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마 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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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리마 제국의 역사는 1741년, 러시아 해군 소속 비투스 베링에 의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고대

러시아 이전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당도하기 전까지 라리마는 여전히 신석기 시대 수준에 불가했다. 이들 민족은 코랴크인과 알류트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약 5,000 ~ 7,0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캄차카(알류산) -> 아니안 -> 라리마 섬 순서로 넘어 왔으리라 추측된다. 이들은 아니안 섬 전역, 라리마 섬 북부 멀린 지역에 살았다. 또 셀레스틴 섬의 폴리네시아인들은 기원 후 1,000년 경에 하와이에서 넘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세

개척기

이 지역이 처음 발견된 때는 1741년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41년, 비투스 베링이 베링 해협과 알류산 열도를 발견할 때 라리마 섬과 아니안 섬도 발견되었고, 1747년 올레그 솔로브요프가 아니안 섬을 정착지로 삼았고 아니안 섬과 라리마 섬 일대의 이름을 오텬 보스토크(대양을 점령한다.)라고 이름 짓는다. 1754년 바짐 그리고리예프는 현재의 라리마 멀리니아 지역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아주 조금씩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1780년 경에는 인구가 1,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중 900명 가량은 아니안 섬에, 600명 가량은 라리마 섬에 정착했으며, 원주민과 대치했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가 극동을 개척할 동안,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을 앞세운 영국의 3차 항해에서 쿡 선장은 셀레스틴 섬을 발견했다. 1786년부터 영국 정부는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 했지만, 뉴사우스웨일스[1]에 밀려 각광받지 못하다가 1791년에는 완전히 끊겨버린다.

1차 대호황

러시아의 페벨 1세와 알렉산드르 1세는 라리마 지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스페이트 지역을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주도로 지정하고 이민정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북부 멀린 황무지로 밀려났으며, 아니안 섬에서는 버려지거나 학살당하는 등 인구수가 급감한다. 1799년, 1,500명에서 시작해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1829년에는 54,000명까지 증가했고, 이듬해 러시아령 아메리카에서 분리해 나와 러시아의 한 주, 라리마 제도가 되었다. 또 영국은 인데버 섬에 이주자들을 이주시키고 해군력을 집중시키는 등 태평양에서의 그레이트 게임도 가속되었다. 러시아는 라리마를 손에 넣음으로써 일본과 중원, 동남아 등 동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 호황기에 라리마에서 석유와 광물, 특히 금이 발견되자 1840년대 러시아의 많은 평민층이 라리마로 집중되었으며, 멀리니아의 인구는 50만, 라리마 전체의 인구는 110만에 달할 정도로 강성해졌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제와 너무 멀리 떨어진, 그것도 북아시아의 섬이라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닌 라리마인이라는 라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으며, 이는 후에 라리마인들이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것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근대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과 라리마의 독립

1904년,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내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징병제가 실시되었으며, 라리마 청년들은 러시아의 해군으로 복무하게 된다. 러시아는 발틱함대가 오기 전까지 라리마의 소규모 군함들로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일본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고, 발틱함대가 괴멸당하자 1905년,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라리마의 청년들이 죽어갔다는 사실로 인해 라리마 제도의 도민들은 러시아 당국에 불만을 품게 된다. 이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삼국협상을 조직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맞서 싸웠으며, 이때도 인구와 자원이 많은 축에 속하는 라리마에서 많은 인적 자원과 군수품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 서부, 남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오히려 피어오르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으며, 1914년 후반부터 데모, 폭력 시위의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전쟁이 집중하느라 라리마 주민들을 위할 새가 없었으며, 이는 러시아 당국이 라리마를 착취하는 모양새로 비춰지고, 급기야 1915년부터는 라리마 제도 해방위원회가 설립되어 광산, 러시아 관공서 등을 습격하기 시작했고, 일본과 미국, 러시아 등지에서 해방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들 주요 지지층은 왕당파와 공화파였으며, 몐세비키도 소수 있었으나 대체로 라리마 제도의 주민들은 러시아 본토의 주민보다 부유한 편이었기에 볼셰비키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라리마측 인원도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3월부터 10월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하지만 10월 혁명이 터지고 내전이 발발하자 라리마 내에서도 라리마 내전이 벌어지지만 이는 3달 후 백군의 승리로 종결되고,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의 본거지처럼 쓰였다. 그 후 러시아에서 적군이 승리하자 라리마는 핀란드와 같이 독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 틀이 갖추어질 때 가까웠던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당시 러시아와의 여러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명장이었던 라리마 1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1918년, 라리마 왕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2차 대호황

