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나루히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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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공동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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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계관 일본국}}
{{나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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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름=일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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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
|현지이름=일본국
+
 
|다른표기=(영어:Japan State)[br]일본어:日本国)
+
{{일본국 (나루히토) }}
|대표이미지=Panoramic view of tokyo-1.jpg
+
=개요=
|대표이미지_설명=[[동경]]의 전경
 
|국기_그림=Flag of Japan.svg
 
|문장_그림=Imperial Seal of Japan.svg
 
|문장_이름=황실 문장(관습상)
 
|지도_그림=Map of Japan.png
 
|지도_그림_설명=
 
|나라_표어=대화 민족의 시대[br](명치 33년 1900년~평성 23년 2011년)[br]우리 시대의 평화와 화합[br](평성 23년 2011년~현재)
 
|나라_표어_설명=
 
|국가=기미가요
 
|국가_듣기=
 
|지도=
 
|너비=
 
|수도=[[동경]](사실상)
 
|수도위치=
 
|최대도시=
 
|공용어=[[일본어]]
 
|국민어=
 
|지역어=아이누어, 류큐어
 
|정부형태= 단방제, 군주제, 입헌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문민통제
 
|지도자_칭호= [[일본국 천황 (공동세계관)|천황]]
 
|지도자_이름= [[나루히토]]
 
|지도자_칭호1=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공동세계관)|내각총리대신]]
 
|지도자_이름1=[[에다노 유키오]]
 
|지도자_칭호2= [[일본국 참의원 (공동세계관)|참의원 의장]]
 
|지도자_이름2= [[히라노 히로후미]]
 
|지도자_칭호3= [[일본국 중의원 (공동세계관)|중의원 의장]]
 
|지도자_이름3= [[요시다 다다토모]]
 
|지도자_칭호4= [[일본국 사법원장|사법원장]]
 
|지도자_이름4= [[나카니시 간]]
 
|주권=[[일본국 헌법 (공동세계관)|헌법]] 공포
 
|주권_설명=1900년
 
|정부수립1=나루타키 도시미치 내각
 
|정부수립일1=1900년~1907년
 
|정부수립2=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
 
|정부수립일2=1907년~1914년
 
|정부수립3=가토 다카아키 내각
 
|정부수립일3=1914년~1922년
 
|정부수립4=[[제1차호헌운동]]
 
|정부수립일4=1922년
 
|정부수립5=가쓰라 다로 내각
 
|정부수립일5=1922년~1923년
 
|정부수립6=[[제2차호헌운동]]
 
|정부수립일6=1923년
 
|정부수립7=[[1923년 체제]]
 
|정부수립일7=1923년~1945년
 
|정부수립8=[[1945년 체제]]
 
|정부수립일8=1945년~현재
 
|EU 가입일=
 
|면적=377,915㎢
 
|면적_순위=
 
|내수면_비율=0.8
 
|시간대=일본표준시
 
|UTC_시차=+9
 
|일광절약시간=
 
|인구어림년도=2019
 
|어림인구수=162,282,757
 
|인구_순위=
 
|인구조사년도=
 
|조사인구수=
 
|인구밀도=429.4명/㎢
 
|인구밀도_순위=
 
|GDP_PPP_년도=
 
|GDP_PPP=$7조 3913억 3045만
 
|GDP_PPP_순위=
 
|일인당_GDP_PPP=$4만 5546
 
|일인당_GDP_PPP_순위=
 
|명목_GDP =$6조 6286억 149만
 
|명목_GDP_순위 =
 
|인간개발지수=0.903
 
|HDI_순위=
 
|HDI_조사년도=2018년
 
|지니_계수=
 
|통화= [[일본국 엔 (공동세계관)|일본국 엔]](¥)
 
|통화기호=JPY
 
|단위=
 
|ISO1=JPN
 
|ISO2=JP
 
|ISO3=
 
|국가도메인=.jp·.日本
 
|국제전화번호= 81
 
|보충설명={{각주}}
 
}}
 
[[파일:View of osaka-1.jpg|500px|섬네일|왼쪽|오사카의 전경]]
 
[[파일:Panoramic view of tokyo-1.jpg|500px|섬네일|왼쪽|도쿄의 전경]]
 
[[파일:Sapporo panoramic view(Snow Festival 1).jpg|500px|섬네일|왼쪽|삿포로 눈축제]]
 
[[파일:Temples of Kyoto-1.png|550px|섬네일|왼쪽|교토 청수사]]
 
==개요==
 
 
||[youtube(zCLOJ9j1k2Y)]||
 
||[youtube(zCLOJ9j1k2Y)]||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한문]]: 日本國, [[영어]]: Japan State)'''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제, 단방제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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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일본어]]: 日本国, [[한문]]: 日本國, [[영어]]: State of Japan)'''은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위치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제, 단방제 국가이다.
==상징==
+
=상징=
{{일본국 (공동세계관)의 상징}}
+
{{일본국 (나루히토)의 상징}}
===국호===
+
==국호==
'''일본국(日本国)'''이 국호로 제도화된 것은 1900년으로 헌법 공포와 함께 '국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일본국이 국호로 제정됐다.
+
{| class="wikitable"
 
+
|-
이전에 '일본'이라는 단어가 국호로 등장한 최초의 사례는 670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화국의 사신이 와서 자신들의 국호를 일본으로 개칭하였고 뜻은 동쪽(즉 해가 뜨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라 했다고 한다. 일본 역사 학회는 율령 체제가 도입된 8세기 경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창출됐다고 한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이전에 일본국은 대화(大和)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일본어 원음은 '야마토'이며 야마토 조정에서 나온 표현이다. 중국이나 외국에서는 왜국(倭國)이라 일본을 칭했다.
+
! 언어 !! 해당언어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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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일본어 독음은 니혼(にほん, Nihon) 혹은 닛폰(にっぽん, Nippon)인데 전자와 후자의 사용 빈도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정보가 없으나 요즈음은 후자인 닛폰의 사용 빈도가 많다. 영어 독음으로 일본을 읽으면 저팬(Japan)이다.
+
| 일본어 || 日本(にほん, にっぽん)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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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어 || 일본
 +
|-
 +
| 영어 || Japan
 +
|-
 +
| 프랑스어 || Japon
 +
|-
 +
| 독일어 || Ja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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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어 || Япония
 +
|-
 +
| 중국어 간체&번체 || 日本
 +
|-
 +
| 베트남어 || Nhật Bả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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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 전형인 신자체로 국호를 표기하면 日本国(일본국)이며 한자 번체로는 日本國(일본국), 한자 간체로는 日本国(일본국)으로 영어로는 Japan(저팬)으로 표기한다. '일본'의 일본어 독음은 니혼(にほん, Nihon) 혹은 닛폰(にっぽん, Nippon)인데 영어 독음은 저팬(japan)이다.
 +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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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국기}}
 
[[파일:Flag of Japan.svg|섬네일|가운데|일장기(日章旗)]]
 
[[파일:Flag of Japan.svg|섬네일|가운데|일장기(日章旗)]]
일본국의 공식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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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공식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 [[일본어 (나루히토)|일본어]]로는 일장기를 '닛쇼-키(にっしょうき)'라 읽지만 [[일본인 (나루히토)|일본인]] 대다수는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라 읽는다. 여기서 히노마루는 일장기를 뜻하기도 하고 일본이나 [[일본국 정부 (나루히토)|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독자적인 무언가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
==국장==
[[일본어 (공동세계관)|일본어]]로는 일장기를 '닛쇼-키(にっしょうき)'라 읽지만 [[일본인 (공동세계관)|일본인]] 대다수는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라 읽는다. 여기서 히노마루는 일장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일본국이나 일본국 정부, 또는 독자적인 일본의 무언가 따위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
{{일본국 (나루히토)/국장}}
 
 
일장기에서 홍색(紅色)의 원은 태양을 뜻하고 전체적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형태인데 이는 [[일본인 (공동세계관)|일본인]]이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신화에서 착안하였다. 초기에는 홍색 부분이 적색(赤色)이었으나 이후 홍색으로 교체됐다.
 
 
 
일장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몬무 천황'의 치세 시기로 태양을 형상화한 깃발을 썻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기 기록.] 허나 예전에는 현재처럼 백색(白色), 홍색 조합이 아닌 적색 바탕에 금색(金色)이나 황색(黃色)의 원을 그려 넣은 모습이었고 여기에 황실 문장을 넣어서 금어기(錦御旗)로[* 다만 가마쿠라 막부 이전에는 국장을 안 넣았다. 그 이후에 금색 원에다가 황실 문장을 장착했다.]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백색+적색 조합의 일장기는 언제부터 사용됐느냐, 바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부터 사용됐다.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교역선의 상선기로 사용되었고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 다음 개항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국기(國旗)로 관습화되었으며[* 일본국 태정관지령 상선기령] 1900년에 제정된 '국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기로 제도화되었다.
 
 
 
현재에는 관공서에 의무적으로 게양되고 국경일에도 의무 게양을 해야 한다.[* 국기에 관한 법률 제3조(국기 게양)] 주로 황실 행사나 국가 행사 등에서 소지하여 흔드는 것을 많이 포착할 수 있으며[* [http://www.example.org 일본국 정부 내각부 국무원 보고서, 국가 행사나 황실 행사에 국기를 소지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 효과 정리]] 민간 축제 때에도 흔치 않게 사용된다. 이렇게 국기의 사용 빈도가 많은 것은 일장기를 흔드는 것에 대해 '히노마루는 태양이 떠오르는 형상이고 이는 히노마루를 흔들면 흔들수록 세계에 더 많은 빛이 내릴 것이다'[* [http://www.example.org 일본국 정부 문부과학성 문화연구원 보고서, 일본인이 히노마루를 많은 횟수로 흔드는 이유에 대한 가설 추론]]라는 민간 풍토 사상 때문이라는 가설이 존재한다. 다만 해외에서는 민폐로 여겨져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사용을 안한다.
 
