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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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종 문황제
翼宗 文皇帝
익종 어진.jpg
이화문(오얏꽃 문장)
이화문(오얏꽃 문장)
조선국 국왕
재위 1834년 3월 14일 ~ 1842년 9월 28일
전임자 순조
후임자 (칭제)
대한국 황제
재위 1842년 9월 28일 ~ 1860년 1월 25일
전임자 (본인)
후임자 헌종 성황제
별칭
휘(諱) 이영(李旲)
연호 원풍(元豊), 경덕(景德)
묘호 익종
시호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

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
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문황제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
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
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文皇帝)

능호 수릉(綏陵)
신상정보
출생일 1809년 9월 18일(1809-09-18)
출생지 틀:나라자료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일 1860년 1월 25일 (50세)
사망지 대한국(단국흥기) 경성부 창덕궁 대조전
매장지 대한국 양주군 인창동 수릉
왕조 이씨 왕조
가문 전주 이씨
부친 순조 숙황제
모친 순원숙황후 김씨
배우자 신정익황후 조씨
자녀 아들 헌종 성황제
종교 유교(성리학)

익종 문황제(翼宗 文皇帝, 1809년 9월 18일 ~ 1860년 1월 25일) 또는 간단하게 익종 황제, 익종대한국의 초대 황제이자 조선의 제24대 마지막 왕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호는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정식 시호는 익종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문황제[1]로, 이조의 역대 임금 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연호는 원풍, 경덕이다. 장동 김씨를 실각시키고 개화파 신진 사류를 거용하여 세도 정권을 타파하였다. 세도 정치의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를 혁파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황권을 강화하여 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857년(경덕 15년)에는 <대한국 홍범>을 제정하여 근대적 입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묘호를 따 익종경장이라 부르며 한국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42(경덕 원년)년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2]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익종 시대와 함께 경덕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익종 대제(翼宗 大帝), 익종 성제(翼宗 聖帝), 경덕 대제(景德 大帝) 등으로도 부른다.

약력

생애 초반

익종은 1809년(순조 9)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 7월 태자로 책봉되었다. 1817년 3월 문묘에 입학례를 올린 뒤 성균관에 입학했고 18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를 치루고 그해 음력 10월 풍양 조씨(후일의 신정황후)와 가례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 2월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군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처가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 특히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 계열 인사까지 등용했다. 1828년에는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따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다. 사대부들의 학구열을 궁 안에 도입하는 한 편, 아버지인 순조가 존호를 받는 행사를 치를 목적이었다.

1829년에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양수와 소식의 글을 가려 뽑아 사문조영(文史咀英)의 편찬, 간행을 명하고 정리자(整理字) 활자로 간행하였다.

즉위 초의 혼란

익종이 즉위할 무렵 나라 안팎의 정세는 혼란하였다. 세도가인 장동 김씨가 비변사 등 나라의 중심 기능을 장악하여 군권(君權)이 추락하고 일부 권신들이 국정을 전횡하였다. 세도 정권이 매관매직을 일삼아 관가(官家)의 기강이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직에 오른 자는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수탈했다. 또한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부조리로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가는 가운데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즉위로부터 2년 전인 1832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인 로드 암허스트호가 서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듬해 1월 7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영국 함대가 무력 시위를 벌이자 장동 김씨 세력이 응하여 조·영화친조약을 맺고 개항하였다. 개항으로 인해 공론이 분열되었다. 또한, 물가가 크게 오르고 외국의 값싼 물건이 들어와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면서 민중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한편 장동 김씨 정권은 부산진에 위치한 개항장을 관리하고 교역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순도서(巡渡署)를 설치하고 이를 장악하였다. 그렇게 하여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세도 정권이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1835년에는 영국 총영사 돕스의 요구에 따라 세도 정권이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어 부산 이외에 원산, 인천을 포함하는 3개 항구를 개방하였다. 하지만 이는 임금의 허가를 얻지 않고 진행된 일이었다.

정권이 통상 조약에 조인한 것에 대해, 임금의 의향을 무시하고 외국에 굴복했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또한 장동 김씨 정권의 이익 독점 행위가 계기가 되어 유생들의 분노는 폭발적으로 커져갔다. 이것은 임금을 받드는 존왕(尊王)과 외국을 배척해야 한다는 양이(攘夷)의 요구가 연결된 존왕양이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익종경장과 한국의 근대화

익종 황제는 1842년 새로 환구단을 건설한 뒤 칭제하여 대한제국의 수립을 공포하였다. 이때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고쳤다. 이어 한성부(漢城府)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고 황도(皇都)로 삼았다.

