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오스만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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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7일 (목) 21:0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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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오스만 제국

دَوْلَتِ عَلِيّهٔ عُثمَانِیّ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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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ممالكت مهراسا
잘 보호받는 강토
상징
국가 마흐무디예 행진곡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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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년 건국
701년 바페우스 전투
726년 부르사 점령
754년 갈리폴리 점령 (유럽 진출)
791년 1차 코소보 전투
798년 니코폴리스 전투
804년 앙카라 전투
847년 바르나 전투
856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919년 찰디란 전투
922년 이집트 정복, 칼리파 위 획득
932년 모하치 전투, 헝가리 정복
935년 제1차 빈 공방전
944년 프레베자 해전
978년 레판토 해전
1,082년 포돌리아 점령, 최대 판도 구축
1,094년 제2차 빈 공방전
1,110년 카를로비츠 조약
1,130년 파사로비츠 조약
1,151년 베오그라드 조약
1,155-1,158년 오스만 페르시아 전쟁
1,187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1,212년 이집트 침공
1,242년 나바리노 해전
1,254년 탄지마트 개혁
1,269-1,272년 크림 전쟁
1,292년 미드하트 헌법 제정
1,295년 산 스테파노 조약
1,325년 2차 헌법 제정
1,330-1,331년 발칸 전쟁
1,333-1,336년 제1차 세계 대전
1,333년 갈리폴리 전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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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코스탄타니예
최대도시 코스탄타니예
면적 17,000,000km²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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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얄레트 12개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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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16,128,361명
공용어 오스만어
공용 문자 아라빅
종교 국교 이슬라믹
분포 이슬람 수니파, 정교회, 유대교 등
군대 오스만 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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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군주제
파디샤 압뒬메지트 2세
칼리파 압뒬메지트 2세
술탄 압뒬메지트 2세
대재상 네온
총재 AOANQO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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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공식 화폐 악체, 쿠루시, 두카트, 리라
ISO 4217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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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이슬람력
시간대 UTC+3
도량형 SI 단위
통행방향 혼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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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미가입
홈페이지
숭고한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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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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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Osmanlı İmparatorluğu)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동유럽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럽을 위협하던 국가이며, 동시에 모든 이슬람 국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국력을 가진 나라였었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했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룸 술탄국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했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으로는 러시아와 폴란드, 서로는 오스트리아와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는 전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 중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믿었던 종교는 이슬람이었다. 셀림 1세가 칼리파 직위를 물려받은 시점부터 이슬람이 제국의 국교로서 확고하게 굳혀졌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으며,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에서 이슬람을 제국의 국교로 삼았음을 늦게나마 규정했다.

상징

국호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왕조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중세 라틴어식 표현인 오토마누스(Ottomanus)에서 유래한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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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는 월성기이다.

국력

역대 이슬람 제국 가운데 매우 강대한 제국 중 하나이며 패권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었다.