라리마는 영미권의 지지를 받아 소련, 일본을 경계할 대상으로써 많은 지원을 받는다. 그동안 자원과 이익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 국가 자체 개발을 못하고 있었는데, 막대한 자원과 영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너지 효과를 냈다. 당시 토목업이 흥해 포스페이트 운하, 미메타이트 - 다이아스포어 교각 등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대공황

이렇게 쑥쑥 성장하는 신생국가 라리마였지만 끝은 있었다. 당시 라리마는 국가 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했는데, 대공황이 찾아오자 라리마의 물건이나 광물을 사는 국가가 없어진 것이다. 대공황이 닥치자 라리마의 경제또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업률은 30%에 달했고, GDP의 41%이 증발했다. 많은 수의 경제학자들은 다른 국가에 비해 발달한 내수 시장, 지리상의 위치로부터 나온 이익이 없었다면 라리마가 후진국이 되거나, 다른 국가에게 완전히 병합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소전쟁

1941년부터 2국의 긴장은 높아져 갔다. 당시 아니안 섬을 갖고 있었던 소련이 자신의 전투기로 라리마의 영공을 지나기도 했고, 양 측에서 불법 조업이 활발해 나포되는 선박이 많았고 그중엔 결국 사형되는 인물들도 있었다. 또 아니안 섬에서 라리마 내 극단주의자들의 총기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다. 1941년 4월 17일 국민 앞에서 연설 중이었던 베릴 3세와 궁내부, 외무부 대신과 왕자가 당시 연설대 아래 숨겨져 있던 폭탄으로 인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주모자는 러시아인이였으며, 테러를 감행한 후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라리마 왕국의 국민들은 소련과의 전쟁을 외쳤으며, 비교적 온건파였던 내각도 원래는 전쟁을 원치는 않았으나, 황제 암살 사건으로 인해 전쟁 직전 수준의 준비를 하게 된다. 또 왕자와 황제가 동시에 사망함에 따라 베릴 3세의 장녀 베릴 4세, 베릴 여왕이 즉위하게 된다. 라리마가 전쟁을 원하는 것은 소련에게도 오히려 좋은 신호였다. 대공황의 낫을 피한 소련은 폴란드 분할로 인해 더욱 자신만만해졌으며, 골칫거리였던 라리마 왕국을 정벌하면 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194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북부 군사도시 아르한겔스크 항구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다. 이 사건은 소련 측에서 기록을 말소했기 때문에, 라리마 왕국 극단주의자가 테러를 감행했는지, 소련이 꾸민 일인 지 알 수는 없지만, 소련은 이를 구실삼아 5월 1일 라리마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라리마 왕국도 오히려 소련 정벌론이 대두되기까지 한 상황이었기에 거리낌없이 전쟁을 시작한다. 초기에는 당연히 소련이 우세했다. 라리마 왕국은 자신만만하게 자신들의 신식 무기를 뽐냈으나, 소련의 강한 기술력 앞에 처참히 무너져 5월 21일 다이어스포어 방어선이 뚫리고, 1주 뒤 5월 28일 멀리니아 방어선도 무너져 북부 지방이 점령당했다. 또 멀리니아 전선에서 벼텨오던 라리마제국군은 계속 후퇴해 6월 1일 미메타이트 전 지역을 내주고, 6월 10일 라리마 시티와 남우라니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소련에 의해 점령당하기에 이른다. 또 6월 24일 우라노 섬마저 함락되면서, 라리마에겐 포스페이트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이 포스페이트는 나소전쟁의 종결까지 결국 함락당하지 않았는데, 소련은 포스페이트를 충분히 함락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로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인재들이 많이 사라져서 그렇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군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진다. 소련군은 극동 지역의 군 병력을 서부 전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라리마 지역에 최소한의 군 병력만 남겨 두었으며, 이는 라리마 왕국에게 청신호였다. 라리마 왕국은 마지막 희망인 포스페이트를 쥐어짜내 1941년 겨울까지 원래의 영토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사기가 넘친 라리마제국군은 소련군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빼는 동안 북진하기 시작한다. 1942년 5월 7일 라리마 왕국은 아니안 섬의 핵심지 테린스크를 함락하고, 소련군을 산간지대에 고립시키며, 5월 말에는 코만도르스키예 제도와,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 츠키를 점령했다. 소련군도 나름대로 총력을 다했으나 서부전선을 관리하기도 힘든데 동부전선까지 신경쓰기 어려웠다. 이 시기 라리마 왕국은 현대의 라리마 제국이 되었으며, 이 이름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6월 중순이 되면서 라리마 제국은 예상치도 못한 적을 맞이한다.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일본 제국이 남우라니아에 대규모 공습을 일으킴에 따라 라리마가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라리마는 부랴부랴 소련과의 화해 모드에 돌입했고 나소전쟁은 1942년 6월 19일, 순식간에 종전되었다.

