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일치 운동

개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3절 (공동번역 성서)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간에 일치를 추구하는 운동. 영어로는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고 한다.

에큐메니즘의 핵심이자 발상의 근간은 '우리는 같은 하느님(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서로 분열해서 반목하고 싸우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도 안 좋지 않는가?'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교회일치의 성경적 근거로 고린토1서(코린토1서, 고린도전서) 1장 10-14절과 에페소서(에베소서) 4장 1-16절, 요한복음서 17장 11절을 든다.

교류와 대화

개신교 교단

18세기 스페너, 프랑케 등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존 웨슬리영국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속 스콜라주의적 약점을 극복하면서 세계 선교에 눈길을 돌리게 하였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한 세기 동안의 선교활동은 대항해시대 이후의 몇 백년에 버금가는 눈부신 선교 역사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19세기 선교활동은 교파적 색채를 띤 개신교-그리스도교 확장의 역사를 가져왔다. 이에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파들의 연합과 사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선교 단체들간의 연합과 협동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은 20세기 선교 및 교회 연합의 방향을 전했던 것이다.

1846년 8월에 개인 자격의 차원에서 복음주의 연맹을 발전시키는 국제적, 초교파적 모임이 영국 런던에서 있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52개 교파로부터 800명의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복음주의 연맹은 19세기 대각성 운동에서 기원한 유일한 에큐메니칼 조직체가 되었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라는 칭호를 만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851년에 런던에서, 1853년에는 뉴욕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알렉산더 더프가 사회를 맡았던 영국복음주의연맹 연차모임에서 1854년 최초의 국세선교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교파 차원의 화합 운동으로서의 교회일치운동은 189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것은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공식 대표들을 통해서 상호 다른 점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린델발트 대회와 Review of the Churches라는 정기간행물에 의해서였다. 특히 Review of the Churches의 편집인 헨리 런은 이 지면을 통해 이질적인 각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재통합 문제를 위해 함께 대면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며,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스위스 계곡 그린델발트에서 영국 국내 그리스도교 일치 논의 대회가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이후 처음 열린 대회로 성공회, 침례회, 회중교회, 장로회, 감리회, 퀘이커 신자들이 참석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신자들까지도 참석하였다. 이에 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모든 개신교 교파로 확산되어갔다. 이후 1920년대에 스위스 뮈렌에서 런이 개최한 2번째 대회는 유럽 대륙의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회일치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같은 도시인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창립 개최된 세계기독학생연맹이다. 이 학생 운동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YMCA와 YWCA에 의해 발전된 운동이다. 이 학생 운동의 지도자가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모트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여 이후 교회일치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1886년 무디 부흥운동을 계기로 외국 선교를 위한 학생 지원 운동(SVM)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888년 YMCA의 총무가 되어 교회일치운동 경력을 쌓게 되었다. 모트는 이후에도 2년간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각종 학생 연합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학생 운동을 통한 일치의 경험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의 약 10년간 전 유럽미국, 아시아아프리카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 교회일치운동에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세계주일연합 운동 등이 여러 교파들의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평신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각종 일치운동이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는 1910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제08차 세계선교대회(WMC)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한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복음적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긴 선교단체와 특히 자의적 그리스도교 운동 단체들(YMCA, YWCA, SCM, WSCF, SVM 등) 출신이었다. 이때 의장이 된 지도자가 앞서 언급했던 미국 감리회 신자인 존 모트였다. 이 외에도 조셉 올드함, 윌리엄 템플 등이 이 회의를 통해 당시 교회일치운동의 흐름을 이끌어나갔다.참고

이후 1921년 10월 뉴욕에서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WMC의 꿈을 보다 발전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IMC는 개신교인들 사이의 범세계적 친교를 육성시키며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연합 계획과 행동을 촉진했고, 1928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1938년에는 탐바람에서, 1947년에는 온타리오의 휘트비에서 모였다. 이후 국가별 혹은 초교파적인 기구들의 공식 대표가 선교협의와 포괄적인 계획을 위해 모이는 기구가 되었으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게 되었다. WCC 헌장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못박고 여기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회원 가입권을 허락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간의 교환예배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회 이어져 오고 있는데,[1][2]한국 교회 일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C'로 시작하는 방송국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출연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독실한 신앙인인 가수 자두와 배우 최강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자두의 교단은 감리회이고, 최강희의 교단은 침례회이다. 그들은 간증 프로그램에 몇 차례 나와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한 과정을 얘기했다.