  • 중동 제국 가운데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제국과 오스만 제국밖에 없다. 다른 중동 제국들은 많이 동원해 봐야 10만 명 미만이었다.
  •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우마이야 제국보다는 훨씬 작았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고 동유럽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우마이야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루스)와 페르시아까지 정복했었다.
    • 그런데도 오스만 제국이 우마이야 제국보다 더 강한, 역대 이슬람 제국 가운데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까닭은, 우마이야 제국보다 영토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동원력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오스만 제국의 관료 제도가 매우 효율적이고 잘 짜여졌다는 뜻이다.
      • 동로마 제국,하자르 칸국과 프랑크 왕국에 틀어막혀 유럽 중심부와 동유럽, 발칸 반도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우마이야 제국에 비해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근세 유럽의 영역에 끊임없이 공세를 가함으로써 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더 무서운 적'이었다.
      • 이와 관련하여 후대에 들어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열강들 가운데 약체화된 18~19세기 이후에는, 유럽 식민 제국주의가 나머지 비서방세계를 비교적 일방적으로 침략, 정복할 만한 절대적 군사 우위를 누리기 시작했기에 '서구 문명을 위협한 최후의 동방/비서구 제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 부분 유럽 중심의 관점이고 결과론적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어쨌건 우마이야 제국은 백 년도 못 가고 망한 반면 오스만 제국은 한 번 점령한 지방은 백 년은 넘게 장기적으로 통치하는데 성공했다. 확장의 한계점 끝자락이자 최전방 전선이었던 헝가리만 하더라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승전하고부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50년 이상 영유했고,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같은 유럽 내 핵심 지방들은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거진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통치했다.
    • 다만 존속기간은 오스만이 훨씬 길었어도 오늘날 중동으로 분류되는 지역 전체를 통일하는 것에 보다 근접했던 것은 분명 우마이야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최강대국이었긴 하지만 최초의 세계제국의 후예인 페르시아만큼은 끝까지 정복하지 못했고, 비록 대부분의 기간을 오스만이 우세를 점하긴 했지만 페르시아 또한 정복되지도, 패권에 순종하지도 않은 채 끝까지 오스만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2인자로 남았다. 또한 북아프리카 역시 모로코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결국 오스만이 정복을 포기하며 북아프리카 전체 정복을 이뤄내지 못했다. 유럽세계에 얼마나 더 위협이 됐는가에 대해서도 오스만과 우마이야의 시대에 유럽의 강국, 중심지가 각각 달랐기 때문에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발칸반도 정복에 성공한 것은 분명 오스만이지만, 오스만 제국 시대의 동로마는 수많은 풍파를 거치며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작고 쇠약해진 상태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마이야가 오스만이 못한 스페인 정복을 해냈지만 우마이야 시대의 서고트 왕국과 오스만 시대의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는 같은 스페인이라도 엄청난 국력차가 존재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도 빼놓을 수 없는데 우마이야와 오스만은 시야를 중동 밖으로 넓히면 동시대에 각각 당나라, 그리고 스페인 제국/명나라가 존재하는데 페르시아의 경우 중동 밖의 세계를 따져봐도 1대1로 대적할 국가가 없는, 중동 최강을 넘어선 세계최강이었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서는 페르시아가 역대 최강일 수도 있다.
  • 몽골 제국과 더불어 유럽 중부·동부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끼게 해 준 단 둘뿐인 제국인 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위대한 성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기도 하다.
    • 당시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악명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한 악명과 비슷했다.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고 부분/전면적으로 튀르크계 국가이기까지 한 카라만 베이국, 백양 왕조, 사파비 제국, 맘루크 왕조도 다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게 대항하려 했을 정도다. 19세기에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 세계 공공의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수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난립해서 항상 어지러운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에 위치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 존속한 제국 중 하나인데 무려 6백 년 넘게 존속했다. 게다가 적어도 부르사, 에디르네 초기 양대 수도 점령 이전까진 거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후로는 몇몇 술탄 개인이 문약한 성격이었거나 술탄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왕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제국들 중 독보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왕권을 휘두른 나라이다. 동시대 사파비 제국은 훨씬 일찍 18세기 초반, 그것도 내부 권력 구조의 취약함이란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방 토후였던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무굴 제국 또한 알람기르 1세 치세의 과다한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반란을 틀어막지 못한 채 18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델리 일대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식물 정권으로 마지막 한 세기를 보낸 걸 보면 오스만 술탄들은 끝에서 네 번째인 압뒬하미트 2세(1876~1909년 재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 그대로 전제 권력을 유지했으니 이슬람 제국 국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근대까지 전제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강역

전성기 시절에는 튀르키예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캅카스, 아라비아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소위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라는 묘사로 종종 회자된다. 전체적으로 동로마 제국 분할 당시 영토를 중심으로 영토가 추가된 형태인데, 이 추가된 영토를 합치면 전체 로마제국의 영토보다 좀 더 넓었다.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절정에 이른 16세기 후반~17세기 초중반에는 북쪽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저 동쪽 멀리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무스카트를 잠시 정복했고 이후 1650년에 건국된 무스카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의 주요 속국중 하나였다. 그리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을 지원해 에티오피아를 멸망시킬 뻔 하기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맹주국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스페인 제국 내부의 모리스코인들에게도 미쳤다. 스페인 제국은 항상 모리스코 공동체에 미치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우려했고 이는 모리스코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결국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했다. 1522년 로도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수시로 이루어 졌으며 몰타 공방전에서 구호기사단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시들시들해진 19세기에도 칼리프국이라는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지 청나라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야쿱 벡이 오스만 제국과 수교하며 에미르로 인정받고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했다.

