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운영위원회 보호 문서 |
---|
카카오톡 가상국가인 대한제국의 세계관 공식 문서입니다. 문서편집,반달등을 전부 금합니다. |
![]() 대한제국 황제 |
[ 펼치기 · 접기 ] |
대한제국 제 4대 황제 이우 경종 효황제 | 敬宗 孝皇帝 | |||||||||||||||||||||||||||||
---|---|---|---|---|---|---|---|---|---|---|---|---|---|---|---|---|---|---|---|---|---|---|---|---|---|---|---|---|---|
출생 | 1912년 11월 15일 | ||||||||||||||||||||||||||||
일본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 |||||||||||||||||||||||||||||
서거[1] | 1988년 11월 13일 (향년 76세) [2] | ||||||||||||||||||||||||||||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석조전 | |||||||||||||||||||||||||||||
묘소 | 장릉(奬陵) | ||||||||||||||||||||||||||||
재임기간 | 운현궁 제4대 궁주 | ||||||||||||||||||||||||||||
1917년 5월 28일 ~ 1948년 8월 14일 | |||||||||||||||||||||||||||||
재임기간 | 대한제국 제 4대 황제 | ||||||||||||||||||||||||||||
1955년 8월 16일 ~ 1988년 11월 13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1. 일본은 몇 명의 간신과 부동하여 나의 부황(父皇)과 모후(母后)를 시해하였으니, 이 원통한 사정을 열국(列國, 여러 나라)에 호소할 것이다.
2. 3월 1일 이래로 전 국민이 빈손으로 독립을 절규하여 외치는데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하니, 우리 국민들은 백절불굴의 기세로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의 열혈이 더욱더욱 들끓어 국민의 정신이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아니할 것을 선포할 것이다. 3.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10년 전후에 제반조약으로 우리의 국토를 합병한 것은 간사한 도적을 이용하여 협박하고, 강제 체결한 것으로 결코 나의 부황(父皇)이 긍종(肯從)하심이 아님을 내가 확실히 하는 바이다. 그러니 이를 세계에 공포할 것이다. 4.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一民)이라.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皇族)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 임시정부가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에 노력하여 동포들의 고심(苦心)의 만분의 일이라로 도움이 되고자 하노니,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복수를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
- 《독립신문》에 발표된 의친왕(이강)의 성명 |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이며, 현 대한제국 황제이다.
생애
유약한 성격인 데다가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은 광복 후 구 황족과 아예 연을 끊고 창씨개명 후 일본인으로 귀화한다. 일본식 이름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 때문에 황족들은 이건은 인정하지 않아 의친왕의 후계자는 이곤이 계승하였다.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이우는 일본인을 아내로 맞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조선인과 결혼하기를 고집했다. 일본제국이 이우를 일본 황족과 결혼시키려 하자, 선수를 쳐서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인 박일서의 딸과의 결혼을 확정한다. 친아버지 의친왕도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기에 성사된 약혼이라고 한다. 일본은 크게 화를 내고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했기 때문에 무사히 결혼했다고 한다. 약혼녀 박일서의 딸과는 결혼 전에 한국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 편지도 주고 받았다. 부부 금슬도 좋아서 매년 결혼 기념일이면 뉴 그랜드 호텔 양식부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7월 초순, 이우의 "근무지를 제2총군이 아닌 조선 주차군 사령부로 바꾸어 달라" 요청에 따라 일본이 이우를 조선 주차군 사령부로 근무지를 옮겨주었고, 이우는 원자폭탄을 피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아직 제정복고 정신이 남아있던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청년들이 모여 만든, 친위대가 경성라디오본부를 장악하여, 언론을 통제했고, 한반도에 미군도 오기전에, 기존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닌,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들어서게 되며, 아버지인 이강이 황제로 즉위, 그의 사망 후 제4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