 
 
준국기에는 천황기가 있는데 일장기와 함께 양손으로 흔드는 경우가 있고 한 손에 다 들고 흔드는 경우도 있다. 천황기를 동반해서 쓸 때에는 황실 행사에 한정한다.
 
===국장===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섬네일|가운데|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섬네일|가운데|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일본국의 관습상 국장은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국화문(菊花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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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관습상 국장은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국화문(菊花文)'''이다. 명칭이 다양한데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쥬-로쿠요-하치쥬-효-키쿠,,)과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쥬-로쿠이치쥬-효-키쿠,,), 국화문(菊花文, ,,키쿠카,,) 등이 있다. 여기서 국화문은 말 그대로 이 문장에 쓰인 꽃이 국화(菊花)라서 쓰이는 이름이며, 십육엽팔중표국문의 뜻은 '16개의 잎, 8개의 겹을 가진 국화문'이다. 십육일중표국문은 '16개 홑겹을 가진 국화문'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국화문이라는 호칭이 널리 사용된다.
 
+
==국가==
명칭이 3개인데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쥬-로쿠요-하치쥬-효-키쿠,,)과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쥬-로쿠이치쥬-효-키쿠,,), 국화문(菊花文, ,,키쿠카,,)가 그 3개다. 국화문은 말그대로 이 문장에 쓰인 꽃이 국화(菊花)라서 쓰이는 이름이다. 십육엽팔중표국문의 뜻은 '16개의 잎, 8개의 겹을 가진 국화문'. 십육일중표국문은 '16개의 홑개의 겹의 국화문'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전자나 국화문을 많이 사용한다.
+
{{일본국 (나루히토)/국가}}
 
 
국화문에 있는 꽃은 위에서 말했듯 국화를 형상화한 것이고 16개의 꽃잎이 중앙을 중심으로 모여 있으며 꽃잎의 끝에는 겹쳐져 있는 꽃잎 중 돌출된 꽃잎 8개가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테두리선이 표시되어 있고 노랑색으로 색칠되있다.
 
 
 
국화문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는 가마쿠라 막부 시절, 고토바 천황의 사용이었다. 이시기에 국화문이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정착됐고 금어기의 금색 원에 이 국화문이 장착된 시기 또한 가마쿠라 막부 시기이다. 이렇게 황실 문장으로 자리를 잡은 국화문은 시간이 흘러 현대에 와서도 일본국 황실의 문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관습상 국화의 지위에 있다.
 
 
 
국화문은 국장으로서 여러 기관의 문장에 박아 넣기도 하며 또한 바리에이션이 꽤 있는데 화족 가문이나 궁가 문장에 이 문장의 바리에이션이 도입되는 경우가 많고 '십육국문'[* 말그대로 16개의 잎을 가진 국화인데 기존 뒤에 겹쳐 있던 꽃이 제거된 모습이다.]이나 '육국문'[* 6개의 잎을 가진 국화라는 뜻이다.]이 그 예다. 이외 [[일본국 천황기 (공동세계관)|천황기]]와 황족기 등에도 사용된다.
 
 
 
국기에 비해 국화문은 제도상으로 일본국 국화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일본국 여권 (공동세계관)|일본국 여권]]에 사용된 점[* 여권을 제정할 때 세계 만국은 여권에다가 국가의 국장 등을 부착하기로 결정했고 이때 이 국화가 일본국 여권에 부착되면서 국화의 지위를 국제법상 어찌저찌 가지게 되었다.], [[일본국 정부 (공동세계관)|일본국 정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공동세계관)|내각총리대신]] 직속 내각법제국의 '국장 보고서'[* 일본국 국장이 어느 것인지, 국화가 과연 일본국 국화인지에 대해 정리한 내각 서면이다.]에서 '관습상 국화 긍정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국화문은 관습상 국화의 지위만큼은 [[일본국 정부 (공동세계관)|정부]]가 보장하고 있다.
 
===국가===
 
 
||[youtube(S_HCh5RC6WI)]||
 
||[youtube(S_HCh5RC6WI)]||
 
일본국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일본국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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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기미가요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임의 시대'로 여기서 임()은 친밀한 사람들, 일본 국민(日本 國民)을 뜻한다. 즉 일본 국민의 시대, 친밀한 이들의 시대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전자가 공인되고 있다.[* [http://www.example.org 일본국 정부 내각법제국 보고서, 기미가요 일본 국민 긍정설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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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국화}}
 
 
기미가요는 요나누키 음계 (四七抜き 音階)[* 요나누키 음계란 서양 7음계를 기준으로 하여 4번째 파와 7번째 시가 빠진 형태에 5음계로서 도-레-미-솔-라로 이루어져 있다.]를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여기에 서양식 화음이 덧댄 형태다. 노래는 총 11마디 29자[* 자수는 한글 기준]로 굉장히 짧다. 근데 이렇게 짧은 곡을 길게 부르다보니 중간에 음이 끊기는 느낌이 난다, 중간에 멈춘거 같다, 등의 반응이 존재하며 서양적 화음이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여론도 있다. 그리고 좀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이 있어 일부에서는 좀 화색이 있는 국가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한편 기미가요는 기본적으로 가가쿠[* 일본 궁정음악을 뜻한다.]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서양 색채가 얕으며 대신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다. 가가쿠을 베이스로 하기에 국가 제창 때에는 교내·민립 아악부나 관립 아악부가 동원된다.
 
 
 
기미가요의 원본은 913부터 914년에 편찬된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에 수록된 단가였고 천황이 헨조 대사의 칠순을 축하하며 기미가요를 발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하가(賀歌)] 1869년, 명치 시대에 영국군 군악대장 존 윌리엄 펜튼이 최초로 기미가요를 작곡했지만 곡조가 너무 서양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무산됐다. 이후 궁내성 아악부의 소속 오쿠 요시이사와 하야시 히로모리가 요나누키 음계를 기반으로 기미가요를 작곡하고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가 서양식 화음을 추가하면서 지금의 기미가요가 완성된다. 1900년에 '국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미가요는 정식적인 일본국 국가로 지정된다.
 
 
 
기미가요는 연례 국가 행사와 일부 국경일에 의무 제창을 해야 하며[* 국가에 관한 법률 제3조(제창)] 교육기관 조회[* 교육기관 조회에 관한 법률 제3조(국가 제창)]·민간 행사·황실 행사·연례 행사[* 국가 연례 행사에 관한 법률 제4조(국가 제창)] 등에서 개막식 때 제창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해외 올림픽이나 국제 체육 때에도 선수단에 의해 기미가요가 국가로서 제창된다.
 
 
 
오키나와 민족주의자들은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는데 기미가요가 일본국 국가라는 이유때문이다. 이들은 기미가요 대신 '조약돌의 노래'를[* 류쿠 왕국의 국가였다.] 부른다.
 
===국화===
 
 
[[파일:Prunus × yedoensis-1.jpg|섬네일|가운데|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ソメイヨシノ)]]
 
[[파일:Prunus × yedoensis-1.jpg|섬네일|가운데|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ソメイヨシノ)]]
 
일본국의 국화는 '''벚꽃(桜, ,,사쿠라,,)'''이다.
 
일본국의 국화는 '''벚꽃(桜, ,,사쿠라,,)'''이다.
 
+
==국조==
일본국의 국화는 벚꽃으로 정확히는 벚꽃의 품종 중 소메이요시노다. 원래 소메이요시노는 이름바 제주 왕벚나무와 동일 품종으로 인식됐지만 이후 서로 별개 품종으로 분화됐다.
+
{{일본국 (나루히토)/국조}}
 
 
소메이요시노는 밝은 분홍색을 띄고 있고 향기로운 냄새를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관상용 나무로 애용되며 일본국 전역의 벚꽃 공원은 대부분 이 소메이요시노를 쓰고 있다. 소메이요시노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토론공방이 벌어지지만 제주도에서 기원했다는 '제주기원설'과 일본국 내에서의 인공재배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인공재배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인공재배설은 일본국 소메이요시노 학회에서 주장하고 있으며 제주기원설은 한국측 단체에서 주장하고 있다.
 
 
 
소메이요시노가 본격적으로 국제 사회와 일본국 사회에 등장한 것은 1900년대로서 1901년에는 'Prunus Yedoensis'라는 학명을 부여받았고 1902년에는 소메이요시노 학원에 의하여 서양 세계에 소개됐다. 이후 1912년에는 [[동경도]]가 '워싱턴 DC'에 소메이요시노를 선물하였고 이후 워싱턴 DC에서는 매년 벚꽃재가 열리게 됐다. 시간이 흘러 1990년, '국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소메이요시노는 일본국 국화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었다.
 
 
 
대부분의 일본 국토에는 소메이요시노가 서식하고 있으며 도심지나 마을에 벚꽃 공원이 조성되있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국 전역에서는 벚꽃재가 거의 연례 행사로서 열린다. 벚꽃은 군 계급장이나 휘장, 훈장 등에도 사용된다.
 
 
 
준국화로는 황실의 상징인 국화(菊花)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공동세계관)|내각총리대신]], [[일본국 정부 (공동세계관)|일본국 정부]]에서 사용되는 오동잎이 있다. 다만 천황기와는 다르게 제도화되어 있지는 않고 관습상 준국화다.
 
===국조===
 
 
[[파일:Phasianus versicolor versicolor -1.jpg|섬네일|가운데|일본꿩(日本の雉, 日本のキジ)]]
 
[[파일:Phasianus versicolor versicolor -1.jpg|섬네일|가운데|일본꿩(日本の雉, 日本のキジ)]]
 
일본국의 국조는 '''일본꿩(日本の雉)'''이다.
 
일본국의 국조는 '''일본꿩(日本の雉)'''이다.
 
