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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휘는 '''제(濟)'''이다.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휘는 '''제(濟)'''이다.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휘빈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부왕처럼 백성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으며 부왕과 성격이 매우 닮았으며 공로도 커 백성들이 역사상 가장 휼륭한 성군이라 칭하였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끝에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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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인종|인종]]과 [[휘빈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부왕처럼 백성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으며 부왕과 성격이 매우 닮았으며 공로도 커 백성들이 역사상 가장 휼륭한 성군이라 칭하였다. 또한 2022년 마지막 태생 왕족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끝에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이며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뽑힌다.
  
 
==[[파일:현재2.png|width=30]] '''즉위전 생애'''==
 
==[[파일:현재2.png|width=30]] '''즉위전 생애'''==
  
2022년 11월 8일, [[대조선국 태조|태조]][[현빈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27일간 왕세손으로 있다가 증조부 [[환종]]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아버지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12월 11일 조선의 왕세자로 공식 책봉되었다. 이후 12월 17일에 광주 이씨의 [[휘빈이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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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7일, [[대조선국 인종|인종]][[휘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언행이 좋지 않았다.  
  
{{인용문| '''세자 저하께서 몸이 편찮아지셨으며 고열(高燒)이 나셨다. 세자 저하께선 동궁전 자선당 침전에 저녁부터 누우셨으며 병상이 악화(惡化)되고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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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원손마마께서 새벽에 디코 노래방에서 내관인 청설모와 욕배틀을 했다는 증좌들이 고변을 하였으며 내금위를 동궁전(東宮殿)에 배치해야한다는 상소문(上疏文)도 올라왔다. 청내관의 체벌에 대해선 내외명부 수장을 대리(代理) 중이시던 빈궁마마께서 청내관을 존현각에 불러 경고(警告)로 끝내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인용문| '''세자 저하께서 오후 4시 40분 진찰을 하였는데 고열(高燒)이 지속되고 정신이 혼미하시고 기침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이목구비에 출혈이 반복되어 주상전하께서 내의원(內醫院)을 만드셨으며 혜민원 어의가 겸직하게 하셨다. 초대 어의인 정어의가 밤에 급히 도착하여 세자저하에 몸을 진찰(診察)하고 탕약(湯藥)을 올렸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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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미천한 소손을 아끼시는 전하의 어심에 감사함이 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동궁전(東宮殿)에 외지인이 들어올 일이 없으며 저에게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청내관의 일 역시 품고 넘어가고자 하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 역시 없게 하겠사오니 전하께서도 소손의 뜻을 이해하여주시어 내금위의 배치까지는 거두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심지어 자칫하면 이 일이 궁궐 밖으로 퍼질 수 있사온데 이미 중전마마와 관련된 일로 국가의 혼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더 퍼져서야 되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인용문| '''세자저하께서 병상이 회복(回復)되고 있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回復)되진 않았다. '''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
 
  
인종은 '''왕세자일 때부터 많은 병'''을 겪고 있었으며 아픈일이 많아 세자시강원을 빼먹는 일도 많았다. 세자빈이던 [[현빈심씨]]가 세자를 잘 간호하였다고 전해져내려온다. 내의원이 동궁전에 설치된 만큼 어의가 세자의 거처인 자선당으로 가는일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다 12월 27일, 아들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얻게된다. 아들을 얻은 세자는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하지만 세자빈 [[휘빈이씨]]가 당시 주상이던 아버지 [[대조선국 태조|태조]]와 왕후 [[신덕왕후]]와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으며, [[신덕왕후]]가 화난 채로 자선당에 찾아와 [[휘빈이씨]]의 종아리를 칠려하자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대조선국 성종|성종]]이 말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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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자신을 모시는 내관과 함께 욕배틀을 하며 백성들 앞에서 차마 말할수 없는 심한 언행들을 벌였는데, 그걸 여러명이 고변하였다. 자식손주를 '''완벽한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대조선국 태조|태조]] 입장에선 '''걸림돌'''이 될수 밖에 없었으며 세자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에게도 안 시킨 여러 시험을 원손인 성종에게 치루게 하였다.
  
