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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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문제가 자유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이라는 것을 간파한 사람은 케인스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본 케인스는 자본에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한 자유 방임주의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체제의 치명적 약점인 고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20세기 자유민주주의의 교리인 ‘완전고용’ 정책이다. 물론 국가의 개입이 시장을 대체하는 건 아니다. 자본가가 시장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감행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는 것이다. 안전 자산으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융을 규제하고 정부도 직접 투자에 나선다. 자본가의 이윤 추구를 향한 ‘동물적 충동’을 시장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추동하는 게 케인스가 이뤄 낸 자유민주주의 혁신이었다.
케인스는 유효수요를 경기 변동의 주요 변수로 파악하였다. 유효수요는 실제 구매력이 뒷바침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소비재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와 자본 제공에 대한 투자자들의 수요로, 케인스는 유효수요의 하락을 대공황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며, 유효수요의 상승을 위해서는 정부가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시장주의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운동에 개입해 유효수요의 창출과 완전고용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정부 투자 중심의 완전 고용을 추구하는 뉴딜 정책을 펼쳤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것이 대공황 극복의 주된 요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케인스의 이러한 혁신은 20세기 후반 한계에 부닥쳤다. 동물적 충동이 충만했음에도 자본가가 충분한 이윤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 투자가 증가해도 노동생산성 향상은 더뎠고, 더구나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불안정성도 커졌다. 선진국들은 완전고용에 거의 도달한 시점에 장기 경제침체 위기에 빠졌다.
케인스의 이러한 혁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는 약 40여년만에 한계에 부닥쳤다. 정부의 활동이 오히려 석유 파동을 일으키는 등 정부 개입의 한계가 드러나며 대규모의 스테그플레이션[* 경기 침체 상태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인하여 신고전학파가 시카고 학파를 중심으로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나, 케인스학파 또한 신케인스학파로 변화하였다.  
 
케인스학파는 이러한 케인스의 주장에 따라 기존 주류경제학인 신고전학파와는 다른 각종 수학적 도구와 이론들을 창시하였다.

2024년 3월 18일 (월) 13:34 판

케인스는 유효수요를 경기 변동의 주요 변수로 파악하였다. 유효수요는 실제 구매력이 뒷바침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소비재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와 자본 제공에 대한 투자자들의 수요로, 케인스는 유효수요의 하락을 대공황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며, 유효수요의 상승을 위해서는 정부가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시장주의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운동에 개입해 유효수요의 창출과 완전고용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정부 투자 중심의 완전 고용을 추구하는 뉴딜 정책을 펼쳤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것이 대공황 극복의 주된 요인으로 생각된다.

케인스의 이러한 혁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는 약 40여년만에 한계에 부닥쳤다. 정부의 활동이 오히려 석유 파동을 일으키는 등 정부 개입의 한계가 드러나며 대규모의 스테그플레이션 경기 침체 상태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인하여 신고전학파가 시카고 학파를 중심으로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나, 케인스학파 또한 신케인스학파로 변화하였다.

케인스학파는 이러한 케인스의 주장에 따라 기존 주류경제학인 신고전학파와는 다른 각종 수학적 도구와 이론들을 창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