또한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온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비슷한 시기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멸망 직전까지 몰린 이후 청야전술같은 극단적인 방어에 급급할 정도로 오스만 제국에게 밀리는 형세였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지 못했던 모로코의 사드 왕조는 1545년 술탄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모로코의 술탄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슬람 토호국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관료 조직

오스만 제국의 중앙 행정조직은 파디샤 본인과 대재상 , 총재가 주축이 되며, 그외에 두 명의 재무대신, 네 명의 군사대신, 외무대신과 내무대신과 문화대신의 총 11명이 참석하는 디완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인구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전성기가 시작되는 1500년대의 인구가 1,100만~1,500만명이었으며 1683년의 제2차 빈 공방전 직전 제국의 최대 판도를 자랑할 당시의 인구가 대략 3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대 중국 및 인도는 이미 1억을 넘는 수준이라 비교가 안 되고,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천 4백만 명 정도고 오스만과 동시기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 인구가 2천만 명을 넘었다.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반면에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다. 그나마 3천만 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인구상으로 최정점을 찍은 시기인 1856년에 고작 3천 5백만 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000만명도 안 되는 1,852만명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영토가 한반도보다 훨씬 큰데도 1914년 한반도 인구가 1500만명대로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395년 동로마의 인구가 3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오스만의 영토는 분할통치 동로마 지역의 영토에서 마그레브와 메소포타미아를 더한 영토인데다 천 년 넘게 후대의 제국인 걸 감안하면 정말 영토대비 인구는 참 적은 나라라 할 수 있다.

종교 인구

1906년 조사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다. 문제는 이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던 열강인 이탈리아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다. 즉, 20세기에 와서는 인구에서 유럽 전체도 아니라, 유럽 열강에서 가장 약한 나라보다도 열세였던 것이다.

인구 감소의 원인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인 사막화로 인구부양력이 오히려 감소한다. 두 지역의 인구가 오늘날까지 유럽보다 적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인구와 농토가 지속해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 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

군사

역사

12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건국 바로 직후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이었으며, 군장이나 무기도 통일되지 않았기에 정규병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유목민 약탈 집단에 더 가까웠다. 이들을 1200년대 후반에 오스만 1세가 하나의 지휘계통 하에 통합하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점차 체계를 갖춘 병졸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시기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기병 위주의 군대로, 활이나 투창 등을 사용하였으며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복한 곳의 토지들을 약탈하거나 아예 땅을 분배받는 형식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 약탈이 끝난 것은 오르한 1세가 병사들에게 정식으로 봉급을 주는 것을 시작하고, 대대적으로 서구나 페르시아의 용병들을 고용했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일반 보병들은 '야야'(yaya)라고 불렀으며, 보조병 성격으로 기타 잡일들도 도맡아 하던 경보병들은 '뮈셀렘'(müsellem)이라고 불렀다. 14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초기 형태의 총을 구비한 총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피야데 톱추'(piyade topçu)라고 부르는 총보병이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들 중 처음으로 총기를 전격적으로 군대에 도입한 국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워낙 총기를 이른 시기에 도입했기에 당대의 오스만 군대는 동시대의 페르시아, 혹은 동로마, 서양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이나 인도의 무굴 제국 등이 앞다투어 총기를 도입할 정도였다. 이들은 전장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여 바예지드 1세 재위기에 쇠락해가는 동로마의 군대를 끝장내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시대에는 개종한 무슬림들로 만들어진 예니체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세계의 첫 상비 총보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군사 개혁을 실시하였다. 술탄은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과 동로마인들을 모아 만든 데브시르메 제도를 개정하여 본격적인 상비군을 편성하는 등 군대 편제를 확립하였으며, 군대를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중앙군을 '카프쿨루', 지방군을 '에얄레트'라고 불렀다. 또한 화기에도 신경을 써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큰 공헌을 한 대포 '다르다넬스 대포'를 확대 생산하였으며, 이 덕에 오스만 제국은 1800년대까지도 이 대포를 상시 운용했다. 1465년에는 본격적인 머스킷병들이 등장하였으며, 16세기에는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사용하여 머스킷을 생산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발전된 화기를 군대에 새로이 도입했던 덕분에, 오스만 군대는 몇 백년 간 서구 군대에 비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아나톨리아를 여행한 중국 명나라 여행가 자오시젠이 '튀르크의 총기가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다. 이같은 화력의 우위, 그리고 예니체리 부대의 강력한 조직력과 지휘능력 등이 합쳐지면서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유럽의 웬만한 군대들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군악대 역시 16세기의 예니체리 부대에서 '메흐테르'라고 이름으로 처음으로 창설된 것이다.

