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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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제국의 역사
History of the Korean Empire
大敬帝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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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본 문서는 대경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역사

선사 시대

강청문화권 지도.png
  • 빨간색은 청랑문화권이고, 연노색은 강북문화권이다.
  • 자세한 내용은 강청 문화 문서를 방문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현생 인류가 세계 전역으로 진출할 때인 기원전 70만년경에 강남 반도와 만주, 순지에도 인류가 이주했다. 훗날 이들 중 일부가 계속 이주하여 일본 등으로 이동했다.
빙하가 녹으며 지구의 저지대가 침수되어 현재의 지구의 지형을 갖추었고 이에 따라 강남 반도는 반도로 독립했고 만주와 순지는 초원 지대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4000년경 중국으로부터 농경 기술이 전파되어 한민족(悍民族) 역사상 최초의 농경 문화인 청랑문화(靑浪文化)가 개막됐다. 청랑문화는 강북에서 개막되어 강남으로 전파되었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북부의 강북문화가 만들어졌다. 농경 사회가 개막하고 빈부격차가 생겨남에 따라 신분 사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단위의 읍락국가(邑絡國家)가 성립되는 계기가 됐다.
강북문화(江北文化)는 기원전 3500년경 시작됐는데 청랑문화와는 다르게 유목이 그 정점에 서있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신석기

대경제국의 신석기는 사량문화(社糧文化)와 경사문화(競使文化)로 대표될 수 있다. 사량문화는 기존 청랑문화에서 분화된 문화인데 기존 청랑문화는 남쪽으로 완전히 중심지가 이동되어 훗날 진국을 세우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주요 민족이 된 한인(韓人)의 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남부로 이동한 청랑문화는 남부에서 세력을 키워 언무늬토기 문화을 형성한다.
청랑문화가 남부로 세력권이 위축되자 요동 지역과 새로이 편입된 요서 지역, 이외 강북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인 사량문화가 등장한다. 이들은 흑룡강 이남의 만주 지역과 동부 개마고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신석기 문화였고 이들의 융성한 문화는 위경에 위치한 앙산 유적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경사문화는 사량문화권에 있던 읍락국가들의 지속적인 교류를 했고 이에 따라 형성된 문화이기에 사량문화와 비슷한 전통과 사회상을 가졌고 이를 증명하는 아주나 문화유적지라던가 에스포스토카 유적지를 보면 양산 유적지오양-장례 신석기 유적지와 비슷한 점이 한 개 두 개가 아니다.
이후 중국이 전국시대에 접어들고 기원전 850년경부터 기원전 750년경까지 100년 동안 중국에서 사량문화가 퍼져있던 요하강 유역으로 대거 이주하였고 대부분이 기술자 출신이었기에 이들로 하여금 사량문화는 급격히 발전하며 청동기에 접어든다.