+
=역사=
일본꿩은 말그대로 일본에 서식하는 고유종으로 니혼키지(日本のキジ)라 부른다. 그냥 꿩(キジ)은 칸코쿠키지(高麗のキジ), 즉 한국꿩을 뜻한다.
+
{{일본국 (나루히토)/역사}}
 
+
==근대 이전==
일본꿩의 특징은 한국꿩보다 얼굴이 더 붉고 몸통이 갈색인 꿩과 달리 초록색이라서 다른 꿩들과 식별이 편하다. 혼슈와 시코쿠, 큐슈와 기타 등등 섬에서 서식하지만 미국에 의해 하와이 등에서 사냥용으로 키워지는 경우가 있다. 다만 미국이나 사냥용으로 들어온 일본꿩은 잡종과 교배를 하여 나온 일본꿩으로 일본꿩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
{{본문|전근대 일본 (나루히토)}}
 
+
{{본문|전근대 외지 (나루히토)}}
일본꿩을 국조로 제정하자는 논의는 1950년대 이후이며 '일본국 국조 학회'에서 일본국 정부에 일본꿩을 국조로 제정하자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후 정부가 이를 논의하여 '국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일본꿩이 제도상 일본국의 국조가 되었다.
+
==익한정부 시대==
 
+
{{본문|1900년 체제}}
아직 일본꿩을 사용한 상징은 별로 없지만 일부 대중매체에서 일본을 일본꿩으로 동물화를 해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1900년대===
==역사==
+
===1910년대===
===근대 이전===
+
===1920년대 초기===
{{본문|전근대 일본}}
+
==문민정부 시대==
===헌법 공포와 제1차 군정===
+
{{본문|1924년 체제}}
[[파일:헌정 국화회 2대 의장_이토_히로부미.jpg|125px|섬네일|왼쪽|이토 히로부미]]
+
===1920년대 중후기===
 
+
===1930년대===
 
+
===1940년대 초중기===
 
+
==국민정부 시대==
 
+
{{본문|1945년 체제}}
 
+
===쇼와 시대===
 
+
====1940년대 후기====
 
+
====1950년대====
 
+
====1960년대====
 
+
====1970년대====
헌법 공포 때 공포된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를 의장으로 하는 '헌정 국화회'에서 제출하였는데 프로이센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작성됐다. 헌법이 공포되고 헌법은 곧이어 제헌국회 양원의 비준을 받아 발효되었다. 동시에 초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공동세계관)|내각총리대신]]으로 [[나루타키 도시미치]]가 임명됐다.
+
====1980년대====
 
+
===헤이세이 시대===
[[파일:나루타키 도시미치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나루타키 총리]]
+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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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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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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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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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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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나루타키 도시미치]]는 사츠마 번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승계한 덕분에 반전주의자, 민본주의자였다. 그는 사츠마 번 출신으로서 해군의 지지를 받았다. 나루타키 도시미치는 1대 2대, 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다가 3대 내각총리대신직을 수행하다 병사한다. 근데 부검 과정부터 매장이 아닌 화장으로 장례 방식이 바뀐 것까지 그의 병사는 이상한 점 투성이었고 사츠마 번을 경계하는 조슈 번 인물들로부터 독살당했다는 '나루타키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후일 야마가타 내각 총사퇴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파일: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야마가타 총리]]
 
 
 
 
 
 
 
 
 
 
 
  
 
 
 
 
 
[[나루타키 내각]]의 뒤를 이어 4대 내각총리대신에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당시 헌정회와 입헌정우회 내부 親조슈 번 인사들을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총리대신에 오른 야마가타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도입하여 문민통제를 무너트렸다. 한편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했는데 왜냐하면 헌의회가 야마가타의 치안유지법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헌의회는 명령에 불복하였고 일본 주요 도시에 파발을 띄워 군정에 대항하자는 여론을 조성한다. 이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파만파로 퍼져나갔으며 대학생들은 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헌의회를 계승한 '호헌동지회'를 설립한다. 호헌동지회는 나루타키 독살설을 강력히 주장했고 청년들의 평화 궐기를 도모했다. 당연히 [[야마가타 내각]]은 이들을 '반역분자'로 규정하였으며 이들에게는 집회장도 내주지 않았다.
 
 
 
[[파일:야마가타내각총사퇴운동.jpg|섬네일|야마가타 내각총사퇴 운동]]
 
이 상황에서 야마가타 내각은 [[동경]]의 긴자 거리에서 일어난 호헌동지회의 데모 진압 과정에서 검 사용을 허용했고 결국 1914년 1월 9일, 학생 '노리타 기이치'가 싸늘한 주검으로 요코하마 시 앞바다에서 발견된다. 그의 죽음이 자유주의 신문사를 통하여 전국각지에 퍼져나가자 늦게나마 야마가타 내각은 '출판령'을 공포하여 신문에 대한 검열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미 주요 도시인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나가사키, 도쿄, 요코하마, 고베 등에서 노리타 기이치의 죽음을 추모하는 애도 시위가 발발한다. 그리고 애도 시위는 급격히 '야마가타 내각 총사퇴 운동'으로 확대됐으며 야마가타 내각에 불만이 많았던 해군마저 야마가타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자 결국 야마가타 내각총리대신이 사퇴하며 야마가타 내각은 퇴진되고 입헌동지회의 가토 다카아키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이에 따라 야마가타 내각 총사퇴 운동도 자진해산되고 다시 정국은 안정되는 듯하였다.
 
===입헌동지회 내각, 그리고 제1차호헌운동===
 
[[파일:가토 다카아키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가토 다카아키]]
 
 
 
 
 
  
 
 
 
 
 
 
 
 
 
 
 
 
 
정권을 바통터치한 [[가토 다카아키]] 내각총리대신은 조슈 번 인사와 연계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고 치안유지법과 출판령을 유지시켜 사회주의자 탄압을 지속시켰다. 한편 '학회령'을 선포하여 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한 학회는 합법적 활동이 불가하도록 하여 자유주의 학회의 출범을 막았다. 이는 점차 자유주의자들의 불만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난 제1차세계대전에 의해 일본국은 전시체제 상태였고 가토 내각은 이를 명분으로 하여 출판령, 학회령, 치안유지법을 계속 유지시켰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일본은 막대하게 공업력을 증강시킨 후 이를 바탕으로 나오는 중공업 공산품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무역 특수를 누리고 식량 수요의 상승으로 농작물 산업이 호황을 맞이한다. 이에 따라 중상층과 상류층 인구가 점차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정권 지지도도 상승하면서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보수주의 온건론자들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지하로 숨어든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무역 특수가 사라지고 군량미로 차출되던 식량이 시중에 풀림에 따라 식랴량 수요가 저조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고 이는 일본의 경제 위기로 직결된다. 무역 특수의 상실은 무역 회사들의 연쇄 적자를 일으켰고 제조 회사, 운송 회사가 차례대로 타격을 입으면서 일본 경제 전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토 내각]]은 당장 앞에 있는 회사의 재정 위기에만 집중하여 연쇄 적자의 원인인 수출 감소에 대해서는 내팽겨치고 적자를 맞이한 회사에 자금 지원을 실시한다. 허나 이는 막대한 국가 재정이 소모되는 일이었고 이에 가토 내각은 조세 제도를 개편, 증세를 통해 높여 재정 마련에 나선다. 가토 내각은 농민을 향해 가혹한 세금을 내게끔 조세 제도를 뜯어고쳤고 가뜩이나 식량 수요가 떨어져 침체에 빠진 일본 농업을 붕괴시키게 된다. 일본 농업이 무너지면서 일본의 식량 자급률과 농산물 시장 내에서의 일본의 경쟁력은 급격히 추락했으며 이에 내각은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는 일본 재정이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아버린다. 한편 농업이 무너지자 생계를 위해 지방의 농민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심지로 이동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 주요 도시의 부동산이 원래 가치에 비해 고평가되면서 '거품'이 끼기 시작한다. 다시 이들은 활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이촌향도 현상은 1923년에 이르어 절정을 이룬다. 경제와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호헌파는 이름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편승하여 활발한 사상 운동과 정치 운동을 전개했고 가토 내각의 정책 허점과 현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지적하며 문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파일:일본국 제1차호헌운동.jpg|섬네일|제1차 호헌운동]]
 
그리고 이는 1922년에 [[제1차 호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현역무관제 폐지, 자유해방3법[* 출판령, 학회령, 치안유지법을 일컫는다.] 폐지, 문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전국적인 집회를 일으켰다. 가토 내각 말기의 불만이 이렇게 터져나오자 [[가토 내각]]은 결국 바통을 [[가쓰라 다로]]에게 넘기면서 제2차 입헌동지회 내각이 수립된다.
 
 
 
[[파일:가쓰라 다로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가쓰라 총리]]
 
 
 
 
 
 
 
 
 
 
 
  
 
 
 
 
 
제2차 입헌동지회 내각은 일단 학회령을 폐지하고 출판의 자유에 대해서도 유연한 방식을 취하는 한편 농민 감세를 실시하여 성난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자유해방3법을 뛰어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현역무관제 유지를 선언하면서(가쓰라 담화) 호헌파에게 --빅엿과 --현상유지를 통보한다. 이에 호헌파의 불만이 차고오르자 [[가쓰라 내각]]은 이번에는 강경책을 적용하여 호헌파 학회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한편 헌병경찰을 도입하여 치안을 강화한다. 이러한 가쓰라 내각의 강경책으로 결국 호헌파는 수세에 몰려 다시 지하로 숨어들어간다. 1923년이 되어 1922년 일어난 제1차호헌운동 직후 1년 만에 호헌파는 다시 지하 조직이 되었지만 이 상황에서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다. 간토 대지진으로 전체 부동산 거품의 50%를 차지하던 간토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게 되고 파급력은 막대하여 [[교토]], [[오사카]] 등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원인이 된다. 부동산 거품이 사라지면서 일본 경제는 혼돈에 빠진다. 결국 [[가쓰라 내각]]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이 틈을 노려 호헌파는 [[제2차 호헌운동]]을 계획한다. 제2차 호헌운동의 철저한 준비를 위해 호헌파는 자유주의자, 보수주의 온건론자, 사회주의자의 단합을 위해 [[일본국 호헌회]]라는 통합 반정부 단체를 설립했다. 이후 호헌회는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각 대학교마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와서 '호헌 청년 연합'을 설립하는 한편 '호헌 부녀자회'를 조직하여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했는데 이는 차후 헌법 개정에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각계 각층에서 호헌 단체를 만들고 호헌회는 점조직 형태로 이들을 지휘하며 [[제2차 호헌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12월 8일에 [[제2차 호헌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격문 수백만장을 주요 도시에 살포하는 한편 각 도시마다 준비된 호헌회 인원들로 하여금 궐기가 일어난다.
 
