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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침입한 이교도들에게 접수된 브리튼 사람들의 나라는 색슨인들의 나라인 [[에섹스]],[[웨섹스]],[[서섹스]]와 주트의 나라인 [[켄트]],앵글스의 나라인 [[이스트 앵글리아]],[[머시아]],[[노썸브리아]] 등의 7왕국으로 발전하였다.로마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597년에 성 어거스틴을 파견하여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는 사라지고,잉글랜드 문화는 중세초기에 유럽대륙을 지도할 정도로 발전했다.669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캔터베리 대주교]] 데어도어는 교회행정을 재조직하고 그레코로만 문명을 수입하여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던 7왕국을 통일국가 잉글랜드로 만들고 영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대륙에서 침입한 이교도들에게 접수된 브리튼 사람들의 나라는 색슨인들의 나라인 [[에섹스]],[[웨섹스]],[[서섹스]]와 주트의 나라인 [[켄트]],앵글스의 나라인 [[이스트 앵글리아]],[[머시아]],[[노썸브리아]] 등의 7왕국으로 발전하였다.로마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597년에 성 어거스틴을 파견하여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는 사라지고,잉글랜드 문화는 중세초기에 유럽대륙을 지도할 정도로 발전했다.669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캔터베리 대주교]] 데어도어는 교회행정을 재조직하고 그레코로만 문명을 수입하여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던 7왕국을 통일국가 잉글랜드로 만들고 영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
이러한 발전의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다.끊임없는 민족이동은 새로운 정복과 피정복의 반복을 가져왔으므로,잉글랜드는 내부의 질서회복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아일랜드의 민족인 스코트족은 스코틀랜드로 갔고,데인족은 브래타니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켰다.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남기면서 국토 통일과 문화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시에도 데인족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해왔고,알프레드 대왕의 자손들이 브래타니아 통일을 이룩하자 데인족들은 프랑스 영토로 몰려가 911년에는 노르만디 공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노르만디 공국을 세운 데인족은 잉글랜드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을 1066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 |||
==잉글랜드의 형성== |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제국 군대가 잉글랜드에서 물러간 이후 약 5세기 동안 수많은 민족이동이 일어나 브리튼은 잉글랜드로 되어갔으며,근대국가의 모습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유럽에서도 이때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1066년의 노르만인들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느느 비록 봉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중앙집권화되어 갔으며,의회제도와 내각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성직자,제후,지방호족들이 모인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구성하였으며,이들의 일부가 어전회의를 구성하였다.노르만인 정복자들의 왕인 [[윌리엄 1세]]는 1066년부터 108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하였으며 납세와 행정을 위하여 토지대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 |||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은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불어와 고딕예술과 대학의 수입은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 떄에는 노르만디 공국의 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대륙은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후에 [[헨리 2세]](1154~1189)가 플랜타지넷 왕조를 열었다.그는 상속과 결혼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하여,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이 그의 통치 하에 놓였다.이는 잉글랜드와 대륙이 문화적,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지만,훗날의 영토분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 |||
잉글랜드의 건설은 [[윌리엄 1세]]가 주춧돌을 놓았다면,[[헨리 2세]]가 기둥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그는 민병제도를 강화하여 왕의 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왕의 법률을 실시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법관들로 구성된 중앙법원의 지휘 하에,순회재판과 배심제도에 의한 공평한 재판을 실시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반 국민들은 왕권 확립에 찬성하여 중앙집권이 빠르게 진전되었다.1128년 프랑스의 씨또 수도원이 들어와 습지를 개간하고 수도시설을 설치하며,각종 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농사방법을 개향하여 가축을 기르고 특히 양모 생산을 증대시켰다. | |||