국가의 발흥

언무늬토기 문화가 강남 반도 남부에서 유행하고 강북과 순지에서는 민무늬토기가 빠르게 퍼져나가며 민무늬토기 문화로 경사문화와 사량문화가 통합된다. 사량문화는 청동기의 유래와 함께 신정사회(神政社會)가 구축되었고 좀 더 조직적인 읍락국가들이 생기며 요동 군소 국가 난립기의 말대에 진입한다. 북부 구(久) 경사문화권에 있던 순지와 첼라놉스크 지역에는 연족(衍族)이라는 부죽 연합체가 생긴다.
연족은 대족장이 사회의 정점에 있는 유목민족이었으며 연족의 씨족들 중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우으웅 씨족'은 후리 족장이 재위를 계승하고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개시, 마침내 연족을 통합한다.
하지만 북방은 여전히 농사를 짓기 어려웠고 가뜩이나 통합되었어도 내부 부족회의는 여러 파벌간 정치 싸움이 만연했다. 이에 후리는 대규모 남하책을 제시했고 부족회의는 이를 만족하였다. 하지만 일부 계층이 이에 반발하여 그대로 순지와 첼라놉스크에 머물렀고 후리를 따른 대다수의 부족민은 남하한다. 이름바 대이주(大移住)였다. 이들은 연북 지역에 정착했고 곧 이어 생존을 위해 웅족과 결탁한다. 이후 웅족과 정략혼인을 통해 기원전 700년경 통일국가인 조선을 건국한다.[1]
조선을 건국한 이는 조선의 제1대왕[2] 태조 기희왕이였다. 기희왕 왕검은 인재 선발제도인 당과제(黨科制)를 실시하고 제3대왕 영종 정양왕은 토지제도인 지정제(支鄭制)를 실시했으며 제4대왕 혜종 고양왕이 세제인 동납법(銅納法)을 실시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시기를 조선 고씨왕조의 중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전성기를 바탕으로 성종 유양왕은 기원전 300년경에 칭왕을 하여 왕호를 왕으로 고치고 예법도 왕국에 맞게 바꾸었다. 헌데 고씨왕조도 점차 내분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당시 정양왕은 자신의 외동아들인 왕보를 대신해 형제상속제인 형속제(兄屬制)에 따라 동생인 고양왕에게 왕위를 승계시켰으나 이후 왕보의 후계가 다시 이 왕위를 되찾으려는 왕위 쟁탈전을 시작하면서 왕실은 고양왕계와 정양왕계로 나뉜다. 자세한건 조선의 왕사 문서를 참조하시오.
이러한 왕위 쟁탈전에 유명 명문가들이 개입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조선의 행정제도인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과 더불어 앞서 말한 유명 명문가들이 지방과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여 개혁파 신료들을 쫒아내고 족벌정치가 개막된다. 이렇듯 왕위 쟁탈전, 지정제와 당과제의 문란, 족벌정치의 '3대악습(三代惡習)'은 조선을 국가 멸망 테크트리에 탑승시켰다.
한편 과거로 돌아가 기원전 270년경, 탁리국이 이전 연족중 순지에 그대로 남았던 이들인 찬나의 분파, 기산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멸망하자 탁리국의 유민들이 대거 강북으로 유입된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과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기에 강북의 토착민들에게 선진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강북 지역엔 국가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부여와 옥저는 소금의 무역권을 놓고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부여가 승리함에 따라 강북의 주도권은 쇠퇴한 조선으로부터 잠시 부여로 이전된다.