1606년부터 1826년까지는 기존의 군대였던 예니체리들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600년대까지만 해도 예니체리는 여전히 제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으며, 조직력도 강했고 군의 기강도 어느 정도는 살아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예니체리들이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술탄마저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했고, 군대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예니체리들은 군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특권층이 되어 향락에 빠져들었고, 이전의 군사적 규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술탄들도 할 수 있는 선에서 프랑스 장교들을 영입하여 프랑스식 군사 교육을 들여오고, 포병 창설, 보스포루스 해협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군사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미 근본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예니체리들의 일소 없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야심차게 추진한 해군 창설과 새로운 병종 등은 기존의 군대에 제대로 흡수되기는커녕 배척당하는 게 흔했고, 기껏 영입해온 프랑스 장교들은 군조직 내에서 냉대를 받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서구의 근대식 군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벤치마킹했던 셀림 3세 시기에 유럽식 군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신군이 창설되는 등 조금이나마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소규모의 제대로 훈련된 근대식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식 군대는 1만 명이 채 되지 못했고, 동시대 유럽 열강들이 몇십만 명에 달하는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게다가 셀림 3세가 그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에 의해 1808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면서 군대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를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 넘기다가 결국 예니체리 철폐를 강행, 성공하였다. 한편 먼 남쪽에 있던 이집트 지역에서는 무함마드 알리 파샤 총독이 사실상 제국에 반기를 들고 자치적으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급박해진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가 사라진 잔재 위에 대대적인 근대식 군대 창설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1861년부터 본격적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다,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타 유럽 열강들에 비하여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주로 발칸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활약하였으며, 프랑스식 군사교육체계를 더욱 효율적인 독일식 군사교육체계로 바꿨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규모는 계속해서 불어나는 빚과 소수민족의 저항으로 인해 축소되었으며, 현재는 중견국 수준의 군사력 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 편재 체계 또한 크게 변경되었다. 현재 진정한 군단으로 부를 수 있는 군단은 제 1군단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머지 군단은 군단이라 부르기에는 군대의 규모가 매우 작다.

편제

오스만 제국군은 현제 4개 군단이 존재한다. 각각 제 1근위군단과 제 2군단, 제 3군단, 제 4군단으로 나눠지며, 각 군단은 휘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각 군단의 규모는 제 1근위군단(정예-주력 군단), 제 2군단, 제 3군단, 제 4군단 순서로 이어진다. 제 1근위군단은 휘하에 제 1, 2, 3 사단을, 제 2군단은 제 4사단을, 제 3군단은 제 5사단을, 제 4군단은 소규모 직할 전투단 만이 존재한다.

