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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보
 
|이름    = 경기고등학교
 
|한자표기 = 京畿高等學校
 
|영문표기 = Kyunggi High School
 
|그림    = 경기고등학교.png
 
|교훈    = 자유인(自由人), 문화인(文化人), 평화인(平和人)
 
|개교    = 1900년 관립한성중학교
 
|설립형태 = 황립
 
|교장    = 박건호
 
|교감    = 주소연, 김재명
 
|국가    = {{국기나라|대한제국}}
 
|위치    = [[한성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643 (삼성동)
 
|학생수  = 1,705 명
 
|교직원수 = 126 명
 
|상징    = 교목: 은행나무, 교화: 개나리
 
|학교법인 =
 
|관할관청 = 한성특별시교육청
 
|기타    =
 
|웹사이트 =
 
}}
 
'''경기고등학교'''(京畿高等學校)는 [[한성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고종태황제 시기인 1899년 4월 4일 칙령 제11호로 중학과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의 서양식 교육 관제가 공표되었고, 1900년 10월 3일 대한제국 정부 공표에 따라 현재의 [[종로구]] 화동(花洞) 1번지에 '관립한성중학교'로 개교되면서 경기고는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가 되었다.
 
 
1911년에 에마뉘엘 [[대한제국 자치내각]]의 <대한교육령>에 의거,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고 다시 1940년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제일고등학교)가 생김에 따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가 1943년 경기황립중학교로 바뀌었으며, 1945년 8월 15일에 에마뉘엘이 대한제국에서 철수하면서 황립 경기고등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1976년 2월 20일 정부의 강남 개발 시책의 일환으로, [[종로구]] 화동에서 [[강남구]] [[삼성동]] 현 위치로 이전했다. 2010년 7월 1일 과학중점학교로 지정되었다.
 
 
[[경남고등학교]]와 더불어 현재 대한제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이다. 공부를 잘 하는 남학생이라면 경기중학교 폐교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경기중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는 [[영훈중학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여학생은 경기여자중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일명 KS 마크라고도 했다.)
 
 
2017학년도 입학생의 기수는 116기이다.
 
 
== 학교 연혁 ==
 
* 1899년 4월 4일 : 중학교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 관제공포 (칙령제11호)
 
* 1900년 10월 3일 : 신학제에 의하여 관립한성중학교를 개교(現 종로구 화동 1번지)
 
* 1906년 9월 1일 : 교명 개칭(황립한성고등학교)
 
* 1911년 11월 1일 : 교명 개칭(경성고등보통학교)
 
* 1911년 12월 29일 : 에마뉘엘인(다비드 올랑드 외 8인) 교장 재직 (~1945.8.15)
 
* 1940년 4월 1일 : 교명 개칭(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 1941년 4월 1일 : 교명 개칭(경성제일황립고등보통학교)
 
* 1943년 4월 1일 : 교명 개칭(경기황립중학교)
 
* 1945년 8월 16일 : '''교명 개칭(황립 경기고등학교)'''
 
* 1951년 4월 3일 : 부산시에 피난교 개교
 
* 1951년 8월 31일 : '''교육법에 따른 중.고등학교 분리'''
 
* 1952년 6월 1일 : 보인상업고등학교 교사에 한성분교 개설, 덕수국민학교 교사에 한성분교 개설
 
* 1953년 10월 3일 : 덕수국민학교 교사에 한성, 부산 양교 통합
 
* 1954년 4월 24일 : 경기고등학교 교사 이전(세종로소재 체신부 가교사)
 
* 1955년 8월 15일 : 화동 신축중학교사 준공
 
* 1955년 8월 16일 : 조재호 경기고등학교장, 경기중학교장 겸임
 
* 1955년 8월 20일 : 경기중학교 이전(서울 덕수국민학교 가교사에서 화동신축교사로)
 
* 1955년 10월 1일 : 교훈제정(자유인,문화인,평화인)
 
* 1956년 2월 8일 : 경기고등학교 화동교사로 복귀
 
* 1971년 2월 28일 : '''경기중학교가 [[영훈중학교]]로 교명 변경'''
 