이 상황에서 조선은 간간히 중국의 연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합병되고 이후 이 진나라가 한나라로 교체되는 등 중원은 매우 혼란했다. 이때 많은 중원의 지식인들이 조선과 부여로 이주했고 그 와중에 분서갱유로 파괴된 묵자의 여러 중요 경전의 사본들이 조선으로 유출되고 이후 조선에서 독자적인 묵가 사상인 애가가 만들어졌다.
한편 새로히 중원의 통일왕조로 등극한 한나라 안에서 노관이라는 제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압됐는데 한나라 정부는 노관이 반란을 일으킨 연나라 지역에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이에 연나라 지역에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은 근처에 인접한 조선과 부여로 이주했고 그중 위만을 중심으로 한 무리도 조선으로 이주한다. 조선의 조정은 고양왕계의 폐왕 왕부[3]이 죽고 헌왕 왕준[4]이 즉위한다. 헌왕 왕준의 뒤에는 사씨 가문이라는 유력 가문이 있었다. 사씨 가문는 오랫동안 지방의 니계상[5]과 조선상[6]을 독차지 한 유력 가문이었다. 사씨 가문은 자신들의 기반인 요서의 소유(昭裕) 지역에 다른 유력 가문인 강씨 가문의 권력이 침식해오자 이를 막고자 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을 활용하기로 한다. 사씨 가문은 위만을 금흥(昑興)후[7]라는 봉작을 하사하고 한음의 니계상에 임명한다. 위만은 국경을 침범하는 유민족을 막아내고 이들을 교화시켜 자신의 병력으로 편입한다. 이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중앙 정계로 진출했고 그의 가신들도 중앙 정계에 입문한다. 위만은 여러 관직[8]을 거치며 사 씨 가문에서 떨어져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이때 위만은 부여의 1책 12법을 모방한 16조법을 공포한다.[9] 위만은 영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쳐 민심을 크게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정변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위만은 거짓 장계를 헌왕에게 올려 "변경이 지금 한나라의 공격을 받는다"라 보고했고 헌왕은 위만에게 한나라를 막으라고 3만의 군을 주었으나 도리어 위만은 조선의 수도인 아사도(阿斯都)로 상경하여 경국사 최초의 정변인 정미정변을 일으킨다. 조선의 중앙군은 위만과 맞서 싸웠지만 조선군과는 달리 한나라에서 들여온 철기로 무장한 정변군을 막을 수 없었고 기원전 194년 5월, 아사도가 함락된다. 헌왕은 자결했고 사씨 가문은 강씨 가문과는 반대로 위만의 개선식을 직접 개최하며 위만과 결탁한다.[10] 헌왕의 아들인 세자 왕직이 아사도 인근 장담포에서 남은 고씨왕조의 일파와 항전하다 전사하면서 고씨왕조의 가신과 조정의 신하 대다수가 위만에게 투항했고 투항하지 않은 이들은 고문이나 사형으로 죽고 변경으로 축출된다. 지방을 제외한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위만은 기원전 194년 7월, 왕에 오르면서(태왕 위만) 근 895년간 이어진 고씨왕조가 무너지고 향후 조선을 1109년 동안 지배할 위씨왕조가 조선의 집권 왕조로 등극한다.(전기 위씨왕조)
전기 위씨왕조는 기존 3대악습에 대한 개혁과 지방행정구역에서 통치관을 폐지하고 지역을 12개의 향(鄕)으로 나누어 '향'을 향정관(鄕政館)으로 하여 관리하게 했으며 문경당(文經堂)이라는 지방교육기관을 만들어 인재를 길렀고 극악의 인재풀이를 없애보고자 청년 인재들을 등용하고 자신을 따르는 가문의 자제들을 적극 등용하였다. 하지만 태왕 위만의 개혁은 오직 수도인 아사도에만 국한되었고 지방엔 이러한 개혁이 효력을 보지 못하였다. 지방의 유력 가문은 태왕 위만을 '역적(逆賊)'으로 규정하고 고씨왕조의 복고를 수십차례 시도했다. 더군다나 이 지방 유력 가문은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지위를 잃을까봐 이러한 개혁을 단행하는 태왕을 불신하였다.
이 상황을 지켜 보던 한나라의 혜제가 마침내 10만 대군을 일으켜 기원전 191년,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1차 조한전쟁).

