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제국 역사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9월 20일 (금) 22:03 판
대경제국의 역사
History of the Korean Empire
大敬帝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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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본 문서는 대경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역사

선사 시대

강청문화권 지도.png
  • 빨간색은 청랑문화권이고, 연노색은 강북문화권이다.
  • 자세한 내용은 강청 문화 문서를 방문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현생 인류가 세계 전역으로 진출할 때인 기원전 70만년경에 강남 반도와 만주, 순지에도 인류가 이주했다. 훗날 이들 중 일부가 계속 이주하여 일본 등으로 이동했다.
빙하가 녹으며 지구의 저지대가 침수되어 현재의 지구의 지형을 갖추었고 이에 따라 강남 반도는 반도로 독립했고 만주와 순지는 초원 지대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4000년경 중국으로부터 농경 기술이 전파되어 한민족(悍民族) 역사상 최초의 농경 문화인 청랑문화(靑浪文化)가 개막됐다. 청랑문화는 강북에서 개막되어 강남으로 전파되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북부의 강북문화가 만들어졌다. 농경 사회가 개막하고 빈부격차가 생겨남에 따라 신분 사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단위의 읍락국가(邑絡國家)가 성립되는 계기가 됐다.
강북문화(江北文化)는 기원전 3500년경 시작됐는데 청랑문화와는 다르게 유목이 그 정점에 서있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신석기

대경제국의 신석기는 사량문화(社糧文化)와 경사문화(競使文化)로 대표될 수 있다. 사량문화는 기존 청랑문화에서 분화된 문화인데 기존 청랑문화는 남쪽으로 완전히 중심지가 이동되어 훗날 진국을 세우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주요 민족이 된 한인(韓人)의 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남부로 이동한 청랑문화는 남부에서 세력을 키워 언무늬토기 문화을 형성한다.
청랑문화가 남부로 세력권이 위축되자 요동 지역과 새로이 편입된 요서 지역, 이외 강북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인 사량문화가 등장한다. 이들은 흑룡강 이남의 만주 지역과 동부 개마고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신석기 문화였고 이들의 융성한 문화는 위경에 위치한 앙산 유적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사문화는 사량문화권에 있던 읍락국가들의 지속적인 교류를 했고 이에 따라 형성된 문화이기에 사량문화와 비슷한 전통과 사회상을 가졌고 이를 증명하는 아주나 문화유적지라던가 에스포스토카 유적지를 보면 양산 유적지오양-장례 신석기 유적지와 비슷한 점이 한 개 두 개가 아니다.
이후 중국이 전국시대에 접어들고 기원전 850년경부터 기원전 750년경까지 100년 동안 중국에서 사량문화가 퍼져있던 요하강 유역으로 대거 이주하였고 대부분이 기술자 출신이었기에 이들로 하여금 사량문화는 급격히 발전하며 청동기에 접어든다.

국가의 발흥

언무늬토기 문화가 강남 반도 남부에서 유행하고 강북과 순지에서는 민무늬토기가 빠르게 퍼져나가며 민무늬토기 문화로 경사문화와 사량문화가 통합된다. 사량문화는 청동기의 유래와 함께 신정사회(神政社會)가 구축되었고 좀 더 조직적인 읍락국가들이 생기며 요동 군소 국가 난립기의 말대에 진입한다. 북부 구(久) 경사문화권에 있던 순지와 첼라놉스크 지역에는 연족(衍族)이라는 부죽 연합체가 생긴다.
연족은 대족장이 사회의 정점에 있는 유목민족이었으며 연족의 씨족들 중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우으웅 씨족'은 후리 족장이 재위를 계승하고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개시, 마침내 연족을 통합한다.
하지만 북방은 여전히 농사를 짓기 어려웠고 가뜩이나 통합되었어도 내부 부족회의는 여러 파벌간 정치 싸움이 만연했다. 이에 후리는 대규모 남하책을 제시했고 부족회의는 이를 만족하였다. 하지만 일부 계층이 이에 반발하여 그대로 순지와 첼라놉스크에 머물렀고 후리를 따른 대다수의 부족민은 남하한다. 이름바 대이주(大移住)였다. 이들은 연북 지역에 정착했고 곧 이어 생존을 위해 웅족과 결탁한다. 이후 웅족과 정략혼인을 통해 통일국가인 조선을 건국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는 조선의 제1대왕[1] 태조 기희왕이였다. 기희왕 왕검은 인재 선발제도인 당과제(黨科制)를 실시하고 제3대왕 영종 정양왕은 토지제도인 지정제(支鄭制)를 실시했으며 제4대왕 혜종 고양왕이 세제인 동납법(銅納法)을 실시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시기를 조선 고씨왕조의 중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전성기를 바탕으로 성종 유양왕은 기원전 300년경에 칭왕을 하여 왕호를 왕으로 고치고 예법도 왕국에 맞게 바꾸었다. 헌데 고씨왕조도 점차 내분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당시 정양왕은 자신의 외동아들인 왕보를 대신해 형제상속제인 형속제(兄屬制)에 따라 동생인 고양왕에게 왕위를 승계시켰으나 이후 왕보의 후계가 다시 이 왕위를 되찾으려는 왕위 쟁탈전을 시작하면서 왕실은 고양왕계와 정양왕계로 나뉜다. 자세한건 조선의 왕사 문서를 참조하시오.
이러한 왕위 쟁탈전에 유명 명문가들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조선의 행정제도인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과 더불어 앞서 말한 유명 명문가들이 지방과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여 개혁파 신료들을 쫒아내고 족벌정치가 개막된다. 이렇듯 왕위 쟁탈전,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 족벌정치의 '3대악습(三代惡習)'은 조선을 국가 멸망 테크트리에 탑승시켰다.
한편 과거로 돌아가 기원전 270년경, 탁리국이 이전 연족중 순지에 그대로 남았던 이들인 찬나의 분파, 기산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멸망하자 탁리국의 유민들이 대거 강북으로 유입된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기에 강북의 토착민들에게 선진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강북 지역엔 국가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부여와 옥저는 소금의 무역권을 놓고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부여가 승리함에 따라 강북의 주도권은 쇠퇴한 조선으로부터 잠시 부여로 이전된다.

이 상황에서 조선은 간간히 중국의 연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합병되고 이후 이 전나라가 한나라로 교체되며 중원은 매우 혼란했다. 이때 많은 중원의 지식인들이 조선과 부여로 이주했고 그와중에 분서갱유로 파괴된 묵자의 여러 중요 경전의 사본들이 조선으로 유출되고 이후 조선에서 독자적인 묵가 사상인 애가가 만들어졌다. 다시 본론으로 이동하여 새로히 중원의 통일왕조로 출범한 한나라는 잦은 군사원정을 실시했고 그리고 이 표적에 조선이 들어가게 된다. 한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민심이 혼란했기에 조선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다국 시대의 개막

삼국으로 정립되다

통일

다시 핵분열

통일 국가로의 재정립

2000년 왕국의 멸망과 대경국 성립

근대화와 칭제건원, 그리고 대일항쟁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혼란한 정국

급기야 내전이 발발

그래도 혼란한 정국

제정 폐지

공화국 시대

제정 복고

현재

기타

각주

  1. 허나 이때는 단군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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