결국 부인 [[휘빈이씨]]가 1월 5일 세자빈 지위에서 폐위되고 병이 걸려 사망한다. 1월 7일 문경 서씨의 [[정안왕후]]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정안왕후]]는 왕실 적응이 어려워 '''각종 정신 질환'''을 겪었기 때문에 인종은 탐탁치 않아하였다. 이후 2월 1일부터 2월 5일까지 대리청정을 하며 '''텍사스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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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 고변 사건이 터지고 바로 다음날, [[대조선국 태조|태조]]는 [[신덕왕후]]와 세자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을 경회루에 불러 세자빈 [[휘빈이씨]]와 원손 성종의 언행에 대해 대책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사실상 세자빈은 조용한편에 속했지만 원손의 언행으로 인해 모친 [[휘빈이씨]]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유폐상태던 [[신덕왕후]]가 [[대조선국 태조|태조]]의 지원으로 많은 권력을 얻게 된다. 그러다 결국 1월 5일 어머니 [[휘빈이씨]]가 세자빈에서 폐위되고 사망한다. 어머니로 [[정안왕후]]를 맞이한 원손은 어머니처럼 잘 대해주었다.
  
2월 10일에는 지밀상궁 백씨가 인종의 승은을 입어 세자후궁이 되었으며 그녀는 훗날 [[현덕왕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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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새벽 1시 10분 원손마마께서 삼정승(三政丞)의 심사하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입학례(入學禮)를 치루다. 점수 영의정이 통을 주어 90점대였으나 우의정이 약을 주며 60점을 맞으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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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태조|태조]]의 감독하에 삼정승들이 여러 시험지를 주었다. 원손이던 성종의 답변을 보고 영의정이 통을 주었으나 당시 우의정이던 김간춘이 약을 주며 '''점수가 매우 떨어졌다.''' 훗날 성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에게 약을 준 김간춘을 싫어하였다고 전해져내려온다. 결국 극적으로 왕세손으로 책봉된 성종은 1월 17일 한양 토씨의 [[원경왕후]]를 세손빈으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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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증조부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승하하고, 곧 바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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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세자저하께서 강녕전(康寧殿) 職務실을 실수(失手)로 들어가 박상궁이 이에 경고(警告)하자, 세자저하께서 이리 말하셨다. '''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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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어차피 미래에 내자리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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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그러자 박상궁이 말하기를, 실록(實錄)에 실여야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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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그러자 세자저하께서 말하시길, 안됩니다. 실록(實錄)에는 쓰지마세요 라고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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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태조|태조]]의 국상이 한참 치루어질때 태조의 빈전을 앞에 두고 강녕전에 들어간다던지, 미래 자신의 자리라고 말하며 권력욕이 많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상의 마지막 날 태조의 대관이 왕릉에 묻히던 의식이 있었는데 이때 세자가 자며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자는 경복궁 영제교에서 [[대조선국 인종|인종]]이 있는 근정전을 향해 비를 맞으며 15분 넘게 '''석고대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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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아!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감히 조상(祖上)과 선왕(先王)을 모심에 누를 끼치었으니 이 어찌 큰 불효(不孝)가 아니겠는가, 선왕(先王)과 선조(先祖)들께서는 이 후손(後孫)의 죄를 보시어 꾸짖어주소서, 那羅의 기틀과 廟社를 망치었으니 이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삼가 죄를 청하나이다, 본디 선왕(先王)께서 나라(那羅)를 여시어 구시대(舊時代)의 악을 滅하시고 나라(那羅)를 평안(平安)케 하신바. 후인(後人) 된 자로서 그 유지(維持)를 거슬렸으니 죄가 크옵니다. 선조(先祖)들께 죄를 고하나니 일신우일신하게 하시어 죄를 고치게 하시고 의무(義務)를 다하게 하여 주소서.'''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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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는지 석고대죄가 끝난 직후 종묘를 찾아 저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2월 20일에는 아들 이호를 얻었으며 2월 23일에는 새어머니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겪다가 결국 훙서하고, 세번째 어머니 [[현덕왕후]]를 맞이하였다. 효심을 다해 [[현덕왕후]]에게도 잘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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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세자빈이던 [[원경왕후]]와 결혼 50일 기념일인 금혼식을 맞이하였는데 맞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일 오후 10시에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이 향년 72세로 갑작스럽게 훙서한다.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2월 10일, 아버지 [[대조선국 태조|태조]]훙서하며 '''조선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인종은 부친의 상을 치루고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 운영부의 실수로 마인크래프트 서버가 날라가며 '''컨텐츠 기반이 붕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2월 23일에 부인 [[정안왕후]]의 정신질환이 심해질대로 심해지며 [[정안왕후]]가 '''궁인들을 폭행하고 환각'''을 보는 일 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왕대비던 [[신덕왕후]]의 조언으로 인종은 [[정안왕후]]를 교태전에 유폐시켰다. 결국 [[정안왕후]]는 유폐된 교태전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훙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정안왕후]]의 훙서를 기뻐한 듯하다. 왕후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여 '''왕실에 있어서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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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아버지 [[대조선국 인종|인종]]훙서하며 45세의 나이로 '''조선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은 백성들에게 죽을 때 까지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실제로 죽을 때까지 헌신을 다하고 공식 일정을 모두 소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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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손과 세자 시절에 삐둘어지긴 했으나 왕위에 오른 이후 그 누구보다 '''성군, 제왕'''이라 칭할 정도로 열심히 국정을 운영하였다. 성종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는 개학 시즌으로 인하여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였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책을 수립하고 조선의 존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4~6월 초에 조선이 다시 일어서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조선이 존립을 유지할 수 없었으나 발전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때 문화사업이 모두 날아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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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에 왕대비던 [[현덕왕후]]를, 4월 19일에 부인 [[원경왕후]]를, 4월 20일에 대왕대비 [[신덕왕후]]를 연이어 보냈으며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6월 17일에는 재위 100일 기념일인 백금경축을 맞이하였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그 결과 장남 1명, 손녀 1명, 증손주 2명, 며느리, 손주며느리, 증손주며느리까지 보았다. 너무 긴 재위기간으로 인해 왕세자 이호의 불만이 '''매우 컸다고 한다.''' 6월 말 부터 지팡이의 도움없이 걷지 못했으며 건강이 안 좋아졌다.
  