* 1974년 3월 23일 : 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 개교
 
* 1976년 2월 20일 : 교사이전(화동->삼성동)
 
* 1976년 11월 17일 : 화동랑의집 신축개관
 
* 1983년 10월 3일 : 동창회 기념관 준공, 개관
 
* 2000년 10월 3일 : 개교 100주년 기념일, 100주년 기념관 개관
 
* 2015년 3월 2일 : 박건호 교장 취임
 
 
== 소개 ==
 
경기고등학교는 대한제국 최초의 공립(현 황립) 중등교육기관으로. 그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고종태황제 시절인 1899년 4월 4일에 칙령 제11호로 중학과 4년, 고등과 3년의 관제가 공포되면서 1900년 10월 3일에, 한성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개교하였다.
 
 
단순히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로만 말하기에는 경기고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매우 크다. 최초의 정부공인 중등교육시설이었기 때문에 에마뉘엘 진주 이전부터 이미 인재들이 모였고, 특히 '과거 시험'의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학교의 입학은 곧 관료로 가는 예비과정으로 여겨졌다.
 
 
[[임제식민기]]에는 이름이 자주 바뀌었는데, 강점 직후인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40년 경성제2고보(현재의 제일고등학교)가 생기면서 경성제일고보로 변경되었다. 1943년 콘크리트 교사를 신축하고 1943년에는 최종적으로 경기황립중학교가 된다. 화동에 있는 이 시설들은 현재도 1943년도 건립 교사는 정독도서관과 그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고, 1921년도 교사는 한성교육청 근대문화재로 남아있다.
 
 
[[파일:경기고등학교.png]]
 
현재도 쓰이고 있는 마름모꼴 '경기' 교표는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에게는 대단한 학벌의 상징이다.
 
 
당시 경기고의 위상은 지방 출신이던 고승덕 변호사의 수기에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인용문|대학입시 예비고사장에는 각 학교의 응원단이 와서 응원전을 펼치고, 응원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간 높은 곳에 경기고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요란한 구호의 다른 학교 현수막과 달리,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서 빛내자'라고만 써 놓은 조용한 문구와 마름모꼴의 경기고 마크만 박혀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승덕 변호사, 저서 나의 수험생활에서}}
 
 
1976년 현재 위치(강남구)로 이전하기 전에 사용되던 종로구 화동 옛 교사는 원래 철거 예정이었으나, 높으신 분들이 대한제국에서 많은 동창회의 전방위적 압박으로, 철거하지 않고 시민 편의를 위한 도서관으로 존치하기로 합의되었다. 그 결과 현재 1943년 건립된 옛 교사는 정독도서관 건물로, 그 앞쪽에 있는 1920년대 교사는 서울교육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고 축제 이름이 화동제이고 부속건물 중 한 곳의 이름이 화동관인 것도 다 구 교사의 전통에서 따온 흔적이다.
 
 
== 교육 목표 및 교훈 ==
 
경기고등학교의 교육 목표는 창조적 지식과 전인적 품성을 겸비한 자유인(自由人), 문화인(文化人), 평화인(平和人)의 육성이다. 물론 근래의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 경기고 학생들도 3가지 슬로건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첫째, 자유인이다. 자유란 남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나아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창의력이 고도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를 사랑하고 스스로도 자유스러워지려는 자유인으로서의 자세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 창조적 지식을 창출하는데 기본이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 문화인이다. 문화인은 민주사회의 성숙한 시민이다. 문화인은 개인적으로 삶의 질 향상시킴은 물론 사회전반의 문화 수준을 선도한다. 원숙한 인격의 바탕 위에 스스로의 자질과 덕성을 갈고 닦아 높은 문화적 안목과 요양을 겸비하는 문화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평화인이다. 평화인은 인종과 민족과 이념을 초월하여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세계 시민적 자질을 갖추어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해 매진하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미래 투시적 안목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춘 평화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교훈 : 자유인(自由人), 문화인(文化人), 평화인(平和人)
 
