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국

Morth0505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4월 6일 (토) 18:24 판
이 문서는 태평도 프로젝트의 공식 문서입니다.

태평도 프로젝트 추진위원회 위원 이외의 편집을 금지합니다.
평사국
平私國 | Pinsi
100%100%
국기국장
상징
국가(관습상)
국화벚꽃 (관습상)
표어(관습상)
역사
핀시 열도
Timmy Pinsi map4.jpg
수도 | 최대도시
정징 도(政京都) (관습상)
면적
0㎢
공용 언어평사어
공용 문자한자, 사문자
ccTLD
.pi
국가 코드
PI, PIN
국제 전화 코드
+87

줄 맞추기br]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줄 맞추기

개요

가상섬 평사 열도에 기반한 설정국가이다. 군주가 다스리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왕가는 세씨 왕가 이며, 현 군주는 제 23대 가주인 세청야다.
1945년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1948년 초대 총선에 이어 첫 내각이 구성되었다.

국왕

세씨 왕가
현 군주 세청아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군주직을 수행하는 중이며, 평사국의 현 군주이며 군통수권자이다.

군주는 신체불가침권을 보장받는다.

전임
안종
세청야
1997년 11월 5일 ~ 재위중

설정

행정구역

광역행정구역은 1개의 도(都)와 3개의 부(府), 32개의 현(縣), 1개의 주(州)로 나뉜다.
수도는 정징 부(政京府)이며, 제2도시는 항구도시인 난주 부(南州府) 이다.

Timmy pinsi map3.jpg

행정구역

국토는 총 1개의 (都)와 2개의 (府) 32개의 (縣), 1개의 (州)로 나뉜다.
수도는 정징 도(政京都)이며, 제2도시는 항구도시인 난주 부(南州府)이다. 내륙인 지역은 성도 부, 타핀 현, 비주 현 3개뿐이다. 과거에는 내륙인 지역으로 난타핀 현(南太平縣)도 있었으나 성도 부, 난본 현, 시양 현, 광주 현에 분할 편입되어 폐지되었고 강핀 현도 일부가 정징 도에 편입되어 내륙지역이 될뻔했으나 무산되었다.

핀본(平本) 지방은 정징 도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지방이다.

정징 도(政京都)는 천도한 이래 현재까지도 수도이다. 헌법에는 없으나 관습법상으로는 수도이다.

북부 지방은 북부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다.

동시 현(東私縣)은 류천(兩川) 섬 남부에 위치한 현이다. 이전에는 류천 현과 파천 현에 속하였다가. 분리통합하여 신설되었다.

타핀(太平) 지방은 타핀 섬과 그 부속섬을 기반으로 한 지방이다. 평사 최초의 국가인 태평국이 건국된 지방이다.
대만섬의 타이난이나, 대한민국의 경주, 일본의 토쿄랑 비슷하다.

성도 부(成都府)는 평사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태평국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지금은 왕도(王都)로서 의미가 깊은 지역이다.

난본 현(南本縣)은 태평도 남부에 위치한 현이다. 본래 명칭은 난주 현(南州縣)이었으나 난주 일대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난본으로 개명되었다.

타핀 현(太平縣)은 타핀 섬 중앙에 위치한 현으로 태평국이 건국된 지역이다.

행정부

평사국/행정부 문서 참조

역사

평사국/역사 문서 참조

평사국의 역사
平私史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삼산시대통일태평국시대전국시대삼국시대중세 평사국시대근세 평사국시대근대 평사국시대일제강점기연합군점령기현대 평사국시대
중산국태평국태평국태평도사화국평사국평사국일제강점기연합군 점령기평사국
성산국
태평국
진양국
고대 본주비사국
중세 본주 (중부)대화국
중세 본주 (북부)대화국