경제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는 발칸반도였다. 오스만 유럽 영토에서의 세입은 16세기 오스만 정부 수입의 절반을 차지했고 18세기에는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또한 실크 로드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유럽에 팔았고, 유럽의 황금과 은을 그 대가로 받아챙겼다. 당시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지중해 인근의 모든 무역로들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나와있으며, 이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근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압도적으로 비싼 무역세를 지불하면서 아시아와의 무역을 진행해야만 했다. 이같은 고관세, 고세율은 종교 문제와 함께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같은 종교에 따른 관세 차별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특히 셀림 1세의 재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은 2%의 관세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에 반하여,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은 4%에서 5%에 달하는 관세를 오스만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국 상인보다는 유럽 상인들이 더 많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높은 관세는 카피튈라시옹을 체결한 국가의 상인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각종 규제를 받아야 했다. 중세부터 이슬람 군주들은 세입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대한 많은 외국 상인과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의외로 대외무역 장려에는 무관심했는데 국고에도 이익이 안 되고 국부가 유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과의 무역은 유럽 상인조합과 회사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상인들은 국내외 모두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했다. 세법을 보면 183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수입과 수출 모두에 3%의 관세를 부과했고 자국과 외국 상인 모두 상품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유통할 때 8%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1838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수출에는 12%, 수입에는 5%의 관세를 부과했지만 외국 상인은 제국 내 관세를 면제받았다.

무역

오스만 제국은 전신인 룸 술탄국에게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육상 교역로를 넘겨받았고, 이 교역로를 이용하는 카라반이나 대상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특히 교역로 중간중간에 초소와 국영 여관 등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를 통한 수입을 따로 챙기기도 했다. 다만 도로의 질은 당대 술탄의 통치 능력이나 정부의 효율성에 크게 달려있었기에, 16세기와 17세기에 도로의 질이 가장 좋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도로의 질이 옛 시절보다도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해상 무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상 무역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며 그저 선박들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하는 데에 세금을 걷는 데에만 만족했다. 다만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해상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도 있어서, 조세를 늘리기 위하여 선단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향신료 무역을 실시했던 적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해양 활동 범위는 주로 동지중해와 에게 해, 그리고 흑해와 홍해, 페르시아 만 등이었다. 에게 해와 동지중해를 다니는 선박들의 주요 거래 품목은 밀이었으며, 흑해에서는 밀과 목재를 주로 거래했다. 아시아와 가까웠던 홍해와 걸프 만에서는 향신료들이 주요 물품이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튀르키예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에서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던 길이 43m의 거대한 난파선을 해저에서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 적재량만 천 톤이 넘었으며 이탈리아의 자기, 인도의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초, 심지어는 명나라의 유약 자기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활발한 무역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스만인들은 국내외 무역에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 코스탄타니예, 셀랴니크, 할레브 등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수많은 화물이 오가기도 했다. 1890년대에는 세 개의 지방 도시들을 따로 뽑아 조사해 본 결과, 이들을 경유하는 화물의 양이 당시 오스만의 국제 무역량의 5%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지방 도시만 해도 이랬을진데, 코스탄타니예,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대도시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화물들이 오갔을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된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마당이었고, 갈수록 제국의 영토는 좁아지고 부정부패가 행정을 좀먹는 탓에 제국의 내수는 점점 축소되어만 갔다. 한편 국제 무역의 경우,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 역시 국제 무역장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18세기에 비하여 무역량이 10배에서 16배 정도 증가하기는 했다. 국제항으로서 가장 번성한 곳은 당연히 수도 코스탄타니예와 유럽과 가까운 발칸의 항구들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으로 수출되는 양모의 양은 몇 배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무역 균형의 경우 20세기까지도 수출입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오스만 경제의 파탄을 무역수지 불균형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대인도 무역은 육로인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를 경유하거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고 점차 유럽과 신대륙간의 무역경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굳이 육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고, 영국을 필두로 해양과학기술(위도 및 경도 측정법의 발달, 시계측정법의 발달, 돛의 배치 변경, 항로 제정, 조선술의 발달 등)과 행정기술(해사보험과 보험회사의 탄생, 해사정보지의 발간, 주식시장의 개설, 해양 관련 법령의 제정 등)이 발달하면서 해양무역의 안정성과 직접 무역을 통한 수익 증가로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경유할만한 이유가 많이 사라진 데 있다.

러시아 제국 또한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경로를 새로이 뚫고 시베리아 각지에 안정적인 자원수급기지를 개설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통한 중계무역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낮아졌고,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토후국을 합병하면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주된 시장 중 하나를 뺏어가는 효과도 생겨났다.

