닫고 그것을 수련한다는 정혜쌍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수련한다는 뜻.를 주장하였는데, 앞의 원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큰 통일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깨달음(이론)과 수행(참선)을 하나로 합치려는 정혜쌍수 역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중국의 교종과도 다르고 중국의 선불교 선불교의 화두 특성상, 하나의 틀에 넣어지지 않아서, 수백가지의 종파로 나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데, 때문에 도교와 합쳐져서 변질되어 버리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불교는 수백가지의 종파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이라 볼 수 있겠다. 당시 중국의 불교는 수십 개의 다른 이론을 가지고, 서로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며 이론에 따라 여러 종파를 세웠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종파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교종이든 선종이든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불교로 가는 길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한국불교의 주류가 그렇다는 것) ("중국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수많은 각론을 만들고, 한국은 중국의 각론을 받아들여서 종합하여 결론을 내며, 일본은 한국의 결론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 나간다"고 이야기된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지눌의 영향 아래서 이렇게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었고, 현실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유교의 영향도 컸었기 때문에, '속세'마저도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하나로 보아, 현실의 삶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리하였다. 승려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나이고, 현실에서 벗어난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는 현실과 하나의 세상이다.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정작 지금 이 말 자체는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관념」에서 다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근본 불교가 비슷하긴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근본 불교는 언어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생각마저 벗어나라며, 언어자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금 관념에 대한 말은 관념을 벗어난 뒤에도 '관념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관념에 집착하게 되므로 현실로 돌아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언어를 버리느냐, 불교를 버리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버린 뒤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치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를 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것은 공(空)이고,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라는 것은 유식(唯識)의 입장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저 둘은 단지 탈속의 세상이고 거기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또 다른 관념이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만 그 깨달음이 '끝'이 나므로,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기 위해 살아야 한다(현실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는 의미에서, 옛 고승의 말을 빌려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강조한 것이다.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말했던 것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삶 자체가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는데, 수행해서 과거의 습관을 없앤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습관에게 굴복하면서도 다시 습관에 지지않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이, 삶인 것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집착인데,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수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괴로움이란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깨끗한 경지가 절에 들어갈 때만 생긴다면, 절에서 나오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괴로움 속에서도 그 괴로운 감정에 최대한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한 괴로운 감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종합
근본 불교에서는 무아, 명색을 강조하여 '내 것'이나 물질에 의미 부여하는 언어적 활동 자체가 괴로움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언어마저 잊어버린 경지, 즉 희론(Papañca≒망상)을 없애는 명상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였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자아(오온)'는 나의 행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선한(올바른) 행위들을 쌓아가면 선한(올바른) 자아가 만들어지고, 악한 행위들을 쌓아가면 악한 자아가 만들어지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른 행위 행위에는 생각, 일 등도 포함된다. 즉, 올바른 무엇인가를 하는 것. 팔정도를 의미한다.를 통해 '올바른 자아'를 만들어야 됨을 강조하였다. 즉 '언어적 잊힘'보다 '행위'를 강조한 것. 부처님 사후, 제자들은 무리를 이끌고 승단을 만들어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승단이라는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나가르주나)는 상좌부 불교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근본 불교는 '내 것이 없음(무아)'를 강조하는데 상좌부 불교는 반대로 '좋은 나를 만들기(오온, 카르마)'를 강조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각하는 개념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공'이다. 사실 그전 초기불교 때부터 '공'개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상좌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였다. 하지만 용수(나가르주나)가 중론을 써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통해 '공'을 설명하자 비로소 그 개념이 구체화되고 각 불교 종파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공'이라는 것은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단은 공존하기에 하나로 봐야 된다'는 것. 