고대

삼산시대

역사서에 따르면 타핀 섬(太平島)에 상륙한 첫 사람은 사이 례산(崔䴡山)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인으로, 서기 100년 쯤의 일로 알려져 있다. 타핀 섬 중부에는 사이 례산의 증손자인 사이 류진(崔流進)이 태평국을 건국하였으며 6세기까지 남하하였다. 타핀 섬 북부에는 장 메이린(張明林)이 건국한 중산국풍 잉산(風英山)이 건국한 성산국이 확장을 하다가 충돌하였고 전쟁으로 발전했었는데 종전 후 중산국은 서남부, 성산국은 동남부로 남하하였다. 이 때 중산국과 태평국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양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1] 이후 580년 태평국이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삼국사에 따르면 "중산국왕 진하이(進解)가 나와 항복하였다."라고 한다. 602년에는 성산국과 전쟁을 하여 멸망시켰다. "성산국왕 잉류(英流)는 가족들과 함께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중산왕의 도움으로 뒤를 쫓았으나 결국 잡지 못하였다."라고 삼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통일 태평국시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태평국을 말한다. 이 시기에 핀본 섬(平本島)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636년 핀본 섬을 발견한 김 난메이(金南明)는 즉각 성왕에게 보고하였으며 왕명으로 즉시 핀본 섬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후 핀본 섬에서 의산국과 처음 충돌하였으며 640년에 의산국을 정벌하였다.

중세

전국시대

이 시기는 태평국과 핀본 섬의 여러국가가 난립하던 시기이다. 핀본 섬의 국가들은 소국이었으므로 태평국이 쉽게 정벌할 수 있었다. 645년에는 영수국을, 654년에는 진국을, 659년에는 양국을[2] 정벌하였다. 661년에는 성왕이 승하하면서 무덕왕이 즉위하였고 672년에는 일산국을 정벌하였다.[3] 678년에는 영산국과 전쟁을 하였는데 규모가 큰 소국연맹체였기에 쉽게 점령하기는 어려웠다. [4] 4차례에 걸친 전쟁[5][6][7][8] 끝에 영산국이 멸망하였다.[9][10] 709년 여송국이 세력이 강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여러국가를 통합하게 하였다. 이 때 여송국은 통합에 실패하였고 웅천국은 통합하였으나 불완전했기에 여송국은 719년 태평국에 의해 멸망하였고 웅천국은 725년 내분으로 멸망하였다.[11] 711년, 경무왕이 즉위하면서 국호를 태평도사화국으로 변경하고 진양 군[12]으로 천도하였으며 군호를 군주에서 대군주로 높혀 자신을 주변국을 세력권에 두었다.[13] 이후 웅천국이 망한틈을 노려 주변국가들을 멸망시켰다.

태평도사화국시대

태평도사화국이 핀시 열도를 통일한 시점부터 평사국이 건국도기 이전을 태평도사화국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북부지방을 제외한 핀시 열도의 대부분을 영토로 두었으며 주변국과의 교역도 증가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한편 북부지방에는 왜구가 침략을 일삼다못해 땅을 점령하여 부족사회를 구성하였다. 739년에는 왜구가 서해안을 침략하자 격퇴하였으며 744년에는 교역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대규모 토벌을 시도하였고 763년 왜구를 토벌하고 핀시 열도를 통일하였다. 770년에는 경무왕이 승하하고 경문왕이 즉위하였는데 이 시대에 해양술이 발달하면서 중국과의 교류 확대, 한반도 국가와의 교류, 동남아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태평국사에는"태평성대를 이룩하여 주변국에서 감히 넘보지못하였으며 귀화하는 사람들의 수도 증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886년 애명여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악화된다. 이전에도 몰락할 조짐이 보이기는 했으나 크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덕명왕이 승하하자 애명여왕이 대처를 못하면서 갑자기 몰락해버렸다. 애명여왕 원년(886년) 강 무(姜武)가 반란을 일으켜 북부를 장악하였고 풍 산메이(風山明)가 삼산국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887년에는 장 류세이(張流星)가 중산국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팽창하는 과정에서 후중산국과 후삼산국이 충돌하였으며 전쟁끝에 멸망하였다. 태평도사화국은 한숨돌리게 되었지만 890년에 강 무가 대화국을 건국하였고 남하하였다. 891년에는 진 김수(陳錦秀)가 비사국을 건국하였다. 삼국시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삼국시대

