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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어린 시절=== | ||
1365년(공민왕 14년),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고려 최고의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 |||
===[[조선 영종|이방원]]과의 혼인=== | |||
그렇게 1382년(우왕 8년),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16세의 이방원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민씨의 친정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처가살이를 시작 후 혼인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에는 이방원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고 금슬은 매우 좋았다. | |||
===시아버지 [[조선 태조|이성계]]를 도와 왕세자빈이 되다=== | |||
1392년(태조 즉위년)에 시아버지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것을 도와 남편인 이방원이 왕세자에 봉해지자 본인은 왕세자빈에 봉해졌다. 당시 왕비의 자리가 공석인 상태였기에 왕세자빈으로써 내명부와 외명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내조를 하며 나라를 늘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 노비제도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노비제도 폐지를 앞장 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 |||
===조선의 왕비가 되다=== | |||
시아버지 태조가 1402년 양위하고, 남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며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되었을 땐 왕세자빈 간택을 비롯한 여러 정쟁 속에서 왕실의 권위와 대외적 공정성을 바로하였고 조정이 내외명부에 개입할 수 없게 강력한 목소리를 내서 내명부와 외명부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성장시켰다. | |||
===남편 [[조선 영종|이방원]]과의 충돌=== | |||
당시 대간들이 주요 정치 인사던 류연아와 함께 왕실 내 스캔을 가지고 여러 소란을 여러 일으키고, 내외명부 일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자 민씨는 격노하며 수라를 끊고 업무를 안 보겠다는 등 궁중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민씨의 항의 시위가 너무 길어져 국가 행정이 타격을 입자 이방원은 전교를 통해 내외명부는 독립적 기구여도 왕명보다 아래이며 중궁전도 이에 복종해야한다고 몫을 박았다. 이에 민씨는 더 격노해 투쟁을 벌였고, 당시 국정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던 이방원은 민씨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 |||
===단종 즉위 이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시해 사건을 일으키다=== | |||
왕세자 이융이 즉위하여 임금(단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 조선에서 왕의 친어머니로 왕대비가 된 최초의 사례이면서, 또 최초의 왕대비가 된 사례이다. | |||
왕대비가 된 이후 민씨는 중궁의 권한을 상실해 뒷방 처지가 되었다. 또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아들 단종의 국정운영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단종이 왕대비의 반대에도 많은 자식을 낳아 왕대비의 심기를 자극하였으며, 왕대비와 정치적 충돌이 생기면 자결 소동을 벌여 왕권 확립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모자간의 충돌이 발생하던 어느 날에 당시 예조판서 제오르지오의 청으로 단종이 왕대비에게 감과 게장을 올렸는데 왕대비가 그것을 먹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단종은 하지만 우유부단한 모습을 또 한번 보였고 이에 왕대비는 화날대로 화나 야심한 새벽에 보안이 허술한 틈을 타서 아들 단종과 시아버지 태조를 시해하는 난을 일으켰다. | |||
조정의 빠른 수사로 왕대비가 진범으로 밝혀지며 민씨는 폐위되어 사가로 내쳐졌고, 이후 스스로 자결하여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이후 어린 손주가 왕위에 오르며 발생한 수많은 파국으로 인해 원인제공자인 민씨는 희대의 악녀라고 불려지고 있다. |
2025년 4월 15일 (화) 02:27 판
![]() 조선 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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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종의 폐비 폐비 민씨ㅣ廢妃 閔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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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65년 8월 6일 | ||||||||
개경 철동 사저 | |||||||||
사망 | 1426년 8월 27일 (향년 61세) | ||||||||
한성부 사저 | |||||||||
능묘 | 폐비민씨묘 (廢妃閔氏墓)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392년 8월 13일 ~ 1402년 10월 22일 | |||||||||
조선 왕비 | |||||||||
1402년 10월 22일 ~ 1423년 8월 5일 | |||||||||
조선 왕대비 | |||||||||
1423년 8월 5일 ~ 1426년 8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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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영종의 왕비로, 제3대 국왕인 단종의 모후이다.
생애
어린 시절
1365년(공민왕 14년),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고려 최고의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방원과의 혼인
그렇게 1382년(우왕 8년),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16세의 이방원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민씨의 친정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처가살이를 시작 후 혼인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에는 이방원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고 금슬은 매우 좋았다.
시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왕세자빈이 되다
1392년(태조 즉위년)에 시아버지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것을 도와 남편인 이방원이 왕세자에 봉해지자 본인은 왕세자빈에 봉해졌다. 당시 왕비의 자리가 공석인 상태였기에 왕세자빈으로써 내명부와 외명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내조를 하며 나라를 늘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 또 노비제도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노비제도 폐지를 앞장 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비가 되다
시아버지 태조가 1402년 양위하고, 남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며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되었을 땐 왕세자빈 간택을 비롯한 여러 정쟁 속에서 왕실의 권위와 대외적 공정성을 바로하였고 조정이 내외명부에 개입할 수 없게 강력한 목소리를 내서 내명부와 외명부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성장시켰다.
남편 이방원과의 충돌
당시 대간들이 주요 정치 인사던 류연아와 함께 왕실 내 스캔을 가지고 여러 소란을 여러 일으키고, 내외명부 일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자 민씨는 격노하며 수라를 끊고 업무를 안 보겠다는 등 궁중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민씨의 항의 시위가 너무 길어져 국가 행정이 타격을 입자 이방원은 전교를 통해 내외명부는 독립적 기구여도 왕명보다 아래이며 중궁전도 이에 복종해야한다고 몫을 박았다. 이에 민씨는 더 격노해 투쟁을 벌였고, 당시 국정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던 이방원은 민씨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단종 즉위 이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시해 사건을 일으키다
왕세자 이융이 즉위하여 임금(단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 조선에서 왕의 친어머니로 왕대비가 된 최초의 사례이면서, 또 최초의 왕대비가 된 사례이다.
왕대비가 된 이후 민씨는 중궁의 권한을 상실해 뒷방 처지가 되었다. 또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아들 단종의 국정운영 행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단종이 왕대비의 반대에도 많은 자식을 낳아 왕대비의 심기를 자극하였으며, 왕대비와 정치적 충돌이 생기면 자결 소동을 벌여 왕권 확립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모자간의 충돌이 발생하던 어느 날에 당시 예조판서 제오르지오의 청으로 단종이 왕대비에게 감과 게장을 올렸는데 왕대비가 그것을 먹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단종은 하지만 우유부단한 모습을 또 한번 보였고 이에 왕대비는 화날대로 화나 야심한 새벽에 보안이 허술한 틈을 타서 아들 단종과 시아버지 태조를 시해하는 난을 일으켰다.
조정의 빠른 수사로 왕대비가 진범으로 밝혀지며 민씨는 폐위되어 사가로 내쳐졌고, 이후 스스로 자결하여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이후 어린 손주가 왕위에 오르며 발생한 수많은 파국으로 인해 원인제공자인 민씨는 희대의 악녀라고 불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