===제2차 호헌운동과 문민정부 수립===
 
[[파일:일본국 제2차호헌운동.PNG|섬네일|제2차 호헌운동]]
 
전국적으로 호헌운동이 전개되자 [[가쓰라 내각]]은 당황하여 육군 전력을 동원하여 강경대응을 실시했다. 허나 이미 시위는 일파만파로 커진 상태였으며 [[다이쇼 천황]]도 가쓰라 내각의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을 강력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버리면서(다이쇼 선언) [[가쓰라 내각]]은 1923년 12월 30일에 총사퇴를 한다. 이로서 군정정부는 몰락하게 된다. 가쓰라 내각이 퇴진하자 다이쇼 천황이 친정을 선언하고(다이쇼 친정) 호헌회 인물들로 하여금 '개헌위원회'를 설치시켜 헌법 개정 작업을 명한다. 호헌회는 영국식 의원내각제 도입을 다이쇼 천황에게 제의했고 다이쇼 천황이 이를 승인하자 호헌회는 개헌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현역무관의 문관 겸직을 금지하는 조항을 박아넣는 한편 국민 기본권 신장, 여성 참정권 인정, 보통선거 기본화 등을 명시했으며 귀족원도 민선으로 선출되는 참의원으로 교체시켰다. 이렇게 조각된 개헌안은 다이쇼 천황에 의해 공포와 발효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화족 계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다이쇼 천황의 호헌 선언으로 이들의 불만이 사그라들게 된다. 이로서 [[일본국 정부 (공동세계관)|일본국 정부]]는 군정정부에서 문민정부로 교체되었다. 이를 [[1923년 체제]]라 부른다. [[일본국 헌법 (공동세계관)|헌법]]은 1924년에 제정됐으나 편의상 [[제2차 호헌운동]]의 발발 시기인 1923년으로 명명되었다.
 
===문민정부기, 그리고 1945년 체제 수립===
 
[[파일: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와카츠키 총리]]
 
 
 
 
 
 
 
 
 
 
 
  
 
 
 
 
 
문민정부화가 이루어지자 하나로 뭉쳐져 있던 호헌회는 합종연횡처럼 분열된다. 사회주의자 계열은 [[일본 사회당]]을 창당하였고 보수주의 온건론자들은 [[입헌정우회]]에 복당하여 당권을 수복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그동안 활동이 금지된 [[입헌민정당]]을 재건하면서 3당체제가 수립된다. [[제9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1924년 총선]]에서 일본 사회당은 농민과 노동자의 처우 개선, 농산물 시장 보호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장했고 입헌정우회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며 농촌 보호, 대기업 지원, 초등교육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입헌민정당은 자유무역 주장과 함께 신규 기업 육성, 공공사업을 통한 인프라망 증축, 문화 활동 지원을 공약으로 표방했다. 그리고 사츠마 번은 은밀히 입헌민정당을 미뤄준다. 총선 결과, 입헌민정당이 과반의석 확보에 성공하고 [[와카츠키 레이지로]]를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을 수립하자 입헌정우회와 일본 사회당은 야당으로 밀려난다. 한편 조슈 번이 몰락, 후견 세력(입헌민정당)의 총선 승리가 겹치면서 사츠마 번이 육해군 통솔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군제 개혁--이라 쓰고 조슈 인사 숙청이라 읽는다--이 실시되어 오늘날의 일본군에 편제가 이시기에 완성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br]1. 군관구제 도입[br]2. 편제명 개칭[br]3. (군령권 관할)합동참모회의 설치[br]4. 육해공군 사령부를 합동참모회의 예하에 설치[br]5. 방면대·지방대·항공방면대 설치 등]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총리대신은 '농촌 진흥 운동'을 개시하여 농민 지원금을 신설하고 농민에게 부과된 과세 조치를 폐지하여 지방 농촌 사회를 복구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사회당의 주장을 받아들여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 환경을 개선시켜 노동생산성 향상과 공장가동률 증가를 이루고 '간토 뉴딜'을 실시해 일자리 창출과 간토 경제권 재건을 이룩한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문민정부 체제가 빠르게 정착할 방법으로 야당과의 공조를 아젠다로 삼았으며 그는 [[입헌정우회]]와 [[일본 사회당]]의 의견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였으나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한 강경파는 독자 회파인 '건십회'를 결성하면서 입헌민정당은 두개의 회파가 동거하는 형태가 된다.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은 1929년까지 집권하다가 지병 악화로[* 와카츠키 총리는 [[제2차 호헌운동]] 시기에 경찰의 총격으로 폐에 큰 손상을 입어 지병인 폐렴을 얻었다.]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내각총리대신 사퇴로 이어진 내각 총사퇴에 따라 치뤄진 [[제11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가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이후 [[아베 간]]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됨에 따라 [[아베 간 내각]]이 수립된다.
 
[[파일:제12대 아베 간 내각총리대신.PNG|125px|섬네일|왼쪽|아베 간 총리]][[파일: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가운데|이누카이 총리]]
 
 
 
아베 간은 와카츠키 총리가 실시했던 여야당간 정치적 협화(정야협화)를 승계했고 정야협화의 창조주인 와카츠키 총리를 자주 문병하였다. 아베 간은 제12대 내각총리대신직을 수행할 시기에 일본은 서민 경제가 성장하고 전후 경제 위기를 극복하였다. 또한 경공업·중공업 회사와 건설업 회사들의 설립 빈도가 많아져 일본의 2차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훗날 2차 산업을 바탕으로 하는 무역업, 운송업, 서비스업 회사들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준다. 그러나 [[아베 내각]]은 경제 정책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자유주의 경제학을 채택했다. 아베 간은 경제보다는 외교 사업에 집중하였고 이에 말미암아 재임기의 절반을 해외 순방에 쏟은 아베 간은 과로로 인한 지병을 얻게 되고 1933년 총선을 준비하다가 과로사한다. 아베 간의 뒤를 이어 [[이누카이 쓰요시]] 부대표가 당대표직을 승계하고 선거를 준비했는데 그는 입헌민정당과 일본 사회당의 선거연합을 무찌르고 다시금 입헌정우회 내각을 수립시킨다. [[이누카이 내각]]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그 근거를 대공황에서 찾았다. 일본국도 대공황의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기에 이누카이 내각은 대공황 수습에 집중한다. 이름바 간토 뉴딜에서 얻은 경험을 발판 삼아 '혼슈 뉴딜'을 실시한 그는 공공 사업 시행과 함께 [[아베 간 내각]] 시기 만들어진 수많은 회사들을 지원하며 이들이 다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편 이누카이 내각은 무역 시장 개척에 나서서 처참히 무너진 무역업을 재건했고 금융업에 관련된 법령들을 뜯어고치는 한편 '투자 총량규제'를 도입하여 금융경제가 실물경제의 규모를 뛰어 넘으며 성장하는 '거품'의 생산을 방지했다. 정치적으로 이누카이 내각은 건십회를 포섭하여 과반 의석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사회당의 노동 정책들을 수용하는 카드를 꺼내들어 사회당의 지지를 얻는다. 이에 따라 입헌민정당은 정치적으로 고립되버린다. 입헌민정당은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와카츠키 레이지로 前 총리의 정계 복귀 카드를 꺼내든다. 마침 폐렴을 디딛고 일어선 와카츠키 레이지로 前 총리는 정계 복귀 요구를 수락했고 와카츠키 총리는 정야협화를 주장하며 입헌민정당을 따돌리는 입헌정우회를 비판했다. 그리고 혼슈 뉴딜이 한계에 다다르자 점차 이누카이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937년 치뤄진 제13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이누카이 내각과 입헌정우회를 입헌민정당에게 정권을 탈환당한다.
 