895년 태평도사화국은 비사국에 의해 진양 성이 함락되어 성도로 환도하였다. 비사국과 대화국이 전쟁하는 상황에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후유증으로 애명여왕이 승하하였고 5촌 조카인 사이 문익(崔文翼)이 즉위하였다. 899년에 상장군 신 진양(申眞洋)의 부장이었던 세 강우(世慶祐)가 애장왕에게 건의하여 신 진양의 지위하에 중량 섬(中良島, 현재의 중 섬)에 위치한 양해진 성(良海津城)을 점령하였고 920년에는 중량 섬 전역을 점령하였다. 태평도사화국과 비사국이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태평도사화국은 진양을 수복하여 재천도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922년 신 진양이 대장군에 밈명됨에 따라 세 강우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세 강우가 비사국으로 출병하였는데 비사국을 공격하지 않고 회군하였기에 "비사국을 도와 대화국을 공략해야한다."라고 하니 애장왕이 승인하였다. 923년 애장왕이 승하하자 세 강우가 군사를 이용하여 전권을 획득한 뒤.[14] 공민왕을 옹립하여 위험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928년 세 강우는 공민왕이 비사국에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간 틈을 이용해 신 진양을 하옥하였고 공민왕은 돌아오자마자 태자에게 앙위하니 그가 바로 태평도사화국 마지막왕 공선왕이었다. 하지만 군권을 제외한 권력은 공민왕이 행사하였으므로 공선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932년 공민왕이 승하하고 공선왕이 권력을 승계받았다. 공선왕은 첫 공무로 신 진양을 대화국으로 출병시켰으나[15] 신 진양은 대화국에 투항하였으며 933년에 군대를 이끌고 비사국을 위협하여 태평도사화국을 공격하였다. [16] 그러나 패전하여 포로로 잡히게 된다. 민심은 세 강우를 향했고 934년 공선왕은 "민심이 원하는대로 할 것이다." 라며 세 강우에게 선양하였다. 935년에는
평사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여 새왕조를 창업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비사국왕 진 하이룡(陳解龍)이 항복하였으며 937년에 강 무가 항복함으로써 대화국이 멸망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지리

교통

평사국/교통

군사

평사국/군사

평사국의 군대는 군주가 명목적인 총사령관을 맡으며, 실질적인 사령권은 재상과 총참모장에게 있다.

평사국군은 국가군(國家軍)으로 불리며, 육군 130,000여명, 해군 20,000여명과 공군 10,000여명으로 편성된다.
육군은 삼군을 구성하는 최대요소이자 예산편성시 최고 비율이 할당되는 군이다.
해군은 섬나라의 특성 상 육군 다음가는 예산 편성을 받으며, 세계 20위권 안에 들기를 유지한다.
공군은 총 200여기의 고정익/회전익기를 보유한다.

훈장

평사국/훈장

문화

스포츠

문학

교육

종교

기타

각주

  1. 성산국이 몇차례 지원하기도 했다.
  2. 진국과 양국은 동군연합으로 같은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진양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3. 진국을 정벌하는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는데 당시 진국은 초국, 일산국 등의 국가에서 지원했는데 소국연맹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유증으로 일산국이 쉽게 망했다고 볼 수 있다.
  4. 영산국은 진국과 같은 연맹이었으나 연맹이 태평국과의 전쟁을 하자 그 틈을 타 주변국가를 세력권에 편입하였다. 이 때 일산국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태평국이 침공했다는 소식에 철군하였다.
  5. 1차 678년 ~ 679년
  6. 2차 679년 ~ 680년
  7. 3차 681년
  8. 4차 683년 ~ 685년
  9. 2차 전쟁 이후 영산국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자 일부 국가들은 자립을 선택하였고 지원을 중단하였다.
  10. 영산국 멸망 후 연맹은 여송국이 주도하다가 멸망하면서 웅천국이 주도하게 된다.
  11. 여송국이 주도했던 통합방식보다는 영산국이 주도했던 통합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으나 영산국은 반발을 억제하지 못해서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2. 현재의 진주 시 일부와 양주 시 일부
  13. 이후 핀시 열도를 통합하고 군호를 군주로 격하하였다.
  14. 신 진양은 대화국으로 출병하였기에 세 강우의 반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15. 일부 군권은 세 강우의 승인하에 행사할 수 있었다.
  16. 이 때 한 발언으로 신 삼국사에 "검으로 시작된 권력 검으로 되찾겠다." 라고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