CCC, IVF, SFC 등의 개신교 동아리에서도 이단만 아니면 교단이 달라도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회원으로 받아주고 있다.

가톨릭정교회

가톨릭정교회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재일치를 시도했다. 미하일 8세 동로마 황제에 의해 요안니스 벡코스를 대주교로 서임했는데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황제 요안니스 5세가 개인적으로 재일치를 원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동로마 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치와 교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양자 간 동등한 위치에서 세계공의회를 소집하기를 거절해왔다. 그러다가 1438-38년에 페라라와 피렌체에서 만났다.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서방의 신학자들과 신학 대화를 했고 실제로 동의가 이루어졌고 일치 선언도 이루어졌으나, 후에 동방 측의 여론 등으로 인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일치 시도가 있은 후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두 교회는 오랜 세월 평행선을 그리며 지내왔다. 그로부터 약 524년이 흐른 뒤 두 교회 간 대화의 물꼬가 열렸다.

정교회는 가톨릭이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식적인 참관단을 보냈다. 공의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교령"을 통해 동방 교회의 사제직과 성사들을 인정하고,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통해 정교회를 "자매 교회"로 지칭하고 "참된 그리스도적 보화들을 공동 유산에서 이어받은" 교회로 지칭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64년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동서 대분열 이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아티나고라스(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를 만났고, 그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1054년 동서방의 분열을 가져온 서로에 대한 파문을 취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새로 선출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Demetrios)를 만났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의 대표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0년 일치의 회복을 목표로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구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연합국제위원회가 그리스 섬 파트모스와 로도스에서 개최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1982년과 1988년 사이에 교회, 전례와 성사, 사도전승 문제를 포함한 3가지 중요한 합의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이러한 긍정적인 대응은 1988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 기념식에 바티칸 사절단이 참가하는 것을 포함하는 가톨릭과 정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회합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의 교류가 급속히 발전했다. 2003년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 추기경을 비롯한 4명의 평의회 소속 공식 사절단이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이스탄불을 방문해 축하했다.

2006년 9월 18일부터 25일까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의 대주교 및 사제들과 신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정교회 측 인사들과 가톨릭의 인사 27명이 만나 1980년부터 시작된 일치 회복을 위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갔다, 이 회의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있은 양자 간 일치위원회의 후속조치로서 그 해 독일의 프라이징에서 그 내용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양측은 서로의 미사/성찬예배에 참례했다. 다만 이것은 성사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호 간의 전례 참관이었다.

양측의 활발한 교류는 200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의 초청으로 이스탄불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공식 방문하는 결실을 맺는 큰 밑바탕이 되었다.

2007년 10월 8~14일은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열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 27명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키프로스, 그리스, 알바니아, 핀란드 등에서 온 정교회의 대주교들 및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의 교의학적, 성서적 측면에서의 전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해와 교류를 모색했다. 이 회의 역시 이미 1990년에 모스크바의 양자 간 일치위원회에서 제기되고, 2006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마지막 회기가 열린 10월 13일 토요일에 라벤나 대성당에서 열린 가톨릭 미사에 정교회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14일 산 비탈레 성당에서 열린 정교회의 성찬예배에는 가톨릭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2006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방문했던 것과 같이 2008년 6월 7일부터 29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여 양자 간 더욱 친밀한 교제를 약속했다.


  1. 그동안의 예배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2. 2020년에는 코로나 문제로 인해 강단 교류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