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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 |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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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0일, 아버지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훙서하며 조선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인종은 부친의 상을 치루고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 운영부의 실수로 마인크래프트 서버가 날라가며 컨텐츠 기반이 붕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 | 2월 10일, 아버지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훙서하며 '''조선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인종은 부친의 상을 치루고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 운영부의 실수로 마인크래프트 서버가 날라가며 '''컨텐츠 기반이 붕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2월 23일에 부인 [[정안왕후]]의 정신질환이 심해질대로 심해지며 [[정안왕후]]가 '''궁인들을 폭행하고 환각'''을 보는 일 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왕대비던 [[신덕왕후]]의 조언으로 인종은 [[정안왕후]]를 교태전에 유폐시켰다. 결국 [[정안왕후]]는 유폐된 교태전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훙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정안왕후]]의 훙서를 기뻐한 듯하다. 왕후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여 왕실에 있어서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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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2월 12일, 아버지 이하응이 갑작스러운 의문사로 사망한다. 태조는 아버지 이하응을 [[환종]]으로 추존하였다. 세자빈 [[현빈 심씨]]의 사망 이후 내명부가 비어있자 당시 왕대비던 [[의혜왕후]]가 간택을 통하여 안동 김씨의 [[신의왕후]]와 나주 임씨의 [[신덕왕후]]를 각각 왕후와 종1품 귀인에 책봉하였다. 왕후 김씨, 귀인 임씨가 태조와 나이차이가 30~40살이 났기 때문에 '''웃음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 | 상이 다 치루어지지도 않은 바로 다음날인 24일, 숙원 품계를 달고 있던 승은후궁 [[현덕왕후]]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얼마안가 3월 10일, 오후 10시에 강녕전에서 향년 72세로 훙서하였다. 이틀간 국상이 진행되었으며 묘호는 자비와 너그러움을 베푼 군주라는 의미로 '''인종(仁宗)'''으로 정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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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2월 17일, 광주 이씨의 [[휘빈 이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며 태조는 며느리가 생겼다. 태조의 재위기간은 종교 탄압이 말할 수 없을정도로 매우 많았다. 12월 18일 가톨릭 신자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당하거나 탄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덕흥 박해'''라고 한다. 19일 [[태조]]와 [[신의왕후]]의 혼례가 예정되어있었으나 [[신의왕후]]가 고뿔에 걸려 혼례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태조는 [[신의왕후]]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당시 귀인이던 [[신덕왕후]]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폐위된 [[신의왕후]]는 당일 향년 20세로 사저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훗날 손주라 볼수 있는 [[대조선국 성종|성종]]때가 되서야 왕후로 복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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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0일, 아버지 [[환종]]에 이어서 왕대비던 어머니 [[의혜왕후]]가 훙서하였다. 태조는 의혜왕후라는 시호를 어머니에게 내렸다. 27일 [[신덕왕후]]가 세자빈 [[휘빈 이씨]]를 까다가 걸려 '''태조는 [[신덕왕후]]를 교태전에 유폐'''시켰다. 하지만 유폐 이후 태어난 세손 [[대조선국 성종|성종]]과 세자빈 [[휘빈 이씨]]가 품위가 떨어지며 날이 갈수록 언행이 심해지자 태조는 [[신덕왕후]]의 유폐를 해제해주고 많은 영향력을 실어주었다. 이후 [[태조]]와 [[신덕왕후]]는 세자빈 [[휘빈 이씨]]와 사이가 '''안좋아질대로 안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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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5일, 결국 세자빈 [[휘빈 이씨]]가 자진해서 폐위를 요청하여 태조는 [[휘빈 이씨]]를 세자빈에서 폐위시켰다. 이후 폐빈 이씨라 불리던 그는 폐위된 당일 사저에서 사망하였으며 훗날 자신의 아들인 [[대조선국 성종|성종]]때가 되서야 세자빈으로 복권되었다. 1월 7일 새며느리로 문경 서씨의 [[정안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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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3일, 조정의 요청으로 태조는 혜민원을 '''폐지'''하였다. 당시 혜민원은 조선의 의료시스템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여러 문제가 나오자 결국 폐지시켰으며 국가의 의료시스템을 민간 상점들에게 맡기었다. 이건 훗날 조선의 의료시스템과 복지시스템이 더 효율적이고 더 편리하게 바뀌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날 [[휘빈 이씨]]의 소생이던 원손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태조는 여러 시험을 거쳐 조선의 왕세손으로 책봉한다. 실록에 따르면 세손 책봉식 이후 여러 연회가 열렸으며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1월 16일에는 손자며느리로 한양 토씨의 [[원경왕후]]를 보았다. 1월 22일, 태조는 재위 50일 금경축일을 맞이하였다. 조선과 텍사스의 전쟁이 막 진행되던 시기 2월 1일부터 2월 5일까지 세자 [[대조선국 인종|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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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문| '''주상전하께서 오후 11시 42분에 景福宮 강녕전(康寧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향년(享年) 86세이시며 사인은 노환(老患)이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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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0일 태조와 [[신덕왕후]]가 금혼식을 맞이하였는데 몇시간도 지난 오후 11시 42분에 강녕전에서 향년 86세로 훙서하였다. 약 일주일간 국상이 진행되었으며 묘호는 창업군주라는 의미로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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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 |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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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 | ==[[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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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구열 : 공부나 학업에는 관심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 | ・학구열 : 공부나 학업에는 관심이 아주 적었다고 하였으나, '''천문학과 우주사는 아주 총명'''하였다고 한다. 세자던 시절 경복궁 후원에 천문학과 관련된 여러 기계를 설치하고 직접 관측하기도 하였으며 밤을 새서 별의 이동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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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품 : 강인하고 단호하며 냉정한 성격이였으며,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타입이였다. | | ・성품 : 감정적일때도 있고 이성적일때도 있으며, 늘 백성들의 수준에 맞출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많은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재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채 인종이 훙서하자 많은 백성이 슬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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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적 : 조선의 초기 시스템을 모두 구성하였으며, 체계적인 정치시스템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 | ・치적 : 재위기간이 짧아 사실상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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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 : 피부색이 어두웠다고 하며 고령이 되어서도 검은머리가 있었다고 한다. | | ・외모 : 피부색이 매우 밝았다고 하며 눈 또한 크고 이뻐 당시 시대에서 미남에 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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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사 : 아들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손주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휼륭한 군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시험을 치루게 하였으며 말년엔 매우 이뻐하였고 그 결과 아들과 손주는 '''성군이 되었다.''' 허나 부인과 며느리들에겐 관심없고 딱딱하고 냉정하게 굴었다고 한다. | | ・가정사 : 세명의 부인중 첫째 부인인 [[휘빈이씨]]는 폐위당하고, 둘째 부인인 [[정안왕후]]는 정신병으로 사망했으며, 셋째 부인인 [[현덕왕후]]와는 말 한번 거의 안 섞어본 사이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내복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