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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자치시]]는 [[대부여국]] [[한산주]] 북부에 위치한 도시이자 6대 자치시 중 하나이다. 인구 밀도로는 광역자치단체 1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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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구는 1,000만 명이 약간 안 되는 수준으로, [[양광부]] 주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한 메갈로폴리스가 된다. 위례의 인구수는 몇 년 전부터 많은 인구 유출로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1000만 명 선이 깨져 세계 도시 인구 순위에서는 많이 밀려났지만, 그 대부분의 인구가 [[양광부]] 유입되었기 때문에 [[한산주]]의 인구는 아직까지 증가세다. [[한산주]] 인구 중 약 50%가 [[양광부]] 및 위례시에 집중되어 있기에 세계적으로도 수도권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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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를 포함한 [[한산주]] 북서부 도시권 인구는 2,500만여 명으로 세계 10위권에 해당해 대략 도쿄, 자카르타, 델리, 카라치, 상파울루, 충칭, 상하이 등의 도시권보다는 적고, 뭄바이, 뉴욕, 멕시코시티, 마닐라, 라고스, 다카, 카이로의 도시권과 맞먹는 인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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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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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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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한 땅이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의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당시 도읍을 둘러싼 도성으로,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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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위례자치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이다. 후대로 오면서 그 주위로 영역이 확장되자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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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백제가 항복한 후 웅진(공주)으로 쫓겨간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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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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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중 한주(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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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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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강북 지역이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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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과 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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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다. 공양왕 때에도 왕이 일시 머물렀으며, 서경과 마찬가지로 분사를 두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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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

2019년 6월 9일 (일) 00:14 판

위례광역시로고.png 위례자치시의 기초자치단체
강남구강동구강북구강서구관악구
광진구구로구금천구노원구도봉구
동대문구동작구마포구서대문구서초구
성동구성북구송파구양천구영등포구
용산구은평구종로구중구중랑구
위례자치시
慰禮自治市 | Wirye City
위례광역시로고.png
시청 소재지위례자치시 중구 위례대로 110
면적605.20㎢
하위 행정구역25
시간대UTC+9
인구9,784,112명
인구 밀도16,166.74명/㎢
시장하재성 (초선)개혁보수당
위례자치시의회개보80석
민주15석
열린15석
구청장개보18석
민주4석
열린3석
상징시화개나리
시목은행나무
시조까치
홈페이지www.위례자치시.com

위례자치시대부여국 한산주 북부에 위치한 도시이자 6대 자치시 중 하나이다. 인구 밀도로는 광역자치단체 1위를 차지한다.

현재 인구는 1,000만 명이 약간 안 되는 수준으로, 양광부 주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한 메갈로폴리스가 된다. 위례의 인구수는 몇 년 전부터 많은 인구 유출로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1000만 명 선이 깨져 세계 도시 인구 순위에서는 많이 밀려났지만, 그 대부분의 인구가 양광부 유입되었기 때문에 한산주의 인구는 아직까지 증가세다. 한산주 인구 중 약 50%가 양광부 및 위례시에 집중되어 있기에 세계적으로도 수도권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위례를 포함한 한산주 북서부 도시권 인구는 2,500만여 명으로 세계 10위권에 해당해 대략 도쿄, 자카르타, 델리, 카라치, 상파울루, 충칭, 상하이 등의 도시권보다는 적고, 뭄바이, 뉴욕, 멕시코시티, 마닐라, 라고스, 다카, 카이로의 도시권과 맞먹는 인구를 가지고 있다.

위례자치시청사도환별궁
위례시청.jpeg도환별궁.jpeg

역사

삼국시대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한 땅이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의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당시 도읍을 둘러싼 도성으로,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어있다.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위례자치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이다. 후대로 오면서 그 주위로 영역이 확장되자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러다가 백제가 항복한 후 웅진(공주)으로 쫓겨간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중 한주(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고려

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강북 지역이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과 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웠다.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왕이 남경에 거둥하였다. 공양왕 때에도 왕이 일시 머물렀으며, 서경과 마찬가지로 분사를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