또한 모든 가치적 판단은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공개념은 나와 남을 하나로 보아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온다'는 자리이타와 자비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이를 통해 '남을 도움으로써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질서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유식학파에서는 용수의 공사상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 데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수만 가지로 다양한데, 용수의 말처럼 모든 개념이 하나로 귀결된다면 이러한 현실의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또한 세상의 다양한 물질들은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를 통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등으로 분별되어 각각 다른 물질들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러한 정보는 쉽게 왜곡, 확대 재생산되어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에 벗어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행'이라는 정보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괴로워지기도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괴로움이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은, 역으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좋게 가공된 정보'를 통해 괴로움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상의 신이나 상징을 믿어 의지하는 것도 괴로움을 잊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밀교에서는 여러 신들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진언(주문)이나 수인(손동작) 등의 상징마저도 괴로움을 잊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방법(무아),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명색), 삶은 쌓아가는 것이며 결과는 나중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옳음을 꾸준히 행하는 방법(오온 또는 카르마), 양극단이 공존하는 것을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하나로 합쳐 보아 삶을 이해하는 방법(공), 내가 받아들인 정보는 왜곡됨을 알아내 생각을 왜곡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 하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유식), 의도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이용하여 마음의 평안을 유도하는 방법(신이나 상징을 믿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종합하자면... 불교가 말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 욕심과 문제의 대상이 언제까지나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 닥쳐온 불행에 '의미를 부여'해서 거듭 괴로워하게끔 하지 않으며
-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서, 비교의 씨앗을 만들지 않고
- 양극단을 하나로 합쳐 보아 '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남'과 공존하기 때문에, '나'는 '남'과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남을 돕는 이유이다. '공'개념 참조 삶을 너그럽게 이해하며
- '삶은 선한 것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임을 알아, 문제를 부정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면
- 천천히 사회는 변화하고 개인은 쌓아온 것들을 자신의 '선한 성격'으로 돌려받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분파
현대 불교의 종파 | ||
부파 불교 | 상좌부 불교 | |
대승 불교 | 교종 | 선종 | 정토교 | |
밀교 | 티베트 불교 |
현재의 불교는 크게 대승 불교(마하야나)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티베트 불교로 구분된다. 자기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남에게 얹혀서 살려는 사람이 중생이고, '남의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며,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를 살아라'는 것이 본디 불교의 가르침인데, 여기서 '바른 말과 행동들을 쌓아서 올바른 삶을 살자'는 것이 상좌부(테라와다)이며, 여기서 '남을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며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 대승이다. 사람들은 '좋아하던 것'이 다르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에서 벗어나서 보고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 호불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보통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에 의미를 두며,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를 괴롭힌다.
대승 불교는 한자문화권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도 흥했으나 현재는 소멸하였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를 비롯한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와 몽골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 반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밀교가 강하긴 하지만.
이외에도 불교는 북미나 유럽에 전해져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분포한다. 그 중 티베트 불교가 북미/유럽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일본식 선불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불교 종파이기도 하다. 게다가 티베트를 탄압하는 중국조차도 화북지역 한족이 티베트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도 세가 상당히 크며,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일반 중국인들 장위안도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도 상당히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자체에 대한 탄압은 받지 않는다. 물론 티베트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국가분열죄로 다스린다. 북미/유럽의 유명인 중에 티베트 불교 신자가 의외로 많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등. 티베트 불교 이외에는 일본 선불교가 있다. 일본 선불교 신자로 대표적인 이는 스티브 잡스.
대승 불교(Mahayana)가 발전되었을 시기에는 대승 불경을 읽지 않는 부파 불교를 대승 측에서는 소승 불교(Hinayana)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관점에서 붙인 비하적 명칭이라는 성격 때문에 1950년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선 소승 불교라는 표현은 어떠한 불교 종파에 대해서도 써선 안된다고 결정하였다.
- 근본 불교 여러 부파로 갈라지기 전까지의 불교로 근본 불교, 원시 불교라고도 한다. 다만 원시라는 표현이 단어의 원래 뜻과 달리 '미개한', '발전이 덜 된'이라는 늬앙스를 주기 때문에 보통 근본 불교라는 표현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