상이 다 치루어지지도 않은 바로 다음날인 24일, 숙원 품계를 달고 있던 승은후궁 [[현덕왕후]]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얼마안가 3월 10일, 오후 10시에 강녕전에서 향년 72세로 훙서하였다. 이틀간 국상이 진행되었으며 묘호는 자비와 너그러움을 베푼 군주라는 의미로 '''인종(仁宗)'''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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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7월 1일, 폐비 김씨를 [[신의왕후]], 폐빈 이씨를 [[휘빈이씨]]로 복권시키고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파일:현재2.png|width=30]]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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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ordercolor=#972000; width=600px; table align=center><#972000><:> {{{#ffffff '''자녀'''}}} ||<#972000><:> {{{#ffffff '''이름'''}}} ||<#972000><:> {{{#ffffff '''출생'''}}} ||<#972000><:> {{{#ffffff '''배우자/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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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6FFFF> 1남 ||<#E6FFFF> [[대조선국 성종|성종]] ||<#E6FFFF> 2022년 12월 27일 ||<#E6FFFF> [[원경왕후]] <br> 주상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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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6FFFF> 1남 ||<#E6FFFF> 주상 이호 ||<#E6FFFF> 2023년 2월 10일 ||<#E6FFFF> 왕후 송씨 <br> 정순 공주, 세자 이행, 경원대군 ||
  
 
==[[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파일:현재2.png|width=30]] '''평가'''==
  
・학구열 : 공부나 학업에는 관심이 아주 적었다고 하였으나, '''천문학과 우주사는 아주 총명'''하였다고 한다. 세자던 시절 경복궁 후원에 천문학과 관련된 여러 기계를 설치하고 직접 관측하기도 하였으며 밤을 새서 별의 이동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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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세손과 세자 시절에 아주 열정적'''이였다고 한다. 점수는 낮게 나온적이 많으나 학업에 관심이 많았다.
  
・성품 : 감정적일때도 있고 이성적일때도 있으며, 늘 백성들의 수준에 맞출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많은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재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채 인종이 훙서하자 많은 백성이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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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 : 감정적일때도 있고 이성적일때도 있으며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호감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많은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치적 : 재위기간이 짧아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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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 재위기간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고 정치, 경제, 외교 등 다양한 부분에 있어서 발전하긴보단 쇠퇴하지 않게 현상 유지시킬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조선의 존립을 크게 유지'''할 수 있었다.
  
・외모 : 피부색이 매우 밝았다고 하며 눈 또한 크고 이뻐 당시 시대에서 미남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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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 피부색이 매우 밝았다고 하며 눈 또한 크고 이뻤다. 부친 [[대조선국 인종|인종]]의 유전자인 듯하다.
  
・가정사 : 세명의 부인중 첫째 부인인 [[휘빈이씨]]는 폐위당하고, 둘째 부인인 [[정안왕후]]는 정신병으로 사망했으며, 셋째 부인인 [[현덕왕후]]와는 말 한번 거의 안 섞어본 사이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내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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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 : 조선 국왕중 최초로 왕비를 1명 두었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이끌었다.

