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border:1px solid gray;border-top:5px solid #000000;padding:12px" {{{+2 도이치 연방의 공식문서입니다.}}}[br]본 문서는 2018년 10월~2019년 2월 까지 존재하였던 독일 연방 공화국과는 다른 문서이며, 해당 문서의 무단 복제,편집 등을 금합니다.
Bundes Staat Deuts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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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연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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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새로운 혁명, 새로운 국가 | ||
국가 | 새로운 도이치여, 일어나라! | ||
수도 | 베를린 | ||
최대 도시 | 베를린 | ||
정치 | |||
연방 대통령 | 자우어.U.베른트 | ||
연방 국무총리 연방 국회의장 연방 헌법 재판소장 | 공석 공석 공석 | ||
역사 | |||
대 도이치국 수립 | 1933.8.5 | ||
• 도이치 연방 정부 | 1947.10.9 | ||
• DDR임시정부 | 1949.3.3 | ||
시간대 | HST | ||
인문 | |||
공용어 | 독일어 | ||
국민어 | 독일어 | ||
지역어 | 체코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 | ||
경제 | |||
통화 | 분데스 마르크 (BM) | ||
기타 | |||
도메인 | DEU,GER | ||
국제 전화 | +49 |
도이치 연방의 역사
대 도이치 국의 수립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사회상을 보자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시위가 빈번하였으며, 군, 경찰의 감축과 무리한 경제압박등으로 도이치 인들은 어두운 미래만을 내다보며 망연자실 하였다. 심지어는 자살하는 참전용사나 노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재재가 어느정도 풀리면서 그나마 해결되는줄 알았으나 프랑스가 주요 공업지대를 무단으로 침탈하였다.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3000 계획'을 세워 주요 자원으로 꼽히던 구리 1천톤, 철 1천톤, 석탄 1천톤을 캐라는 무리한 지시까지 내리며 노동력을 떨어 트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1921년 도이치 제 1 혁명을 불러 일으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 여론이 커졌다. 심지어 자살률도 상당히 증가 하였으며, 이는 1930년,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당에 대한 성장을 야기한다. 이후 1932년 도이치 총선에서 승리하였던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당은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물론 지지율도 급격히 상승하며 당시 지지자들 사이에선 새로운 도이치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1933년 8월 3일, 힌덴 부르크 대통령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1933년 8월 5일, 당시 수상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대통령 직을 승계받았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대 도이치 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무리한 계획을 추진한 구국을 타도하고 1932년 국민들의 지지와 더불어, 오늘 이자리에서 새로운 도이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도이치를 파탄으로 내몬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성장과 함께 나아가는 국가가 되어 할것입니다!"'당시 아돌프 히틀러 제국 대통령의 연설중中'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전
1934년, 제국 대통령에 취임한 아돌프 히틀러는 제국대통령과 수상의 권한을 합친 총통이란 직위를 새로 만들었으며, 본격적으로 대 도이치 국의 정부를 꾸려 나갔다. 그리고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을 실시하며 새로운 군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38년 도이치 국방군은 매우 큰 규모의 군대로 자리 잡았으며, 당시 단치히 자유시의 처리문제로 폴란드와 대립하던중 1939년, 신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후 1939년 9월, 결국 폴란드는 대 도이치 국의 침공을 받았으며, 1939년 10월, 폴란드의 완전한 점령이 끝났으며, 그들은 총 6개 집단군중 2개 집단군으로 나눠 제 1 북부 집단군은 북유럽으로 진격하였으며, 제 2,3,도이치 본토 방어군은 국경의 수비를 강화, 제 4 서부 집단군은 프랑스의 기습을 준비하였으며, 5,6 집단군은 서남 아시아로 진격하였다. 이후 1940년, 제 4 서부 집단군과 제 1 북부집단군은 상부로 부터 "프랑스를 해방하라"라는 지령을 받고 그해 6월, 아르덴 숲을 통해 진격한 도이치 군은 2달 만에 프랑스를 점령, 북부를 비시 내각의 자유프랑스로, 남부를 스페인- 프랑스 점령지로 만들었으며, 1940년 말, 제 5,6 집단군은 서남아시아의 점령을 마쳐 수 많은 자원들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헤르만 괴링 공군 참모총장, 에른스트 우데트 공군 기술 개발부장과 아돌프 갈란트 공군 부 참모총장등 몇몇 공군 장성들은 빠른 시일내에 영국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941년 3월, 영-독 항공전이 발발하였으나, 지원 전술의 부재로 패배한다. 그후 1941년 6월, 소련을 급기야 침공하여 몇몇 국가들을 점령하였지만 너무 광활한 소련의 영토로 인해 석유의 공급마저 끊기는 지경에 이른다. 1944년, 대 도이치국 본토까지 밀려버린 상태에서 7월 20일, 작전명 '긴급 상황','발키리' 등의 작전으로 히틀러가 사망하였으며, 대 도이치 국은 1944년 8월, 연합국에 항복하며, 종전되고 1945년 8월, 일본제국의 항복으로 종전을 맞는다
도이치 연방과 도이치 민주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
종전 이후 연합국으로 부터 2년간 감시처분을 받게된 독일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당시 냉전에서 도이치 연방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에서의 최전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7년 독일 서쪽에서는 도이치 연방이 수립되지만 동쪽에서는 아직도 '도이치 내 소련 점령지역' 이란 이름으로 지속적인 소련의 군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1948년, '도이치내 소련 점령군'은 서부 베를린을 침공한다. 그러나 이미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던 도이치 연방 수비대는 헬기와 수송기들을 이용해 공수부대를 급파하였고, 미국의 기갑사단을 집결시켰다. 그후 수 백명이 죽는 끔찍한 참사로 이어지는줄 알았으나, 너무 방대한 정보력에 소련은 철수하고 만다. 소련의 철수 이후 도이치 민주 공화국의 수립이 불가할것을 알게된 몇몇 스탈린 주의자들은 도이치 연방을 버리고 당시 동유럽의 대표적 공산 주의 국가였던 폴란드와 체코등으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꾸렸으나, 체코 지부는 오래 가지는 못하였고, 폴란드 지부만이 살아남아 폴란드 제 3 공화국의 국부였던 레흐 바웬사가 취임하기 전까지 세력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