[[파일: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와카츠키 총리]][[파일: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가운데|시데하라 총리]]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을 수립한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은 이누카이 前 총리의 입헌정우회를 포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시 통합된 건십회가 다시 독자 회파를 구성했지만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의 포용 정책에 입헌정우회도 마지 못해 합류하면서 다시금 정계는 정야협화의 이름 하에 통합된다. 골치아픈 정치적 트러블을 제거한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은 혼슈 뉴딜을 재정비하고 대공황 수습 정책을 계속 실시하였는데 점차 세계 경제가 재건되면서 글로벌 무역 시장이 다시 확장되자 와카츠키 내각총리대신은 이 과정에서 산업지를 공업 회사에 제공하고 이를 통해 공급량을 늘리는 한편 이 공급량을 받쳐줄 무역업 회사들의 설립을 적극 장려했다. 이때 무역업 회사가 급격히 늘어나고 세계 무역 시장 재건에 편승하여 이 무역업 회사들은 급격한 성장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공급량을 무역업 회사들로 운송하는 운송업 회사들도 빠르게 늘어났고 전체적으로 일본 내 중소기업은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잘한 수많은 중소기업이 경제를 떠받치는 구조가 형성된다. 와카츠키 총리는 이 구조에 대해서 '한번 커다란 경제 위기가 오면 중소기업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라는 '중소기업와해설'을 주장했고 중소기업의 재정건전화 사업을 추진하여 갚으지도 못할 만큼 은행에서 빌린 막대한 양의 자금이나 부실 채권 등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관행을 폐지했다. 그는 최대한 중소기업을 떠받치는 산업 기반을 탄탄히 하고자 노력했으며 왠만한 경제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게끔 국가 경제 기반과 산업 기반을 닦는다. 기초 산업이 단단하게 구축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기존 중소기업은 활발한 경제 활동을 누릴 수 있었으며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연합국에 대량의 식량을 수출하여 작물 산업을 확대시켰고 여러 물품의 수요가 늘어난 것을 노려 관련 제조업을 지원했다. 이에 말미암아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국의 경제는 더욱 성장한다. 194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며 일본의 경제체제는 중소기업 중에서 도시바, 미쓰비시, 스미토모, 미쓰이, 토요타, 일본사업동맹이 '일본육대업체(日本六大業體)'로 부상하고 나머지 수많은 영향력 있는 중소기업이 공존하는 경제체제로 바뀐다. 와카츠키 레이지로는 1943년까지 총리직에 있다가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에 따라 치뤄진 [[제15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의 [[시데하라 기주로]]에 [[막문내각]]이 수립된다. 막문내각 시기에도 경제는 계속 성장을 이루었고 정치적으로는 정야협화가 이루어졌으나 바깥 상황은 아니였다. 경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기업가'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고 마찬가지로 경제 개발 과정에서 돈을 벌어들인 농민, 노동자와 같은 서민 계층도 영향력을 급격히 넓여가기 시작했고 이는 1944년이 되어 참정권 확대 운동으로 분출된다. 노동자와 농민은 노농 계층의 참정권 확대를 강력히 주장했고 지식인과 청년 사업가 계층은 보통선거 연령 범위의 확대를 주장했다. 기업가와 지식인 계층도 보통선거 개혁과 참정권 확대와 국민 기본권 확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945년이 되면서 더욱 확대되었고 [[막문내각]]은 결국 이를 수용하여 헌법 개헌회를 설치하고 헌법 개정안을 조각하여 개헌안 심사회의 통과를 받아 [[일본국 중의원|중의원]]과 [[일본국 참의원|참의원]]의 의결을 받아 국민투표에 개헌안을 붙힌다. 국민투표에서 투표율은 81%에 달하였으며 결과 74%가 개헌에 찬성하여 개헌안은 [[쇼와 천황]] 앞까지 당도한다. 쇼와 천황은 개헌안을 공식 재가하였고 이에 따라 문민정부 시대는 종식되고 [[1945년 체제]]라 불리우는 국민정부 시대가 개막한다.
 
===국민정부 시대 그리고 현재===
 
국민정부 시대가 개막하고 새로히 치루어진 [[제16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으나([[제2차 시데하라 내각]]) 1947년에 그동안 경제 발전 과정에서 일어난 입헌민정당 내부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시데하라 내각총리대신은 답이 없음을 깨달고 의회 해산권을 발동한다. [[제17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은 대패하고 일본 사회당과 합당하여 겨우 명맥을 잇는다. 그리고 반사작용으로 [[입헌정우회]]가 [[제2차 와카츠키 내각]]에게 정권을 빼앗긴 1937년으로부터 10년만에 다시 정권을 탈환하고 [[제1차 요시다 내각]]을 수립한다.
 
[[파일:요시다 시게루 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요시다 총리]][[파일:하토야마_이치로_내각총리대신.PNG|230px|섬네일|가운데|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는 고도 경제 성장책을 실시하는데 회사에 적극적으로 재정 무상 지원을 하여 사업 확장을 지원하는 한편 사업가조합과 사업가동맹 설립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상업집단주의'는 지금까지 이어져 사업을 할때는 다른 사업가와 연대를 하는 관행이 생겼다. 사업합맹(사업가조합+사업가동맹)이 늘어나고 기존 중소기업도 급격한 성장과 설립이 이어졌지만 가장 큰 성장을 이룬건 일본육대업체(日本六大業體)였다. 미쓰비시는 해운업과 화학 ·석유 등 중화학 공업 시장에 자리를 잡는 한편 도시바는 전자제품과 교통망, 발전 산업 등에 정착했다. 스미토모는 금융업과 발전 산업, 중공업 부분에 안착하였으며 미쓰이 그룹은 중화학 공업과 철강 산업, 광업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토요타 그룹은 자동차 산업에 전문화되는 한편 일본사업동맹은 자영업과 경공업, 개인 사업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아닌 전문화된 방향으로 기업 발전이 시작된다. 요시다 시게루의 뒤를 이어서 [[하토야마 이치로]]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1985년까지 [[입헌정우회]]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일본국은 급격한 경제 성장과 무역수지 증가를 이룩했고 문화 산업이 융성하는 한편 사회가 대체적으로 안정되었다. 군사적으로 중국이 나중에 일본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중국 적대설'이 등장한 시기였으며 미국의 후견 하에 일본국은 군비 증강과 육해군을 확대시켰고 공군을 신설하여 육해공군 3군 체제를 확립한다. 이때 마저 군제 재편이 이루어져 오늘날의 일본군 편제가 완성된다.
 
[[파일:도이_타가코_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도이 타가코]]
 
 
 
 
 
  
 
 
 
 
 
 
 
  
 
 
 
 
 
그러나 1985년에 체결된 플라자 합의로 일본 무역산업과 산업 전반이 타격을 입자 같은 해 치루어진 [[제26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총선]]에서 [[입헌정우회]]는 정권을 [[입헌민정당]]에 이양한다. 입헌민정당의 도이 타가코가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면서 사상 최초로 여성 내각총리대신이 배출된다. [[제1차 도이 내각]]은 일본 무역 회사들로 하여금 공장을 해외에 짓고 해외에서 수출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려 무역 회사의 회생을 도모했다. 한편 공급에 차질을 빚게 생긴 제조업 회사들과 공급이 줄어들면서 운송 행위가 축소되자 타격을 입기 시작한 운송업 회사를 구제할 목적으로 도이 타가코 내각총리대신은 국가 주도의 무역업 회사(공기업)을 만들어 정부 명의를 걸어 해외 수출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고용하여 국가 공공 사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제2차 혼슈 뉴딜). 그리고 일본 상품의 기술력 신장을 개시하고 미국과 역 플라자 합의를 지속적으로 체결하는 등 엔저 복귀를 계속 시도한다. 이러한 도이 타가코 내각의 노력으로 일본은 다시 경제 성장률을 회복하고 경기 부양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전만큼의 경제 성장률은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도이 타가코 내각은 경제 안정화 계획을 실시하여 경제 안정화 작업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으로 이전된 공장이 도로 귀환하고 일자리가 다시 창출되는 한편 상공업 중흥과 서민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며 호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국 경제는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입헌민정당은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동아시아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동남아시아와 한국에 진출한 회사들이 부도를 일으키자 일본 경제는 휘청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입헌민정당은 도로 정권을 입헌정우회에게 [[제31회 일본국 중의원 의원 총선거|내준다.]]
 
[[파일:오부치_게이조_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오부치 총리]]
 
 
 
 
 
 
 
 
 
  
 
 
 
  
 
 
 
 
 
정권 바통터치를 받은 [[오부치 게이조]]의 [[오부치 내각]]은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타격을 받은 무역업 회사들과 재정이 불건전하여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의해 시중은행의 자금 회수 정책에 따라 부도가 난 회사들에게는 재정건전화와 자금 지원을 실시했다. 한편 남은 무역업 회사들에게는 경제 제도를 개정하여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얻을 타격을 최소화하였고 일본국 경제의 강력한 경제 기반과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수습하는데 성공한다. 허나 그 피해는 막심했고 동남아시아 시장에 적극 진출해있던 일본의 수많은 회사들이 이때 입은 타격을 2010년대에 와서야 회복했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 하에. 게다가 정부가 기업에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면서 국채 발행 빈도가 높아지는 계기가 된다. 이후 2008년에 발생한 세계 금융 위기로 해외 무역 시장이 수축되자 일본은 다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무역 중소기업들도 휘청거리자 입헌정우회 내각은 실각, 다시 입헌민정당 내각이 수립된다.
 
 
 
[[파일:하토야마_유키오_내각총리대신.png|125px|섬네일|왼쪽|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유키오]]의 입헌민정당 내각([[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국채 발행말고 기업의 재정 자강화를 도입하여 무역 중소기업의 예비재정을 조성하는 한편 타격받은 부분에 대해서 일본무역회사동맹이나 일본무역회사조합으로부터 지원받는 시스템을 구성한다. 기업간 상부상조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총리대신의 경제 개혁은 성공했고 이로서 일본 무역회사들은 서로 부족한 재정을 매꾸며 재정 위기를 극복한다. 한편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이를 다른 분야로도 확장시켜 일본중공업회사조합과 일본경공업회사조합을 설립하여 공업 분야에서도 비슷한 성과를 거둔다. 이 과정에서 기업간 '협력 파트너쉽' 관계가 형성된다. 일본 정부는 이로서 직접 지원이 아닌 회사끼리 재정 지원을 하게끔 함으로서 일본 정부가 직접 출혈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사간 유대감 강화와 협력 관계 구축, 공동 계약 등의 경제 관계 수립 용이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회사동맹이나 회사조합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경우에 대해서는 어쩔 수없이 [[일본국 정부 (공동세계관)|일본국 정부]]의 재정 지원이 가해졌다.[* 아직 이런 경우는 안 나타났다.] 사업합맹에 이어 회사합맹이 구축되자 업체합맹이 일본국 경제의 근간으로 변모한다. 한편 일본육대업체는 경제 위기 과정에서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조치를 취하며 다국적 기업들로 변모했고 유일하게 일본사업동맹만 일본에 잔류한다.[* 다국적 기업이 됐다고 했지 아예 이들이 일본을 탈주한거 아니고 공장의 상당수는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
 
 
 
[[파일:에다노_유키오_내각총리대신.jpg|125px|섬네일|왼쪽|에다노 총리]][[파일:도호쿠 대지진 1.png|250px|섬네일|가운데|동일본 대지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대연정이 수립되면서 해산되고 무소속 의원인 [[하나무라 나카하라]]을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2011 대연정]]이 수립된다. [[2011 대연정]]은 대지진 피해가 수습된 2016년을 기점으로 해산되고 중도개혁주의 정당인 [[자유당 (일본국)|자유당]]과 [[입헌민정당]]의 연립정부가([[에다노 내각]]) 수립되면서 오늘날에 이르었다.
 