2023년 7월 25일 (화) 23:37 판

조선왕조.png
대조선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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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태조
제2대
인종
제3대
성종
제4대
명종
제5대
문종
제6대
영조
제7대
헌종
제8대
시호 미정
조선 제3대 국왕
성종 | 成宗
성종어진.png
출생2022년 12월 27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자선당
즉위2023년 3월 10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근정전
사망2023년 7월 1일 (향년 109세)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강녕전
헌릉(獻陵)
재위기간2023년 3월 10일 ~ 2023년 7월 1일 (114일)
본관전주 이씨
제(濟)
부모부왕 인종, 모후 휘빈이씨
형제자매없음
배우자원경왕후
자녀장남 이호
종교유교
신장183cm
묘호성종(成宗)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시대는 안 좋았지만 국가의 모든 부분을 성장시킬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셨으며 성과 또한 많았다. 그래서 그 공로를 보아 묘호는 성종이 가장 좋다.
—  2023년 7월 2일, 성종의 묘호가 확정될 때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휘는 제(濟)이다.

인종휘빈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부왕처럼 백성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으며 부왕과 성격이 매우 닮았으며 공로도 커 백성들이 역사상 가장 휼륭한 성군이라 칭하였다. 또한 2022년 마지막 태생 왕족이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끝에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성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이며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뽑힌다.

현재2.png 즉위전 생애

2022년 12월 27일, 인종휘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언행이 좋지 않았다.

원손마마께서 새벽에 디코 노래방에서 내관인 청설모와 욕배틀을 했다는 증좌들이 고변을 하였으며 내금위를 동궁전(東宮殿)에 배치해야한다는 상소문(上疏文)도 올라왔다. 청내관의 체벌에 대해선 내외명부 수장을 대리(代理) 중이시던 빈궁마마께서 청내관을 존현각에 불러 경고(警告)로 끝내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미천한 소손을 아끼시는 전하의 어심에 감사함이 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동궁전(東宮殿)에 외지인이 들어올 일이 없으며 저에게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청내관의 일 역시 품고 넘어가고자 하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 역시 없게 하겠사오니 전하께서도 소손의 뜻을 이해하여주시어 내금위의 배치까지는 거두어 주시길 바라옵니다. 심지어 자칫하면 이 일이 궁궐 밖으로 퍼질 수 있사온데 이미 중전마마와 관련된 일로 국가의 혼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더 퍼져서야 되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한번 자신을 모시는 내관과 함께 욕배틀을 하며 백성들 앞에서 차마 말할수 없는 심한 언행들을 벌였는데, 그걸 여러명이 고변하였다. 자식손주를 완벽한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태조 입장에선 걸림돌이 될수 밖에 없었으며 세자던 인종에게도 안 시킨 여러 시험을 원손인 성종에게 치루게 하였다.

원손 고변 사건이 터지고 바로 다음날, 태조신덕왕후와 세자던 인종을 경회루에 불러 세자빈 휘빈이씨와 원손 성종의 언행에 대해 대책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사실상 세자빈은 조용한편에 속했지만 원손의 언행으로 인해 모친 휘빈이씨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유폐상태던 신덕왕후태조의 지원으로 많은 권력을 얻게 된다. 그러다 결국 1월 5일 어머니 휘빈이씨가 세자빈에서 폐위되고 사망한다. 새 어머니로 정안왕후를 맞이한 원손은 어머니처럼 잘 대해주었다.

새벽 1시 10분 원손마마께서 삼정승(三政丞)의 심사하에 집현전(集賢殿)에서 입학례(入學禮)를 치루다. 점수 영의정이 통을 주어 90점대였으나 우의정이 약을 주며 60점을 맞으셨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의 감독하에 삼정승들이 여러 시험지를 주었다. 원손이던 성종의 답변을 보고 영의정이 통을 주었으나 당시 우의정이던 김간춘이 약을 주며 점수가 매우 떨어졌다. 훗날 성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에게 약을 준 김간춘을 싫어하였다고 전해져내려온다. 결국 극적으로 왕세손으로 책봉된 성종은 1월 17일 한양 토씨의 원경왕후를 세손빈으로 맞이한다.

2월 10일, 증조부 태조가 승하하고, 곧 바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다.