오스만 제국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감지했으나 현대에도 이러한 무역양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근세시대에 대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산업

자체적인 산업은 19세기까지 전통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론자(Lonca)라는 길드시스템이 주류였는데, 도제(çırak), 보조자(kalfa), 장인(usta) 순서대로 진급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개점면허를 받기까지 오랜기간이 걸렸다. 또한 업종들을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도 용이치 않았다.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시기 서민부터 황족까지 널리 사용하던 구리 제품들을 가공하는 공장들은 그릇을 만들기 위한 동판의 주조는 주조길드에서 담당하고, 이 동판들을 가져와서 나무 망치로 두들겨서 대충 모양을 잡아 반제품을 만드는 길드와 그 위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조각, 부조를 새기는 길드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동제품은 내부에 주석칠을 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도 주석칠을 하는 길드가 따로 있어서 처리했다. 이렇게 배타적인 구조가 산업 전반적으로 만연했다. 유럽에서는 산업 혁명 이후 기계화를 통해 이런 진입장벽과 규제들이 사라져갔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 길드들의 반발로 꽤 오랫동안 난항을 겪었다.

물류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크게 변화를 겪는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 증기 기관과 증기선이 등장했고, 이로 인하여 무역의 대량화와 신속화가 가능해지면서 물류계의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스탄불과 베네치아를 왕래하는 정기선들이 생겨났으며 그 어떠한 화물이라도, 제국의 어느 항구일지라도 몇 십일 내에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물류의 이동이 대거 증가했다. 전통적인 목조선들이 한 번 운행할 때마다 겨우 50톤 정도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증기선은 거의 천 톤에 달하는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으니 최소로 잡아도 몇 십배 이상 물류 이동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등 새로운 항로들이 연이어 생겨났으며, 선박들이 통행하기 어렵던 내륙의 강과 그 지류들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강 인근의 무역 도시들이 번성했다. 특히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경우, 1874년에 450만 톤의 화물들이 드나들었으며 1900년에는 무려 천만 톤에 달하는 화물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제국 내에서도 기술이 더 발전한 유럽과 가까웠던 발칸 반도에 집중적으로 철로와 역들이 깔리는 등 철도를 이용한 운송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재정

오스만 재정의 경우, 거의 대부분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들였으며, 타 중동 제국들과 반대로 도시, 궁전, 군대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상업 활동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6세기의 화폐개혁 이후,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오스만 경제는 거의 500%에 달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는데, 이미 산업 기반이 탄탄했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등은 오히려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졌을지 몰라도 경제구조가 취약했던 스페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상당한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니 차라리 스페인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에서 오는 상인들이 악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고 오스만 제국이 여기에 대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근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오히려 문맹률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베두인들을 계속 농촌에 정착시키는데도 불구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마저 감소하는 등등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18세기 인플레이션은 더 심화되었고 마흐무트 2세 시기 화폐가치가 90% 이상 절하되고 물가가 12배 이상 치솟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은 1850년대까지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해외에 한 번도 빚을 지지 않은 국가였다. 기독교 국가들에게 채무를 진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대출을 최대한 회피한 것인데, 이같은 노력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1854년에 유럽으로부터 첫 채무를 지게 된다. 유럽 열강들은 이 빚을 이용하여 오스만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제국이 더 많은 채무를 지도록 반강제적으로 유도함에 따라 한 번 생겨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75년 경의 오스만 제국은 무려 2억 4,200만 터키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채무를 유럽에 빚지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1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오스만 정부는 '국가채무위원회'를 만들어 빚을 변제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1914년의 국가채무규모는 1억 3,900만 터키 달러 정도까지 하락했다. 다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국가 경제는 유럽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국가채무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직후부터 오히려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경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은 빚을 빌미로 제국 내에 철도, 항만, 역 등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막대한 양의 자본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초기자본이 부족했던 오스만의 튀르크계 은행과 자본가들을 억눌렀다. 게다가 가뭄과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세수가 하락하며 오스만의 재정이 무너졌고, 전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주의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제국 재정의 해외 의존도는 날로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