 
==자연환경==
 
==자연환경==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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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일본국 (나루히토)/자연환경}}
일본국의 영토 면적은 37,791,500ha(377,915㎢)로 독일보다는 크지만 스웨덴, 스페인보다는 작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
==인문환경==
 
+
===인구===
[[파일:(인공위성 지도) 일본 열도 구성 사도(四島).jpg|350px|섬네일|왼쪽|일본 열도 중 사대도(四大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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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일본국 (나루히토)/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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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본문|일본국 (나루히토)/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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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국어(國語)'가나(仮名)'라는 국문(國文)으로 기록되는 [[일본어]]이며 [[일본인 (나루히토)|일본인]] 절대다수가 국어로써 혹은 생활에 용이함을 위하여 사용 중에 있고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 국적의 [[일본인 (나루히토)|일본인]]도 대개는 사용한다. [[일본인 (나루히토)|일본인]]은 따라서 [[일본어]]를 통용한다. 아이누어나 산칸어 등 지역어가 존재하고 일본어 자체의 방언도 다양하다. 한편 글로벌 언어로 정착한 영어에 관하여 일본국 정부는 정규 교육 과정에 영어 교육을 의무화시키는 등 영어 교육을 보편화시켰다. 이외에 제2외국어로는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라틴어 등이 인기가 많다.
 
+
===종교===
 
+
일본국은 [[일본국 헌법 (나루히토)|일본국 헌법]]에 의거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정교(政敎)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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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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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는 뚜렷한 종교라는 특성이 없어서 다른 종교와 섞이기도 하였는데 복수종교라는 일본인의 종교 문화와 연계되면서 불교와의 융합인 신불습합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후기에는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현재에 이르러 중앙집권화에 성공, 정식적인 종교화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종교성이 별로 없어 강한 정체성과 체계적인 조직이 전무했던 신토는 19세기에 접어든 후, 이세신궁의 신관이었던 '아이야 도이치(会谷 盗一)'가 서양의 천주교를 보면서 신토 또한 천주교처럼 조직화되어 '종교(宗敎)'의 모습을 갖출 것을 주장하게 되고 이의 일환으로 여러 지역에 분권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들을 신궁의 예하로 통합시키는 신토통합운동(神道統合運動)을 전개한다. 한편 '우부야시키 나츠히코(産屋敷 夏彦)'라는 또다른 신관은 천주교의 교황청을 모방하여 모든 신사들을 통할하는 기구의 설립을 이세신궁에 청원하는 교무부설립청원운동(敎務府設立請願運動)을 일으킨다. 또한 신토는 신불습합와해운동(神佛習合瓦解運動)을 통해 신토의 중앙집권화를 사사건건 방해하던 불교와 연을 끊으려 기도한다. 이후 세 운동 모두 목적을 달성하였고 1879년에 교무부가 설치되며 1881년에는 대부분의 지방 신사들이 해당 지방의 신궁에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이로서 교무부가 신궁을 통할하고 신궁이 신사를 통할하는 조직적 구조의 틀이 정립된다. 허나 이러한 중앙집권화 운동은 일부 지방 신사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 하였고 이렇게 개혁에 불응한 신사들을 '불응신기(不應神祇)'라 한다. 아이야 신관을 위시한 협상파는 불응신기도 포용하여 개혁에 동참시키는 온건적인 노선을 지향했지만 우부야시키 신관을 위시하는 '신궁회(神宮会)'는 협상파의 포용 노선을 지양하고 개혁에 협조하지 않는 불응신기는 불가역적으로 배제, 순응한 신사들로만 개신을 추진해야 한다 주장하면서 대립각을 세운다. 이윽고 신궁회가 양보하면서 불응신기와의 협상에 들어가 현재까지 대부분의 지방 신사가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지만 일부 신사는 아직도 불응신기로 남아 있다. 한편 앞서 말한 두 운동으로 천주교처럼 신토를 종교로 가꾸어 나가기 시작한 신궁회와 '창경회(彰炅会)'는[* 협상파가 표면 위로 올라오면서 창설한 조직이다.] 훗날 신토의 양대 파벌이 되버린다. 20세기 초반이 되어 신토는 천주교처럼 교무부를 정점으로 하는 완연한 중앙집권적 지배 구조와 아마테라스오오카미를 중심으로 교리를 개편하게 된다. 이로서 신토는 여타 다른 종교들처럼 종교의 색을 갖추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신토의 파벌 정계는 190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는 창경회가 우세를 점했지만 이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낙수론 계열인 신궁회가 우세를 점한 상태이며 기존 이세신궁파와 새로 등장한 헤이안신궁파가 연고지를 기반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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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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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도다이지 대불전 정면.jpg|350px|섬네일|가운데|도다이지 대불전]]
 
 
 
 
 
 
 
 
 
 
 
 
 
 
 
 
 
 
 
 
 
 
일본국의 영토는 마치 활을 연상시키는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일본 열도]]를[* 일본 열도의 직선 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서남단의 '[[규슈 (공동세계관)|규슈]] [[가고시마현]] 이부스키'에서 '북동단, [[홋카이도 (공동세계관)|홋카이도]] 네무로'까지 1,900km이다. 여기서 이즈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어 '남방 제도군'이라 하며 난세이 제도, 남방 제도군, 사개도와 그 속도가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일본 열도]]를 구성한다.] 구성하는 사대도(四大島)와[* [[홋카이도 (공동세계관)|홋카이도]], [[규슈 (공동세계관)|규슈]], [[시코쿠 (공동세계관)|시코쿠]], [[혼슈 (공동세계관)|혼슈]]를 일컫는다.]그 속도(屬島), [[이즈 제도 (공동세계관)|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공동세계관)|오가사와라 제도]], [[난세이 제도 (공동세계관)|난세이 제도]]이다.
 
====본토(4개도)====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핵심 지역으로 면적 순에 따라 [[혼슈 (공동세계관)|혼슈]], [[홋카이도 (공동세계관)|홋카이도]], [[규슈 (공동세계관)|규슈]], [[시코쿠 (공동세계관)|시코쿠]]로 구성된다. 부속도서로는 사도섬, 이키섬, 오키 제도, 쓰시마섬 등이 있다. 과거, 사할린섬을 일본 열도에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남사할린-남쿠릴 반환 조치(1903) 이후 무산되었다.
 
====난세이 제도====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서부 지역인데 독립 도군(獨立 島群)과 주류 도군(主流 島群)으로 분류된다. 먼저 주류 도군은 면적 순에 따라 류큐 제도, 사츠난 제도로 구성되며 류큐 제도는 사키시마 제도·오키나와 제도로, 사츠난 제도는 오스미 제도·토카라 열도·아마미 군도로 나뉜다. 독립 도군으로는 다이토 제도만 있다. 이중 중국과 영토 분쟁 지역인 [[센카쿠 제도]]는 사키시마 제도에 속하여 있다.
 
====남방 제도군====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남부 지역으로서 크게 [[이즈 제도 (공동세계관)|이즈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 (공동세계관)|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있다. 이외 독립 도군으로 몇몇 섬을 두고 있었지만 최근에 전부 이즈 제도와 오가사와라 제도로 분류 작업이 완료되었다.
 
====영토 변화====
 
1900년, 일본국이 수립되고 일본국은 군사력을 이용한 물리적인 영토 확장을 하지 않았지만 자연적인 영토 확장과 간척 등을 통한 영토 확장은 이루어졌다. 주로 자연적인 영토 확장은 해저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 열도의 등장에 따른 면적 변화였고 최근에 대표적인 화산섬은 '니시노시마'인데 2013년 말에 형성되었다.
 
===영해===
 
[[파일:일본국 영해+EEZ 지도.png|350px|섬네일|왼쪽|일본국의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을 포함한 영해 지도]]
 
 
 
 
 
 
 
 
 
 
 
 
 
 
 
 
 
 
 
 
 
 
 
 
 
일본국의 영해 면적은 3,860,000㎢이며 EEZ(베타적 경제 수역)도 합치면 4,479,358㎢의 광활한 영해+EEZ 면적을 소유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야에야마 제도, 동쪽으로는 미나미토리시마, 남쪽으로는 미나미아오섬, 북쪽으로는 벤텐섬까지 분포된 이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은 대단히 넓은 면적인데 중국 영해의 5배, 몽골 영토의 3배, 카자흐스탄 영토의 약 1.6배에 달한다.
+
[[파일:호류지 사찰.jpg|250px|섬네일|가운데|호류지]]
  
이렇게 거대한 영해를 보유하게 된 이유는 일본 열도 자체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한 나라이자 태평양으로의 진출에 용이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이러한 진출 활동은 현대에 들어서 멈추었지만 이미 방대한 영해를 확보한 뒤인지라 별 문제는 없었고 이때 자리잡은 영해 구도가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해 문제에 대해서 중국과는 센카쿠 제도 분쟁을 겪고 있고 한국과는 7광구 분쟁을 겪고 있는게 흠이다. 종식된 국경 분쟁으로는 러시아와의 북방 영토 분쟁이 있었는데 이는 1900년대 초반인 1903년, 러시아와 일본 간 화친을 위하여 하보마이와 시코탄, 남사할린을 러시아 제국에 무조건 양보하면서 국경 분쟁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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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승려들 1.jpg|350px|섬네일|가운데|일본 불교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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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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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라카미 성당 1.jpg|350px|섬네일|가운데|우라카미 성당의 모습]]
  
