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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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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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1]
琉球國|ルーチュークク
류큐 번[2]
琉球藩|ルーチューバーン

85% 53%
국장[3]
52%
상선기[4] 국새[5]
상징
국가[6] 石なぐの石の大石なるまでも
작은 돌이 바위가 될 때까지
위치
파일:Ryukyu orthographic.svg
류큐 왕국의 강역[7]
1429년 ~ 1879년
성립 이전 강등 이후
삼산 시대 류큐 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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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년 류큐 통일
→ 류큐 왕국 건국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
→ 에도 막부의 아마미 군도 점령
1872년 일본 제국의 속령으로 강등
1879년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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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아마미오섬 이남의 류큐 열도
수도 슈리[8]
면적 2,271km2
행정구역 45마기리 6시마 (명목상 66마기리 6시마)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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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86,787명 (1879년)
민족 류큐인
언어 류큐어(오키나와어)
종교 류큐 신토, 불교, 유교, 신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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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통화 류큐몬(琉球文)[9]
현재 국가 일본 국기.svg 일본 오키나와현, 가고시마현[10]

개요

슈리성 정전
슈리성 정전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나라. 1879년에 일본 제국에 강제로 병합되어 멸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琉球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류큐는 일본에 병합되기 전에도 고대부터 일본과 언어나 문화 면에서 가까운 나라였다.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되어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류큐 열도라고 부른다. 류큐 왕국의 영토 일부였던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류큐인은 아이누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다. 아이누인 중 일본 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누인이 조몬인은 아니다. 아이누인은 유전적으로 고대 북시베리아인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고대 조몬인은 동남아시아에서 현대의 오키나와, 쓰시마,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야요이인이 지배권을 가지면서 조몬인의 인구가 줄어든 걸로 보고 있다. 고대 북시베리아인의 경우는 캄차카 반도, 사할린,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발전한 나라였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종종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했었다. 하지만 이후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했고,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를 통해 류큐 일대를 점령한 미국은 류큐를 일본에서 떼어내고 군정을 실시하여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도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켰다가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차례로 일본에 반환했다. 그래서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현재의 오키나와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현도 일본에 반환되었다.

수도는 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오키나와현의 수도인 나하시의 일부가 되었다. 왕궁은 슈리성이었다.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과는 분리된 나라(공동체)를 유지했었지만 그렇다고 본토와 완전히 배경부터 다른 문화나 혈통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의 탐라국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청나라 시대의 티베트나 위구르, 몽골처럼 본토 왕조의 종속국 조공-책봉 관계의 그 종속국이 아니다.이라서 외교권이 결여되었던 탐라국과는 달리 류큐 왕국은 자주 외교를 수행하던 독립 국가였다. 지리적으로도 제주도와 한국 본토 간 거리에 비해 류큐와 일본 본토 간 거리는 훨씬 멀고, 제주도보다 훨씬 늦게 본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독자성이 더 강했다. 중국의 묘족, 좡족 사례처럼 수백 년 전에 한반도 본토 국가에 병합되어 본토와 동화되어 온 제주도와는 달리, 류큐는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 후반에 와서야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었고 심지어 메이지 유신 시기에조차도 형식적 정부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조약을 맺기도 했고, 아직 서구 열강에 대한 발언권이 약했던 근대화 초기 일본으로서는 미국이 "류큐는 독립국이 맞나?" 하는 확인에 국제정세의 악화를 우려하여 "그렇다"라고 응답하기도 했다(김광옥 2007). 김광옥. (2007). 19세기 후반 일본의 琉球병탄과 淸과의 영토분쟁 처리. 역사와경계, 65, 133-15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27년간 미국의 군정에 놓이면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던 역사적 배경 때문에 아직까지 현지 주민들도 본토와 류큐는 다르다는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고, 그래서 류큐 독립운동이 있기도 하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로 독립 주장이 주류는 아니고, 소수 의견인 상태다. 한반도 본토와의 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할지언정 어쨌든 역사적으로 한 나라라는 인식이 뿌리박혀서 분리 독립 여론이 사실상 없는 수준인 제주도와는 다르다.

각주

  1. ↑ 1429 ~ 1872
  2. ↑ 1872 ~ 1879
  3. ↑ 류큐 왕가의 문장인 휘자이구문(左御紋)이다. 히다리 미쓰도모에(左三つ巴)의 일종이다.
  4. ↑ 류큐 왕국 국기.svg이전에 기재되어 있던 깃발은 1854년 일본에서 제작된 "만국박기도보(万国舶旗図譜)"라는 저서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해당 깃발이 사용된 사례나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오키나와현립박물관의 연구자료에서도 해당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1] 아직까지도 해외를 막론하고 많은 매체에서 류큐의 국기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태극기처럼 근대에 만들어진 국기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그러나 "琉球船の図"등의 회화자료에서 류큐의 선박의 선미에 비슷한 모양을 상하반전한 형태의 노보리가 위의 상선기와 함께 묘사된 사례는 있다.
  5. ↑ 수리지인(首里之印)이라고 적혀있다. 자체적으로 만든 황제국 양식의 새(璽)와 보(寶)도 겸해서 쓴 한반도, 베트남과 달리 자체적인 제작 사례는 없다. 류큐 왕국은 국력의 약세로 대만의 동녕국과 더불어 전형적이고 정석적인 제후국 체제를 지향했다.
  6. ↑ 정확히는 준 국가로 공식 국가는 아니였다.
  7. ↑ 사키시마 제도는 1500년에 편입되었으며, 아마미 군도(현 가고시마현 소속)는 15세기 중후반 복속되었으나 1611년 일본 에도 막부 휘하의 사쓰마 번에게 할양되었다. 대외적으로만 류큐 영토인 척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사쓰마 번이 직접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지배하는 땅이 되었다. 토카라 열도는 인구가 거의 없던 곳이라 기록이 많이 없으나 영향력은 어느 정도 미쳤던 걸로 확인되며, 아마미 군도가 할양될 때 완전히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확신된다. 다이토 제도의 경우 류큐 왕국이 멸망하고 1885년이 되어서야 오키나와현에 편입되었다.
  8. ↑ 지금의 나하시 동부
  9. ↑ 이 외에 중국의 전(錢)이나 일본의 문(文)도 함께 통용되었다.
  10. ↑ 아마미 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