[[헨리 2세]]의 뒤를 [[사자심 리차드]]가 이었다.그는 프랑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느라 국내정치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리차드의 부재중에 왕위를 찬탈한 존은 노르만디 및 프랑스 내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1204)[[대헌장]]을 승인하였다.(1215).노르만디를 상실함으로써 노르만인들과 색슨인의 구별이 없어지고,진정한 잉글랜드인(Englishman)이 형성되게 되었다.또한 "대헌장"은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국회로 변경시킨 원동력이 되어 입헌정치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 |||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잉글랜드를 완성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브리튼 후손들의 거주지인 웨일스를 정복하였고,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의 통치기간 중에 양모산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확장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져,잉글랜드 역사의 새 단계가 열리게 되었다.그는 왕의 법률을 확립하기 위하여 법원의 권한을 셋으로 나누어 형법은 고등법원이 세금과 국고수입에 관한 법은 재무재판소가,민사관계 법은 민사소송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하였다.이로써 잉글랜드에는 로마법이 사라지고 관습법이 완되는 계기가 되었다. | |||
[[에드워드 3세]]는 1337년에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은 프랑스 지역인 버건디 공국(현재의 플랑드르 지방)의 귀속문제에 대한 다툼으로 영국의 [[흑태자]],프랑스의 [[잔다르크]] 등의 활약으로 봉건기사의 몰락과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장기간의 전쟁터였던 프랑스의 피해도 컸지만,이 떄 유행한 [[흑사병]](1349)은 잉글랜드의 인구를 400만에서 250만으로 줄어들게 하여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가져왔다.전쟁으로 인한 호경기와 평민보병부대가 귀족기사단과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에서 나타난 평민세력의 강력함 등은 15세기 잉글랜드의 산업,경제,문화,정치 등의 모든 면에 변화를 일으켜 중세문화가 근세문화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장미전쟁]](1445-1485)은 잉글랜드에서 기사가 완전히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 |||
[[웨일스]]의 리치몬드 백작 [[헨리 7세]]가 1485년 [[튜더 왕조]]를 시작함으로써 장미전쟁이 끝난 것은 잉글랜드로써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었고,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바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였고,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였다.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평민세력이 등장하여 왕권이 강화되며,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는 시기에 잉글랜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앞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잉글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다 유리했던 점은 지리적인 면에 있어서 섬나라라는 특성 떄문이다.잉글랜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며,특히 의회정치의 잘전은 왕권과 시민권의 연합을 긴밀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잉글랜드에서는 도시사람들의 시대인 근세의 주인공인 부르주아의 세력이 크게 발전하였고,이로써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확고하게 마련되었다. | |||
==중세== |
2019년 3월 16일 (토) 21:35 판
잉글랜드의 배경
잉글랜드 땅을 형성하는 섬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브레타니아라고 남긴 것이 처음이고,기원전 2세기에 폴리비어스가 브레타니아를 주석이 나는 섬으로 묘사한 것이 그 다음이다.기원전 55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전기'에서 잉글랜드 땅과 사람에 관해 기록한 것이 최초의 완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브리태니아와 켈트인인 브리튼 사람에 관한 것이지 잉글랜드와 앵글로색슨에 관한 것은 아니다.켈트인은 브리태니아에 살던 원주민들로,오늘날 북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는 게일인들과 웨일스에 남아 있는 웨일스인 등의 조상이다.
줄리어스 시저 이후 오백 년 동안 브리태니아에서는 로마의 역사가 벌어졌고,런던을 중심으로 로마의 길이 사방으로 뻗었고,온천장인 배쓰가 로마계 브리티쉬의 중심지가 되었다.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셉티머스 세베루스 황제 등의 원정으로 스코틀랜드에 하드리안 월이라는 역사적 유물이 만들어지고,이 이남지역은 완전히 로마화되었다.남부지역에 여러 도시가ㅣ 생겨났으나 북쪽에는 아일랜드 해적과 픽트족의 침입이 잦았다.북쪽의 침입자들과 색슨인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5세기 중반에 로마군이 철수하고 이 섬은 대륙에서 건너온 주트,앵글스,색슨스의 차지가 되었다.6세기 초에는 앵글로색슨의 7왕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1066년에 데인족(지금의 덴마크인)들과 노르만 민족(지금의 노르만 민족과 프랑스 민족)이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거주함으로써 민족 구성의 기반과 문화에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역사는 튜튼족(지금의 독일,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민족)민족 이동이 한 축을 이루면서도 네덜란드나 독일의 역사와 구별된다.섬나라 잉글랜드는 유럽대륙과 불과 30여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유럽대륙과 다른 문화를 이루는 주된 원인이 된다.잉글랜드에는 주석이나 철,구리,아연 등과 같은 광물과 특히 석탄이 풍부했다.또한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목장의 육류와 곡물 생산은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에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했다.
잉글랜드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유럽대륙의 지역에서는 겨울의 기온이 영하 30~40도로 내려갔지만,이 섬나라를 둘러싸고 흐르는 대서양만류는 이 나라의 겨울을 그다지 춥지 않도록 유지시켜 주었다.섬나라로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대륙의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배양할 수 있었다.