세자저하께서 강녕전(康寧殿) 職務실을 실수(失手)로 들어가 박상궁이 이에 경고(警告)하자, 세자저하께서 이리 말하셨다.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어차피 미래에 내자리인데
그러자 박상궁이 말하기를, 실록(實錄)에 실여야겠군요.
그러자 세자저하께서 말하시길, 안됩니다. 실록(實錄)에는 쓰지마세요 라고 하셨다.

태조의 국상이 한참 치루어질때 태조의 빈전을 앞에 두고 강녕전에 들어간다던지, 미래 자신의 자리라고 말하며 권력욕이 많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상의 마지막 날 태조의 대관이 왕릉에 묻히던 의식이 있었는데 이때 세자가 자며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자는 경복궁 영제교에서 인종이 있는 근정전을 향해 비를 맞으며 15분 넘게 석고대죄를 하였다.

아!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감히 조상(祖上)과 선왕(先王)을 모심에 누를 끼치었으니 이 어찌 큰 불효(不孝)가 아니겠는가, 선왕(先王)과 선조(先祖)들께서는 이 후손(後孫)의 죄를 보시어 꾸짖어주소서, 那羅의 기틀과 廟社를 망치었으니 이 불초(不肖)한 후손(後孫)이 삼가 죄를 청하나이다, 본디 선왕(先王)께서 나라(那羅)를 여시어 구시대(舊時代)의 악을 滅하시고 나라(那羅)를 평안(平安)케 하신바. 후인(後人) 된 자로서 그 유지(維持)를 거슬렸으니 죄가 크옵니다. 선조(先祖)들께 죄를 고하나니 일신우일신하게 하시어 죄를 고치게 하시고 의무(義務)를 다하게 하여 주소서.
—  조선왕조실록 인종실록 1권

세자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는지 석고대죄가 끝난 직후 종묘를 찾아 저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2월 20일에는 아들 이호를 얻었으며 2월 23일에는 새어머니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겪다가 결국 훙서하고, 세번째 어머니 현덕왕후를 맞이하였다. 효심을 다해 현덕왕후에게도 잘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3월 10일, 세자빈이던 원경왕후와 결혼 50일 기념일인 금혼식을 맞이하였는데 맞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일 오후 10시에 부친 인종이 향년 72세로 갑작스럽게 훙서한다.

현재2.png 조선 국왕 즉위

3월 10일, 아버지 인종이 훙서하며 45세의 나이로 조선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성종은 백성들에게 죽을 때 까지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실제로 죽을 때까지 헌신을 다하고 공식 일정을 모두 소화하였다.

세손과 세자 시절에 삐둘어지긴 했으나 왕위에 오른 이후 그 누구보다 성군, 제왕이라 칭할 정도로 열심히 국정을 운영하였다. 성종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는 개학 시즌으로 인하여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였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책을 수립하고 조선의 존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4~6월 초에 조선이 다시 일어서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조선이 존립을 유지할 수 없었으나 발전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부친 인종때 문화사업이 모두 날아가였기 때문이다.

4월 11일에 왕대비던 현덕왕후를, 4월 19일에 부인 원경왕후를, 4월 20일에 대왕대비 신덕왕후를 연이어 보냈으며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6월 17일에는 재위 100일 기념일인 백금경축을 맞이하였으며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그 결과 장남 1명, 손녀 1명, 증손주 2명, 며느리, 손주며느리, 증손주며느리까지 보았다. 너무 긴 재위기간으로 인해 왕세자 이호의 불만이 매우 컸다고 한다. 6월 말 부터 지팡이의 도움없이 걷지 못했으며 건강이 안 좋아졌다.

결국 7월 1일, 폐비 김씨를 신의왕후로, 폐빈 이씨를 휘빈이씨로 복권시키고 향년 109세로 훙서하였다.

현재2.png 가족 관계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남주상 이호2023년 2월 10일왕후 송씨
정순 공주, 세자 이행, 경원대군

현재2.png 평가

・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세손과 세자 시절에 아주 열정적이였다고 한다. 점수는 낮게 나온적이 많으나 학업에 관심이 많았다.

・성품 : 감정적일때도 있고 이성적일때도 있으며 부친 인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호감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며 많은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치적 : 재위기간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고 정치, 경제, 외교 등 다양한 부분에 있어서 발전하긴보단 쇠퇴하지 않게 현상 유지시킬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조선의 존립을 크게 유지할 수 있었다.

・외모 : 피부색이 매우 밝았다고 하며 눈 또한 크고 이뻤다. 부친 인종의 유전자인 듯하다.

・가정사 : 조선 국왕중 최초로 왕비를 1명 두었으며, 안정적인 가정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