 
교훈은 1955년 당시 교장으로 재직한 제19대 조재호 교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 교사 ==
 
[[파일:경기고 교사.jpg]]
 
학교 부지의 넓이는 97,863㎡이며 체육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부지는 15,140㎡이다. 이는 웬만한 고등학교의 부지 크기보다 크며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교보다도 크다!<ref> 대표적인 예로 [[한국외대]], [[광운대]], [[명지대]], [[숙명여대]], [[세종대]]가 있다.</ref> 너무 넓어서 그런지 경기고를 처음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헤매게 되어 있다. 이따금 바로 옆 봉은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경기고로 들어와서 헤매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체 면적은 한국외국어'''대학교'''보다 약간 '''크다'''! <ref> 물론, 이 정신 나간 면적을 다 쓰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숲이라 그렇게 넓다는 느낌은 잘 안 온다.</ref> 거기다 교사 대부분이 죄다 산지라서 등교 때마다 등산을 해야하고, 이동수업이 다른 학교에 비해 배로 힘들다. 교문에선 넉넉히 지각이 아니었는데, 교실에 가니 넌 맨날 지각이냐고 혼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 재학생의 말에 의하면 학교의 크기를 실감하고자 학교 정문에서 화동관의 맨 꼭대기층 끝의 반(2016년 현재 1-4반)까지 걸어가면 12분이 걸린다고 한다. 신입생들이나 전입생들이 전 학교를 생각하며 교문에서 10분 남았다고 좋아했다가 지각을 하고 선생님께 싹싹 비는 광경은 학기초에는 흔한 광경이다.
 
 
넓은 교사의 대부분은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숲이 차지하고 있다. 그 숲에선 영동교사 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쓰레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빅바]]껍질, 맥주병 색깔의 [[오란씨]], 병따개로 따야 하는 진로소주병 <del>쓰레기만은 [[서울/강남|강남]]개발 초창기 [[1970년대]]~[[1980년대]]</del>등 세월이 느껴지는 쓰레기들도 많이 나온다. 담력체험, 벌칙 등 숲에 들어가는 일이 있지만 요즘은 잘 안 들어가는 간다. 야생동물화 되어있는 고양이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고, 2010년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경기고 숲에 있던 나무가 쓰러져 죽어 아직까지 그 잔해가 처리되지 않고 남아있어 자칫하다간 발에 걸려 낭떠러지 수준까진 아니지만 굴러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숲에서 쭉 내려오다 보면 후문쪽의 담벼락으로 가게 되는데, 그 길도 가시철조망에 얼기설기 엮여있고, 후문 담벼락은 8~15m정도 되니 낮이던 밤이던 출입을 삼가하는것이 좋다. 정말 최악의 상황을 설정하면, 들어갔다 야생동물화 된 고양이에게 공격당해 도망가다 나무의 잔해에 발이 걸려 10~15m 남짓을 굴러 떨어지다 가시철조망에 스치는 것.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지만 확률이 낮은 것도 아니다.
 
 
2016년 여름부터 현재까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경기고 후문 숲에서 유물발굴작업을 하고있다. 경기고는 현재 삼성리 토성(수도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성리 토성은 한성백제시절 중요한 토성으로 꼽히고 있다. 풍납토성의 서쪽방어와 함께 강을 끼고있어 지방이나 외국선박의 관리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트리비아 ==
 
* 음악실에 [[고종태황제]]가 경기고에 직접 하사한 118년된 독일제 피아노가 있다. 가격은 10억을 넘어간다고 한다. 연식이 너무 오래 됐다 보니깐 소리는 본래의 70프로 정도 밖에 안나온다. 하사된지 118년이 넘은 이상 보존을 위하여 일반 학생들의 조작은 엄격히
 
금지된다. 원래는 100주년 기념관에 보관되기로 하였으나, IMF 당시 대우그룹 사건으로 지원이 끊겨 예정보다 기념관이 작게 지어지자 그 거대한 피아노를 넣을 공간이 없어 음악실에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 역대 졸업생 목록 ==
 

2018년 9월 19일 (수) 19:17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