기원전 55년부터 450년경까지 오백 년 간 유지된 로마의 지배는 영국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했고,잘 닦인 길을 남겨놓았다.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했으므로 그 생명이 유구한 것이고,이때 만들어진 길은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432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성자 패트릭을 파견하였고,이후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장기간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대륙에서 침입한 이교도들에게 접수된 브리튼 사람들의 나라는 색슨인들의 나라인 에섹스,웨섹스,서섹스와 주트의 나라인 켄트,앵글스의 나라인 이스트 앵글리아,머시아,노썸브리아 등의 7왕국으로 발전하였다.로마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597년에 성 어거스틴을 파견하여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는 사라지고,잉글랜드 문화는 중세초기에 유럽대륙을 지도할 정도로 발전했다.669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캔터베리 대주교 데어도어는 교회행정을 재조직하고 그레코로만 문명을 수입하여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던 7왕국을 통일국가 잉글랜드로 만들고 영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발전의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다.끊임없는 민족이동은 새로운 정복과 피정복의 반복을 가져왔으므로,잉글랜드는 내부의 질서회복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아일랜드의 민족인 스코트족은 스코틀랜드로 갔고,데인족은 브래타니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켰다.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남기면서 국토 통일과 문화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시에도 데인족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해왔고,알프레드 대왕의 자손들이 브래타니아 통일을 이룩하자 데인족들은 프랑스 영토로 몰려가 911년에는 노르만디 공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노르만디 공국을 세운 데인족은 잉글랜드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을 1066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잉글랜드의 형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제국 군대가 잉글랜드에서 물러간 이후 약 5세기 동안 수많은 민족이동이 일어나 브리튼은 잉글랜드로 되어갔으며,근대국가의 모습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유럽에서도 이때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1066년의 노르만인들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느느 비록 봉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중앙집권화되어 갔으며,의회제도와 내각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성직자,제후,지방호족들이 모인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구성하였으며,이들의 일부가 어전회의를 구성하였다.노르만인 정복자들의 왕인 윌리엄 1세는 1066년부터 108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하였으며 납세와 행정을 위하여 토지대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은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불어와 고딕예술과 대학의 수입은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 떄에는 노르만디 공국의 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대륙은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후에 헨리 2세(1154~1189)가 플랜타지넷 왕조를 열었다.그는 상속과 결혼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하여,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이 그의 통치 하에 놓였다.이는 잉글랜드와 대륙이 문화적,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지만,훗날의 영토분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건설은 윌리엄 1세가 주춧돌을 놓았다면,헨리 2세가 기둥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그는 민병제도를 강화하여 왕의 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왕의 법률을 실시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법관들로 구성된 중앙법원의 지휘 하에,순회재판과 배심제도에 의한 공평한 재판을 실시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반 국민들은 왕권 확립에 찬성하여 중앙집권이 빠르게 진전되었다.1128년 프랑스의 씨또 수도원이 들어와 습지를 개간하고 수도시설을 설치하며,각종 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농사방법을 개향하여 가축을 기르고 특히 양모 생산을 증대시켰다.
헨리 2세의 뒤를 사자심 리차드가 이었다.그는 프랑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제 3차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느라 국내정치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리차드의 부재중에 왕위를 찬탈한 존은 노르만디 및 프랑스 내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1204)대헌장을 승인하였다.(1215).노르만디를 상실함으로써 노르만인들과 색슨인의 구별이 없어지고,진정한 잉글랜드인(Englishman)이 형성되게 되었다.또한 "대헌장"은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국회로 변경시킨 원동력이 되어 입헌정치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잉글랜드를 완성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브리튼 후손들의 거주지인 웨일스를 정복하였고,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의 통치기간 중에 양모산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확장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져,잉글랜드 역사의 새 단계가 열리게 되었다.그는 왕의 법률을 확립하기 위하여 법원의 권한을 셋으로 나누어 형법은 고등법원이 세금과 국고수입에 관한 법은 재무재판소가,민사관계 법은 민사소송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하였다.이로써 잉글랜드에는 로마법이 사라지고 관습법이 완되는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1337년에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은 프랑스 지역인 버건디 공국(현재의 플랑드르 지방)의 귀속문제에 대한 다툼으로 영국의 흑태자,프랑스의 잔다르크 등의 활약으로 봉건기사의 몰락과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장기간의 전쟁터였던 프랑스의 피해도 컸지만,이 떄 유행한 흑사병(1349)은 잉글랜드의 인구를 400만에서 250만으로 줄어들게 하여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가져왔다.전쟁으로 인한 호경기와 평민보병부대가 귀족기사단과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에서 나타난 평민세력의 강력함 등은 15세기 잉글랜드의 산업,경제,문화,정치 등의 모든 면에 변화를 일으켜 중세문화가 근세문화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장미전쟁(1445-1485)은 잉글랜드에서 기사가 완전히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일스의 리치몬드 백작 헨리 7세가 1485년 튜더 왕조를 시작함으로써 장미전쟁이 끝난 것은 잉글랜드로써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었고,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바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였고,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였다.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평민세력이 등장하여 왕권이 강화되며,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는 시기에 잉글랜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앞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잉글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다 유리했던 점은 지리적인 면에 있어서 섬나라라는 특성 떄문이다.잉글랜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며,특히 의회정치의 잘전은 왕권과 시민권의 연합을 긴밀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잉글랜드에서는 도시사람들의 시대인 근세의 주인공인 부르주아의 세력이 크게 발전하였고,이로써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확고하게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