익종은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워 인민들을 통합해 나갔다. 종래의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귀족과 양인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직업선택, 결혼, 주거,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나아가 1852년(경덕 10)에는 면천령(免賤令)을 내려 천민들도 양인이 되어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하였다.

1857년(경덕 15)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홍범>을 제정하였다. 또한 도(道)를 폐지하고 전국을 40여 개의 군(郡)으로 구분했다. 그간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영주 지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할령으로 하였다. 유구를 일본과 분할하여 남유구에 유구 군을 설치하였다. 대만 섬까지 통치권에 편입하였다.

내정 개혁

익종은 내정을 개혁하여 쌓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먼저 세도 정치의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를 혁파하여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황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세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전정의 개정을 이루어 경작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고 전답 매매를 허용하였다. 나아가 전국의 지가를 정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권을 교부하였다. 또한 군적수포제를 폐지하고 신분에 관계 없는 징병령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상비군을 양성하였다. 문란해진 환곡제 대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학제(學制)를 발포하여 취학을 의무로 규정하는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 되고 옛날부터 있었던 서당의 대부분이 초등학교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불과 수년 사이에 3만 1천여 개의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취학률은 처음에는 50% 이하였지만, 그후 급격히 증가하여 익종시대 말기에는 거의 100%에 달하게 되었다.

개화 추진

익종은 유럽과 미국에 견양사(遣洋使)를 비롯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문물을 습득하게 하였다. 견양사는 유학생을 포함해서 전체 11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이후 근대화의 기수 역할을 하였다. 경장 이후에도 서양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진행되었다. 익종은 한국을 서양 나라들에게 지배 받지 않는 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제창하며 국가 건설에 힘썼다.

익종은 관영 조선소와 광산을 세우고, 교통과 통신의 분야에서는 1849년에 전신제도, 1851년에 우편제도를 시행하고, 나아가 다음해인 1852년에는 경성과 제물포를 잇는 철도를 개통시켰다. 또한 젊은 나이에 수상이 된 박규수를 후원하여 정부의 강력한 지도와 정부자금의 투입에 의해 근대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1853년에는 태양력을 채용하고 기독교를 인정하는 절목을 발표하였다.

대국굴기와 황권 강화

익종은 영주를 실질적인 영토로 삼고, 유구를 흡수하고, 대만을 통치권에 편입하였다. 만주국을 한·만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개항시켜 이후 보호국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맹혁의 난, 신해만요, 오르타이의 난의 연이은 한국군의 승리는 황제에 대한 국민적 숭앙(崇仰)과 존경심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였다.

붕어

익종 황제는 1860년(경덕 18년) 1월 25일 아침 7시경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52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하였다. 양주군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綏陵)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 부황 : 제23대 추존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 모후 : 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1789~1857)
  • 황후 : 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1808~1890)
    • 장남 : 제24대·제2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1871)
    • 차남(양자) : 제25대·제3대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1852년~1919년)
  • 후궁 : 귀인 이씨(貴人 李氏, 1824~1841)

저서

  • 《경헌집 (敬軒集)》 12권, 시집 모음
  • 《담여헌시집 (淡如軒詩集)》, 시집 모음
  • 《경헌시초》
  • 《학석집》 6권, 문집

성격과 영향

  • 익종은 근대 격변기의 황제로, 폐정 개혁과 한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젊은 나이에 즉위한 뒤 양남만인소익종경장, 대한제국 수립, 약조변무, 만주 진출 등 격동의 시대에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 인민의 외경을 받았다.
  •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춤을 출 장소인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이만큼 음악에 관심을 보인 임금은 세종과 세조 이후 유일하다. 한국에서 예악(禮樂) 곧 예의와 음악은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으며 정치의 기반을 다지려던 임금들은 예의 또는 음악에 관심을 쏟았다. 근세 전기의 세종과 세조 또한 그러하며 익종 또한 그렇다고 여겨진다.

익종이 등장한 작품

  • 《구르미 그린 달빛》 윤이수 지음, 글공방, 2014, 네이버 웹소설 완결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원작)
  • 《구르미 그린 달빛》 KBS2, 2016년 배우: 박보검(아역: 정윤석)
  • 《닥터 진》 MBC, 2012년 배우: 김병세
  • 영화 《명당》 2018년 배우: 김민재

각주

  1. 翼宗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文皇帝
  2. 한국의 연호는 황제가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