위 사진을 보시다시피 일본국의 영해는 남북으로 길게 분포된 형태로서 남방 제도군은 심지어 아시아도 아닌 오세아니아 대륙에 속한다. 게다가 남방 제도군의 날씨는 온대 기후대에 속한 일본 본토와는 많이 떨어져 있어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기도 하고 열대 기후를 나타나 정글이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는 등 본토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말미암아 일본국은 여러 기후대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지만 보통 대중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
[[파일:마리아_관음상_1.jpg|350px|섬네일|성모 마리아를 관음상으로 표현한 모습]]
====영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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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
일본국의 영해 면적과 배타적 경제 수역 면적은 계속 넓어지고 있다. 2013년 11월 오가사와라 제도의 남동쪽 500m 해저에서 화산이 분화하면서 새로운 섬이 생성되었는데 [[동경도]]는 이 섬을 니시노시마라 명명했다. 이로 인하여 해안 국경이 조정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국은 넓어진 니시노시마에 비례하여 70㎢의 영해를 새로 얻게 됐다.
+
일본국에서 사이비 종교(カルト, 카루토)의 발호 횟수는 적지만 암암리에 창시되고 일부 사이비 종교 단체는 정치 세력을 출범,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행복실현당'.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이비 종교로는 '옴진리교'가 있는데 도쿄에 사린 테러를 일으켰다가 [[일본국 정부 (나루히토)|일본국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조직이 와해됐지만 아직까지 조직을 분리시키며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종교가 상당히 세속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전세계적으로 보면 그다지 사이비 종교가 범국가적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지형===
+
===교통===
{{본문|일본 열도 (공동세계관)}}
+
{{본문|일본국 (나루히토)/교통}}
{{일본 열도 (공동세계관)}}
+
==행정구역==
일본국의 지형은 6852개의 섬으로 구성되는 열도의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해안선은 보통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본 국토 구성은 67%가 산림 지대로 구성되어 있고 농경지는 14%, 택지는 3%, 공업용지는 0.6%다. 한편 모든 영토가 대륙과는 떨어진 섬이기에 지상 국경을 접한 국가는 없다. 다만 해상 경계선으로는 중국, 대한민국, 러시아, 미국 등과 접경하고 있다.
+
==정치==
====평야·분지====
+
===정당===
저지대는 찾아보기 힘든게 현실이기에 일본에서의 평야는 주로 산간 지역의 분지나 곡저, 충적 평야같은 소규모 평야·분지 지대 밖에 없다. 그러나 [[간토 대평야]]나 [[간사이 대평야]]를 시작하여 [[나고야]]같이 평야 지대가 듬섬듬섬 거대한 규모로 조성된 대평야 지역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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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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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
[[파일:간토 평야.PNG|350px|섬네일|왼쪽|관동 대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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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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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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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문화==
 +
===언론===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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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
==군사==
 +
==단위==
 +
===법정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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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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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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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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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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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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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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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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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나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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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나루히토) 지역 정의}}
 
 
 
 
 
 
 
 
 
 
 
 
 
 
 
 
간토 대평야(関東大平野, かんとうへいや)는 [[일본국 관동 지방 (공동세계관)|관동 지방]]에 위치한 대평야로 약 17,000km2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강원도랑 비슷한 면적이다.] [[일본국 (공동세계관)/도도부현|일본의 도도부현]] 중 [[동경도]],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에 위치한다. 그냥 관동에 있는 도도부현은 모두 이 간토 대평야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 된다. 별로 쓰이지 않지만 별칭으로 제도 대평야(帝都大平野)가 있다.
 
  
[[파일:간사이 평야.PNG|350px|섬네일|왼쪽|관서 대평야]]
+
[[분류:일본국 (나루히토)]]
 
 
 
 
 
 
 
 
 
 
 
 
 
 
 
 
 
 
 
 
 
 
간사이 대평야(関西大平野, かんさいへいや)는 [[일본국 관서 지방 (공동세계관)|관서 지방]]에 위치하는 대평야인데 별칭으로 긴키 대평야가 있다. 간사이 대평야는 간토 대평야 다음가는 일본의 평야 지대로서 간사이 대평야 덕분에 관서 지방이 관동 지방 다음으로 가장 큰 일본 내 도시·경제권으로 성장하였다. 간사이 대평야에는 [[비와 호]]라는 대형 호수가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며 면적은 약 10,200km2으로 간토 대평야에 비해 7,000km2 정도 면적이 작다. 도도부현 가운데, [[오사카부]]와 [[교토부]], [[나라현]]에 위치한다.
 
====산지·산맥====
 
[[파일:Shirane-sanzan.jpg|320px|섬네일|왼쪽|아카이시 산맥의 구간 중 시라네3산]][[파일:오우 산맥 최고봉 이와테 산.jpg|280px|섬네일|가운데|오우 산맥의 구간 중 이와테산]]
 
 
 
전체적으로 일본 열도는 그 토대가 형성된 조산기 시기와 그 후의 변화에 따라 여러 형태를 띄고 있다. 주로 중생대에 조산 운동을 받아 그 후 평탄화되다가 현재는 고원 모양의 산지로 변화된 기타카미 산지, 주고쿠 산지, 아부쿠마 고지가 있고 중생대의 조산대에 속하며 비교적 최근 시대에 단층 운동 등으로 융기하여 가파르고 험한 산맥이 된 히다 산맥, 기소 산맥, 아카이시 산맥이 있다. 보통 이 3개의 산맥을 아울러 '일본 알프스'라 칭한다. 그리고 조산대에, 지층이 물결 모양으로 주름이 지는 구조를 비교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는 오우 산맥 등이 존재한다.
 
====하천·호수====
 
[[파일:일본 시나노강.jpg|300px|섬네일|왼쪽|시나노 강]][[파일:간사이의 비와 호.jpg|295px|섬네일|가운데|비와 호]]
 
 
 
일본국의 본토는 몇개 줄기의 화산맥이 뻗어 있기 때문에 지형의 기복이 심하고 대다수의 강은 짧으며 급류인 경우가 많다. 일본국에서 가장 긴 강인 시나노 강이 불과 367km에 불과하고 이외 강들은 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다만 규모가 엄청 큰 [[비와 호]]라는 대형 호수가 간사이 지방에 위치해 있으며 그 면적은 670km2에 이른다.
 
====화산대====
 
일본국은 세계 화산의 약 10%가 몰려 있는 지역으로 대략 200개가 넘는 화산이 일본 전역에 분포되있다. 화산의 일부는 복수의 화산들과 묶여 화산군을 형성하는데 이는 흥미로운 화산 지형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이때문에 일본에는 아름다운 화산 지형이 많이 존재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의 일부 국립공원들과 화산 공원들은 화산군을 바탕으로 하는 화산 지형을 관광 지구로 설정하거나 중심 지역으로 기획한다.
 
 
 
[[파일:후지산 사진 1.jpg|350px|섬네일|가운데|후지산]]
 
 
 
일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산은 일본하면 생각하는 그 [[후지산]]이 있다. 관동에 위치해 있는 후지산은 한국의 백두산 해발고도보다 높은 해발고도 3,776m의 '''활화산'''이며 일본에서는 신령한 영기가 깃든 '영산(靈山)'으로 꼽힌다. 야마나시현에 위치해 있다.
 
===생태===
 
===자원===
 
===기후===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태이기에(설정 작성중)
 
===재난재해===
 
일본의 단골 재난재해는 누구나 알 법한 지진인데 하필이면 환태평양 조산대에 나라가 존재하여 소규모 지진부터 7.0 이상의 대규모 지진까지 지진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한편 열대성 저기압에 의해 생성되는 태풍의 영향도 많이 받는 나라로서 제2무로토태풍이나 이세 만 태풍, 최근에 발생한 하기비스 태풍이 그 예다. 화산 분화는 최근에 들어 본토 한정으로 멈췄으나[* 모든 화산이 휴지산이 된 것이란 표현은 '''절대 아니며''' 단지 분화를 안하고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일부 섬에서는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화산열도라 불리우는 화산섬이 생성되기도 한다.
 
====지진====
 
위에서 말했듯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는 바람에 세계 화산의 10%가 죄다 일본 영토에 몰려 있다. 그리고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한 덕분에 지진이 많이 발생하여 최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이라던지 고베 대지진, 1923년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같은 대형 지진부터 강도 4.0 이하의 소규모 지진까지 활발히 일어난다.
 
====화산 분화====
 
====태풍====
 
==각주==
 
{{주석}}
 
==둘러보기==
 
{{일본국 (공동세계관)}}
 
 
 
{{일본국 (공동세계관)의 상징}}
 
[[분류:일본국 (공동세계관)]]
 

2020년 11월 1일 (일) 08:38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나루히토가 창작한 가상의 일본국 설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1공동세계관 일본의 설정은 현실과 같으되, 모리토모 사건 후 아베 신조가 실각하고 이시바 시게루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것이 분기점입니다. 이외 설정은 거의 같습니다.

