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우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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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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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와 명칭

네스토리우스파는 그리스도교의 종파 중 하나로 비칼케돈 교파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아람어: ܢܶܣܛܘܽܪܝܳܘܣ ܦܰܛܪܺܝܰܪܟܳܐ, Nesṭōrīyōs Paṭrīyarkā)가 주장한 신학론이 중심이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갈라져 나오고 5세기 이후 심하게 탄압받아 유럽 외부로 이동하였다. 때문에 주로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다. 현대까지 이 교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동방 고대교회를 통해 존속하지만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설 자체는 폐기된 상태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초대 공의회 중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만을 인정한다. '경교(景敎)'라는 명칭도 존재하는데 이는 중국 당나라 시기 빛의 신앙이라는 뜻에서 부른 '경()'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물론 당나라 시기 중국에서 경교라고 부른 것은 조로아스터교를 중국에서 배화교로 부른 것과 유사하게 현지화한 것에 가깝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는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의 독자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초기 교회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안티오키아 지역 교회의 특성의 영향이 크다. 안티오키아는 동방 무역의 중심지로 비록 지중해 문화권이긴 해도 시리아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고, 교역의 중심지였기에 아람어를 쓰는 주민들도 상당했다. 그리하여 라틴과 그리스 문화권의 그리스도교 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신학이 발전했는데, 성경 해석에 대해서 역사적이며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으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는데[1],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동시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타나시우스 본인의 신학으로도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교회 인사들이 전전긍긍하며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며 설명해 나갔는데, 훗날 대적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적인 요소가 어떻게 섞일 수 있었는지 파악할 방법이 없다.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체와 혼을 모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과정도 겪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더욱 긴밀한 관계로 연합할 수 있었으며, 그 성장 과정은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완성되었다고 했다. 니케아 신조에 따라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변형된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간직한 채 스스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사람의 본성에 연합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사람의 본성을 하나의 신체적 기관으로 사용하면서 그 기관을 통해 활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듯 두 본성은 각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활동과 목적의 일치에 의해서 연합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모두 손상됨이 없이 보존하는 방향으로 신학을 정립했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점차 융합되는 방식으로는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적 본성을 가지신 분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육체와 혼을 가진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취임할 당시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요 인물은 안티오키아 근처 현재의 터키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출신이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테오도루스(Theodorus)였는데, 그는 본래 변호사가 되려고 수사학을 공부하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인물로, 10여 년간 수도 생활을 한 뒤 안티오키아 학파의 창시자로 불린 디오도루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여러 저작을 남기며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비판했는데[2], 저작 <강생에 대하여>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을 논박하며 그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분인데 영원한 분만이 그를 낳을 수 있으며 마리아는 육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 예수 안에 거함이 마치 하느님이 성전에 거하심과 같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일체됨은 부부에 비유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예수로 변형되었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에 내재했음이 맞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말한 변형론은 이교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변형 또는 변질이라는 용어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는 한 사람(prisopon)일지라도 두 속성(physeis)을 지녔다는 테오도루스의 주장에 반발했다. 그런 논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빈정거렸다. 당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하느님의 본질의 문제냐 행위의 문제냐의 주제와 관련하여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테오도루스는 '하느님은 아들과 더불어 한 위격이 되어 아들로 하여금 권위를 가진 자신의 동업자가 되게 만들었다. 아들은 하느님의 모든 언행을 아들을 통해 나오고, 최후의 시험과 심판도 아들을 통해 한다. 예수는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기에 성령으로 수태될 때 이미 그리스도인 하느님이 그에게 내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선악을 구별할 나이엔 이미 다른 사람보다 더욱 지혜를 나타낼 수 있었고, 세례 전후에는 최고의 덕에 달하는 은혜로운 삶을 삶으로써 예수가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분리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와 일체함으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랐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남다르며 하느님의 본질이나 행위도 아닌 휼륭한 즐거움(eudokia)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봤다. "이 훌륭한 즐거움은 하느님의 훌륭한 의지이며 그리스도의 내재한 사람이 하느님에 몰두하기에 하느님이 느끼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하느님에 멀어진 자는 불의한 사람으로 하느님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가치 있게 여기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는 것은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이며, 하느님은 한계가 없고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선택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세기 후반 출생한 인물로 지금은 터키에 속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시리아 지방에 속한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 근방 출신이다. 현재 그와 관련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려지기로는 타고난 언변가이며 수려한 외모에 매혹적인 음성, 뛰어난 사고력과 언변, 신학적으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있었고, 안티오키아에서는 그의 강론을 들으러 사람들이 몰려 성당이 미어터질 정도였으며 사람들이 툭하면 강론 시간에 아멘과 찬탄을 외쳐서 자주 끊길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의 명성을 듣고 서기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3]로 임명한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야심에 찬 발언을 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논쟁

니케아 공의회 때에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힘을 합쳐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단어 사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서로 간의 간극이 너무나 큼을 깨닫고는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고자 했다.


  1.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인기는 상당했고, 특히 로마 군인들이 선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조차 죽기 전 아리우스파에 경도된 사제에게 세례받았고, 게르만족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2. 테오도루스는 성경, 신학, 수도원에 대한 저작을 41권 분량으로 한가득 남겼으나, 이단으로 선언되어 지금은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문서에서 간접적으로 왜곡된 주장만이 남았다.
  3. 콘스탄티노플이 총대주교구로 승격한 건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