태왕 위만은 니계상 을 영통사(營統使)에 봉하여 1만의 군을 주어 군사 요충지인 흠령(欽岺)과 주례(周禮)에 진을 치게 하고 세자 위정양으로 하여금 태선장군(太善將軍)[11]과 이영사(理領事)[12]에 임명하고 소유에 파견해서 소유에서의 징집을 명한다. 한나라혜제는 군을 남군과 북군으로 나누어 남군은 자신이 친정을 하고 북군은 대장군 이성이 지휘케 했다. 남군이 주례 지역을 공격하자 주례를 지키던 도부통사(導副統使)[13] 수인(收人)은 한나라군을 향해 항전하다 전사했고 주례가 함락된다. 하지만 북군은 대장군 이성을 중심으로 한 파벌과 혜제의 어머니인 고황후 여씨의 수족, 여록의 파벌로 나뉘어 서로 당쟁을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군의 사기가 매우 떨어졌다. 이러한 상태로 북군이 흠령을 공격하자 흠령을 지휘하던 니계상 삼의 군에 격파되어 여기 저기 패잔병이 흩어진다. 남군은 그대로 진군하여 흠령을 점령한 북군과 함께 협공하여 소유를 점령하려 했으나 북군이 흠령을 못 점령하자 이에 길을 우회하여 창례(創禮)와 방백(方白)을 점령하고 소유를 공격한다. 하지만 소유에는 니계상 삼의 군과 증원군으로 온 도부통사 군락한의 군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혜제는 소유를 재공격하는 대신 요서의 주요 지역을 공격해 약탈했고 조선측도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 화친을 요청했고 한나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제1차 조한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 당시 위만은 전시를 이유로 지방의 유력 가문에 사병을 인수했고 이를 다시 유력 가문에 돌려주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태왕 위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중앙군에게 대패하고 태왕 위만은 지방의 유력 가문을 축출한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위만은 국가의 기틀을 더욱 다졌는데 인재 선발 제도인 '정삼팔성제(正三八性制)'와 조세 제도인 '기입세(基入稅, 토지세)'와 '교세(敎稅, 학비)', '정세(程稅, 인두세)'와 토지 제도인 두창제(竇廠制)를 실시하고 민심 안정책으로 세금을 경감하고 군역과 공역을 1년 동안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태왕 위만은 국경과 가까운 아사도를 대신할 새로운 수도인 왕검성을 짓고 그 곳으로 천도한다(왕검성 천도).
태왕 위만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기원전 178년, 정양왕이 즉위한다. 정양왕은 상공업을 부양시키고 통치 기구를 정비했으며 난잡했던 관제를 개혁해 필요 없는 관직은 처분했다. 또한 공신세력인 사씨 가문에게 토지를 주어 그들을 포섭하는 포섭책을 사용했다. 이들 의 안정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계속 반란이 일어났는데 기원전 180년에는 남도성(南都城)에서 일어난 진세의 난과 기원전 178년 정양왕 즉위 원년에 일어난 도북상(都北相)[14] 사수이 있었고 사수의 반란군이 한동안 도읍인 왕검성을 점령하는 등 초기 위씨왕조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철인군주 우거왕이 즉위한다. 기원전 150년에 즉위한 우거왕은 우선 군제를 3복 30사제(三服三十使制)로 개편했고 군비를 대규모 증강하는 한편 도로망을 재정비했다. 우거왕은 기원전 143년, 강북 중계 무역의 요충지였던 강북의 성읍국가들을 조선의 영향권에 두기 위해 부여와의 전쟁을 일으켰고(조부전쟁) 비류국의 도읍인 간지에서 결정적으로 조선군이 부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전쟁은 조선이 승리한다[15]. 우거왕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지방 제후들에게 지방의 땅을 주어 관리하게 했고 기존 행정제도인 도양제와 향정관을 폐지한다. 재건된 국가와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거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하지않는 남부의 한인의 나라인 진국 원정에 나서서 한동안 훗날의 마한땅을 관할했으나 군량미가 떨어지자 철군하기도 했다. 이 우거왕의 치세 동안 조선의 위씨왕조는 전성기를 맞는다.

다국 시대의 개막

삼국으로 정립되다

통일

다시 핵분열

통일 국가로의 재정립

2000년 왕국의 멸망과 대경국 성립

근대화와 칭제건원, 그리고 대일항쟁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혼란한 정국

급기야 내전이 발발

그래도 혼란한 정국

제정 폐지

공화국 시대

제정 복고

현재

기타

각주

  1. 이런 경우엔 조선의 제1왕조인 왕씨왕조로 불러야 했으나 이후 등장한 고려의 왕씨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로 교체하여 '고'씨왕조가 됐다
  2. 허나 이때는 단군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3. 일명 부왕
  4. 일명 준왕
  5. 지방 통치관(지방행정장관)의 고문, 하지만 고씨왕조 후기엔 사실상 통치관 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짐
  6. 조선내 지방 중개무역을 통솔하는 관직
  7. 금흥의 제후
  8. 소유 통치관->작저(酌猪) 기행관->기율사->영사
  9. 공포 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백성은 이 크고 아름다운 법을 보아라. 백성은 이 법을 보고 국왕 전하의 지엄한 말을 엄숙히 이행하라.
  10. 위만도 자신을 따르는 토착 세력이 필요했기에 사씨 가문을 받아드린다
  11. 지금의 사단장
  12. 전시에 설치되는 관직으로 예하 태선장군들의 군령권을 인수하여 군을 총지휘하는 관직이고 평화시에 설치되면 태선장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부대를 지휘한다.
  13. 지금의 사단장이지만 두개 이상에 복수의 사단을 지휘했다.
  14. 수도인 왕검성의 북부 지역의 행정력을 포괄하는 관직
  15. 이때 부여의 해수리왕이 전사하고 중앙정부가 공백이 된 틈을 타 지방의 사출도가 득세하면서 부여는 장시간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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