 

Flag of Japan.svg
일본국
日本国
State of Japan
국기국장국가국화국조
사회문화종교국어민족
정치행정정당천황도도부현
경제산업기업무역통화
자연환경역사국군연호과학기술

 

대일본국
大日本国
Flag of Japan.svgImperial Seal of Japan.svg
국기국장
우리 시대의 평화와 화합
我等の時代の平和と和合
상징
국기일장기
국장국화문
국가기미가요
국화벚꽃
국조일본꿩
지리
면적719,155㎢
수도도쿄도
최대도시도쿄도
행정구역도도부현
인문환경
인구총인구250,817,853명(2019)
지역인구·일본 열도 142,136,597명
·조선 반도 87,350,609명
·대만도 20,727,511명
·남양 제도 603,136명
인구밀도349명/km²(2019)
민족구성일본인 97.5%
중국인 0.9%
기타 1.6%
출산률1.8명(2019)
공용어일본어
공용 문자가나·신자체
종교국교 없음
신토 14%
불교 26.9%
가톨릭 9.4%
기타 및 무종교 49.7%
군대일본국 국군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국가요인천황나루히토
내각총리대신이시바 시게루
참의원 의장히라노 히로후미
중의원 의장가네다 가쓰토시
대심원장나카니시 간
여당입헌정우회
경제
경제 체제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전체 GDP$10,368,810,043,020(2019년)
1인당 GDP$41,340(2019년)
GDP(PPP)전체 GDP$11,306,617,995,387(2019년)
1인당 GDP$45,079(2019년)
화폐공식화폐일본국 엔 ¥
ISO 4217JPY
역사
701년일본으로 국호 개칭
1900년일본국 헌법 제정
1912년다이쇼 시대 개막
1926년쇼와 시대 개막
1989년헤이세이 시대 개막
2019년레이와 시대 개막
단위
법정연호레이와
시간대일본국 표준시
도량형SI 단위
ccTLD
.jp
국제 전화 코드
+81
국가코드
392, JPN, JP

개요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한문: 日本國, 영어: State of Japan)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위치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제, 단방제 국가이다.

상징

Flag of Japan.svg
일본국의 상징
日本国の象徴
Symbol of Japan
Flag of Japan.svg일장기
日の丸 ひのまる
Imperial Seal of Japan.svg국화문
十六葉八重表菊文
Kimigayo.score.png기미가요
きみがよ
Prunus × yedoensis-1.jpg벚꽃
さくら
Phasianus versicolor versicolor -1.jpg일본꿩
日本の雉

국호

언어 해당언어명칭
일본어 日本(にほん, にっぽん)
한국어 일본
영어 Japan
프랑스어 Japon
독일어 Japan
러시아어 Япония
중국어 간체&번체 日本
베트남어 Nhật Bản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 전형인 신자체로 국호를 표기하면 日本国(일본국)이며 한자 번체로는 日本國(일본국), 한자 간체로는 日本国(일본국)으로 영어로는 Japan(저팬)으로 표기한다. '일본'의 일본어 독음은 니혼(にほん, Nihon) 혹은 닛폰(にっぽん, Nippon)인데 영어 독음은 저팬(japan)이다.

국기

틀:일본국 (나루히토)/국기

일장기(日章旗)

일본국의 공식 국기는 일장기(日章旗),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다. 일본어로는 일장기를 '닛쇼-키(にっしょうき)'라 읽지만 일본인 대다수는 '히노마루(日の丸 ひのまる)'라 읽는다. 여기서 히노마루는 일장기를 뜻하기도 하고 일본이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독자적인 무언가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장

틀:일본국 (나루히토)/국장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일본국의 관습상 국장은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국화문(菊花文)이다. 명칭이 다양한데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文, 쥬-로쿠요-하치쥬-효-키쿠)과 십육일중표국문(十六一重表菊文, 쥬-로쿠이치쥬-효-키쿠), 국화문(菊花文, 키쿠카) 등이 있다. 여기서 국화문은 말 그대로 이 문장에 쓰인 꽃이 국화(菊花)라서 쓰이는 이름이며, 십육엽팔중표국문의 뜻은 '16개의 잎, 8개의 겹을 가진 국화문'이다. 십육일중표국문은 '16개 홑겹을 가진 국화문'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국화문이라는 호칭이 널리 사용된다.

국가

틀:일본국 (나루히토)/국가

일본국의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 きみがよ)이다.

국화

틀:일본국 (나루히토)/국화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ソメイヨシノ)

일본국의 국화는 벚꽃(桜, 사쿠라)이다.

국조

틀:일본국 (나루히토)/국조

일본꿩(日本の雉, 日本のキジ)

일본국의 국조는 일본꿩(日本の雉)이다.

역사

틀:일본국 (나루히토)/역사

근대 이전

익한정부 시대

1900년대

1910년대

1920년대 초기

문민정부 시대

1920년대 중후기

1930년대

1940년대 초중기

국민정부 시대

쇼와 시대

1940년대 후기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헤이세이 시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초기

레이와 시대

2010년대 중후기

2020년대

자연환경

인문환경

인구

언어

일본국의 국어(國語)는 '가나(仮名)'라는 국문(國文)으로 기록되는 일본어이며 일본인 절대다수가 국어로써 혹은 생활에 용이함을 위하여 사용 중에 있고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 국적의 일본인도 대개는 사용한다. 일본인은 따라서 일본어를 통용한다. 아이누어나 산칸어 등 지역어가 존재하고 일본어 자체의 방언도 다양하다. 한편 글로벌 언어로 정착한 영어에 관하여 일본국 정부는 정규 교육 과정에 영어 교육을 의무화시키는 등 영어 교육을 보편화시켰다. 이외에 제2외국어로는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라틴어 등이 인기가 많다.

종교

일본국은 일본국 헌법에 의거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정교(政敎)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다.

신토

신토는 뚜렷한 종교라는 특성이 없어서 다른 종교와 섞이기도 하였는데 복수종교라는 일본인의 종교 문화와 연계되면서 불교와의 융합인 신불습합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후기에는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현재에 이르러 중앙집권화에 성공, 정식적인 종교화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종교성이 별로 없어 강한 정체성과 체계적인 조직이 전무했던 신토는 19세기에 접어든 후, 이세신궁의 신관이었던 '아이야 도이치(会谷 盗一)'가 서양의 천주교를 보면서 신토 또한 천주교처럼 조직화되어 '종교(宗敎)'의 모습을 갖출 것을 주장하게 되고 이의 일환으로 여러 지역에 분권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들을 신궁의 예하로 통합시키는 신토통합운동(神道統合運動)을 전개한다. 한편 '우부야시키 나츠히코(産屋敷 夏彦)'라는 또다른 신관은 천주교의 교황청을 모방하여 모든 신사들을 통할하는 기구의 설립을 이세신궁에 청원하는 교무부설립청원운동(敎務府設立請願運動)을 일으킨다. 또한 신토는 신불습합와해운동(神佛習合瓦解運動)을 통해 신토의 중앙집권화를 사사건건 방해하던 불교와 연을 끊으려 기도한다. 이후 세 운동 모두 목적을 달성하였고 1879년에 교무부가 설치되며 1881년에는 대부분의 지방 신사들이 해당 지방의 신궁에 관리를 받기 시작한다. 이로서 교무부가 신궁을 통할하고 신궁이 신사를 통할하는 조직적 구조의 틀이 정립된다. 허나 이러한 중앙집권화 운동은 일부 지방 신사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 하였고 이렇게 개혁에 불응한 신사들을 '불응신기(不應神祇)'라 한다. 아이야 신관을 위시한 협상파는 불응신기도 포용하여 개혁에 동참시키는 온건적인 노선을 지향했지만 우부야시키 신관을 위시하는 '신궁회(神宮会)'는 협상파의 포용 노선을 지양하고 개혁에 협조하지 않는 불응신기는 불가역적으로 배제, 순응한 신사들로만 개신을 추진해야 한다 주장하면서 대립각을 세운다. 이윽고 신궁회가 양보하면서 불응신기와의 협상에 들어가 현재까지 대부분의 지방 신사가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지만 일부 신사는 아직도 불응신기로 남아 있다. 한편 앞서 말한 두 운동으로 천주교처럼 신토를 종교로 가꾸어 나가기 시작한 신궁회와 '창경회(彰炅会)'는[1] 훗날 신토의 양대 파벌이 되버린다. 20세기 초반이 되어 신토는 천주교처럼 교무부를 정점으로 하는 완연한 중앙집권적 지배 구조와 아마테라스오오카미를 중심으로 교리를 개편하게 된다. 이로서 신토는 여타 다른 종교들처럼 종교의 색을 갖추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신토의 파벌 정계는 190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는 창경회가 우세를 점했지만 이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낙수론 계열인 신궁회가 우세를 점한 상태이며 기존 이세신궁파와 새로 등장한 헤이안신궁파가 연고지를 기반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불교

도다이지 대불전
호류지
일본 불교의 승려들

기독교

우라카미 성당의 모습
성모 마리아를 관음상으로 표현한 모습

사이비 종교

일본국에서 사이비 종교(カルト, 카루토)의 발호 횟수는 적지만 암암리에 창시되고 일부 사이비 종교 단체는 정치 세력을 출범,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행복실현당'.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이비 종교로는 '옴진리교'가 있는데 도쿄에 사린 테러를 일으켰다가 일본국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조직이 와해됐지만 아직까지 조직을 분리시키며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종교가 상당히 세속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전세계적으로 보면 그다지 사이비 종교가 범국가적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교통

행정구역

정치

정당

행정

국제관계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언론

교육

관광

군사

단위

법정 연호

시간대

관련 문서

각주

  1. 협상파가 표면 위로 올라오면서 창설한 조직이다.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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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日本国
State of Japan
국기국장국가국화국조
사회문화종교국어민족
정치행정정당천황도도부현
경제산업기업무역통화
자연환경역사국군연호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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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상징
日本国の象徴
Symbol of Japan
Flag of Japan.svg일장기
日の丸 ひのまる
Imperial Seal of Japan.svg국화문
十六葉八重表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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きみがよ
Prunus × yedoensis-1.jpg벚꽃
さくら
Phasianus versicolor versicolor -1.jpg일본꿩
日本の雉

 
틀:일본의 역사 (나루히토)
 

Flag of Japan.svg
일본국의 영토
日本国の領土
Territory of Japan
일본 열도삼한 반도대만도남양 제도
지시마
열도
난세이 제도일본본도남방제도군가라후토조선
본도
사이슈토아사토지마
도군
대만본도호코
제도
니사쿠라
제도
유코
제도
레이사
제도
류큐
제도
사츠난
제도
다이토
제도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시나미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