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이름 같은 다른 문서에 대한 내용은 교회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개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추상적 개념), 또는 그 장소(공간적 개념).

상세

역사

초기 교회

유대인시나고그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함께 아나톨리아 곳곳에 교회가 생겼다.

초기 교회들은 지금의 교회와 많이 달라서, 모든 신자들이 재산을 자발적으로 교회에 바쳐 재산을 공평히[1] 나눠 가졌다. 신약의 사도행전을 보면 악의적인 의도[2]를 가지고 재산을 교회에 바치지 않고 숨겨 놓았다가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죽은 아나니아, 삽피라 부부가 나온다. 당연히 재산을 전부 바치지 않았다고 벌을 받은 게 아니다. 진짜 이유는 재산을 숨겨 놓고 전부 바쳤다고 야훼 앞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땅을 판 다음 의논한 끝에 그 돈의 일부는 빼돌리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아나니아,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돌렸소?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품었소?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사도행전 5장 1-4절 (공동번역 성서)

즉 초기의 교회는 근현대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사회주의적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는 역사로 증명된 바 강력한 무엇이 사람을 휘어잡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예를 들자면 근대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념, 인본주의, 제도로 사회주의를 이루었다. 이에 비해 초기 교회는 신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가 이루어졌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소규모였기 때문. 그리고 다른 이유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내일~모레면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현대의 시한부 종말론과 비슷하게, 어차피 가까운 시일 내에 종말이 오면 재산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이후 중세 서유럽에서는 국가의 업무 중 상당 부분을 교회가 담당하였는데 이는 기사귀족, 심지어 중에도 교양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문맹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이나 귀족 휘하의 행정 조직은 봉건제 때문에 극도로 축소되고 갈갈히 찢겨져 있고,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서 자기네 살림 꾸리는 것이나 겨우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봉건시대의 귀족들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이다가 몰락하거나 교체되는 경우가 너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행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시대에 많은 수의 지식인을 갖추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대규모 조직은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인 교회뿐이었다. 그래서 호적을 비롯한 많은 행정 업무를 교회에서 담당했다.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받고, 성장하면 첫 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고, 결혼식도 교회에서 하고(혼인성사), 죽으면 장례식도 교회에서 해야 하니, 호적을 관리하는데 교회만큼 좋은 데가 없었다. 다시 말해 일종의 주민센터(동사무소)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또 '종교재판'도 교회에서 맡았다. 이러한 영향은 독일 등 소수의 유럽 국가에 아직도 남아 있어 교회가 '공관서'로 취급되며, 이러한 국가에서 목사는 공무원이다. 일종의 복지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레고어 멘델 같은 대수도원장은 징세법안에 항의하면서 '교육도 교회의 신부들이 봉사하고[3], 병원에 수사, 수녀들 파견해서 도와주는데 왜 우리더러 세금 내라고 난리임?'이라고 하소연했다.

다만 교회는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에 '치안 유지'와 그에 따르는 '재판'은 주로 군사 귀족들의 몫이 되었다.

각주

  1. 사도행전 4장 35절.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2. 재산을 절반만 바치고 교회의 보조금을 타먹으면서 명성도 얻으려고 하였다.
  3. 그레고어 멘델은 수도원장이 되기 전에 고등학교에서 과학 강의 봉사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