1. 아니안 섬을 라리마에게 영원히 양도한다.
2. 코만도르스키예 제도와 캄차카에서 라리마 제국군을 완전 철수한다.
3. 아니안 섬에 고립된 모든 소련군를 소련 본토로 송환시킨다.
—  종전 협정 내용 일부

태평양 전쟁

1942년 5월 31일, 일본 제국이 라리마 제국을 침범한다. 두 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한쪽은 우라니아를, 다른 한쪽은 노시안과 세나딘을 공격하였다. 일본의 목적은 라리마의 기지화, 자원 강탈이었다. 아직 소련과의 포로 송환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라리마 제국은 곧바로 미국과 동맹을 결성했다. 처음에는 수도가 포위당하는 등 고전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시작으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하고, 라리마 운하 해전, 크로프스키 전투, 우라니아 해전을 거치며 1943년 8월까지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라리마 제국도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현대

재건기

비록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지만 피해는 추축국 못지않을 정도로 막심한, 이름뿐인 승리였다. 소련과 일제에게 두 차례나 영토가 황폐화되었고, 특히 라리마 제국의 식량창고 남부지역에는 식량을 재배하지 못할 정도까지 토질이 나빠져서 라리마 제국은 1949년까지 기아와 굶주림에 빠진다. 하지만 1950년, 애치슨 라인에 라리마가 포함되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라리마는 대만, 일본과 더불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경제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라리마 제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이는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 이어진다.

셀레스틴 내전, 라리마 개입

라리마 제국은 1963년, 경제를 완전히 회복하고, 상승세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한다. 이전까지의 1차 산업은 점차 중공업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경제 성장률은 연간 11%에 이를 정도였다. 한편 영국의 식민지였던 셀레스틴 지역은 영국과의 긴 협상 끝에 1969년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부패한 지도자와 나라 안정화 실패 등으로 인해 반란이 또다시 일어나고, 셀레스틴 공화국은 내전에 빠지게 된다. 처음 라리마는 이 내전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 범죄자들의 약탈 등으로 라리마 동부 칼세르 주의 치안이 크게 나빠지고, 심지어는 셀리스틴의 정부군 조차도 반란군 소탕을 목적으로 라리마 본토에 상륙을 시도하자 라리마 제국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셀레스틴 내전에 개입한다. 라리마 제국군의 셀레스틴 점령은 매우 빨랐다. 1976년 여름에 이루어진 상륙 작전에서부터 1977년 겨울 잔존세력을 모두 정벌하고 치안을 안정화하기까지 불과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제를 받기도 했으나, 셀레스틴 지역의 강한 자치권과 족비정책을 펼치자 1990년대에는 대부분 이런 논란이 사라지고 셀레스틴 자치주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로써 굳혀진다.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라리마에게 직접적인 안보위협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92년, 주라미군이 철수하고, 1998년 러시아와 결국 수교를 맺으면서 라리마 제국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또한 2001년 OECD의 회원국이 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해 경제가 휘청이기도 했지만 탄탄한 기반 사업으로 인해 2020년대 중반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하고, 2017년에 베릴 6세가 즉위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