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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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5왕국 이전(단원제) 의회 역대 의장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4대
초보자어때
제5~6대
민창원
제7대
루돌프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5왕국 이전(단원제) 의회 역대 의장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9대
이맹박
제10대
민창원
제11대
김정은
바람나라 국기.png 역대 바람나라 재건위원회 위원장 바람나라 국기.png
신설초대
민창원
제2대
구교혁
민창원 (閔彰元)
Minchangwon.jpg
이름민창원 (Min Chang Won), 이승우 [1]
국적가상국제연합 하늘미르왕국 대부여국 바람나라
학력공립중학교 졸업
공립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소속ANM
바람나라 왕실
하늘무역동맹
정당무소속
직업언론인
약력제5~6대 하늘미르왕국 왕국의회 의장
제10대 하늘미르 왕국 왕국의회 의장
바람나라 재건위원회 위원장
제5~10대 하늘미르 왕국 왕국의회 의원
하늘무역동맹 사외이사
국민회의 당대표
한울당 원내대표
미래의 대안 당대표
ANM 논설위원
서명민창원사인.png
民피니언은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일요일에 기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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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M

민창원(영어: Min Chang Won, 閔彰元)은 2017년 7월 3일부터 네이버 가상국가에서 활동을 시작한 가상국가인이다. 하늘미르왕국의 대표적인 정치가 중 한 명이었으며 제10대 왕국의회 의장 퇴임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후 1년 2개월 동안 잠시 휴식기를 가졌고 2020년 2월 복귀와 동시에 정계 복귀는 기필코 없다고 선을 그었으며 복귀와 동시에 ANM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가상국가에서 활동하기 이전에는 정치모의전에서 활동했다. 정치모의전이 쇠락의 길을 걷자 정치모의전을 떠나 가상국가에 입문했다. 가장 처음 입문한 가상국가는 남화국으로 남화대학교 총장과 각종 공직을 거쳤으나 활동량의 급감으로 하늘미르 왕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하늘미르 왕국으로 활동을 옮긴 후 각종 공직과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하늘미르의 대표적인 정치가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부정한 짓과 특정 인물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는 등 하늘미르 정치의 어두운 부분에서 선봉에 서있던 정치가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하늘미르 의회 시스템과 각종 법률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하늘미르=정치모의전이라는 오명을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이 되었다. 다사다난한 정치가로서의 활동을 뒤로하고 2018년 12월 31일 제10대 의장으로서의 활동을 끝으로 하늘미르 정치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 후 2020년 2월까지 약 1년 2개월간의 휴식 기간을 가졌고 2020년 2월 16일 ANM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면서 하늘미르와 가상국가 활동을 재개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휴식기간 동안 여러 내각에서 정계 복귀와 공직 요청이 있었으나 일절 고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복귀를 하면서도 다시는 정치가와 공직으로서의 활동을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현재는 ANM의 오피니언을 맡아 매주 일요일 오피니언(사설) 民피니언과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 기고되는 독서칼럼 민의의 서재를 기고하고 있다.

가상국가 입문

2017년 7월, 정치모의전의 활동이 줄어듦에 따라 다른 모의전 사람들과 함께 가상국가로 진출했다. 가장 먼저 진출했던 국가는 남화국이었다. 남화대학교 총학장을 비롯해 교육보건성 장관, 추밀원장 등 중요 요직을 역임했으나 계속되는 활동 인구 유출로 인한 활동량 감소 등의 요인으로 남화국은 침체에 빠지게 되면서 민창원은 본인이 임시대사로 있던 하늘미르왕국으로 활동을 옮겼다.

당시 남화국의 국왕이었던 김연화 국왕의 가상국가에 대한 이념은 민창원의 가상국가 이념을 정립하는데 일조했다. 김연화 국왕은 철저한 설정 중심의 가국을 지향했으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설정을 구성해야 한다는 설정중심주의에 따라 남화국을 운영했다. 이에 국왕의 이념에 동조한 민창원은 추후 모든 가상국가에서 설정중심주의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미르 왕국에서의 활동

Flag of Hanulmir.jpg 가상국가 하늘미르 왕국에서 활동한 인물
이 인물(혹은 사용자)은 당신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는 국가가상국가 하늘미르 왕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으며, 하늘미르 왕국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Emblem of Hanulmir.jpg

국민중심당 평당원 시절

민창원은 하늘미르 왕국에 진출 한 후 국민중심당에 최고위원 자격으로 입당했다. 당시 한비자 총리의 부적절한 행동에 따른 보수신당의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중심당은 가장 많은 당원을 모집했고 차근차근 총선을 준비했다. 하늘미르 최초로 중도정당의 집권 가능성에 국민중심당 내부에서는 기대의 목소리가 높았졌다. 그리고 선거결과 국민중심당이 제1당의 지위를 얻으며 연립정부 결성을 통해 총리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창원 의원은 제5대 왕국의회 의장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선언을 하였다. 당시 석스 의원도 의장 출마 의사를 내비췄으나 민창원 의원을 지지하면서 국민중심당 의장 후보로 오르게되었다. 그리고 당시 연립정부 일원이었던 민주당 모니터링 대표가 의장 선출안을 발의하고 본회의에서 가결되어 공식적으로 제5대 왕국의회 의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제5대 왕국의회 의장 시절

왕국의회 의장에 선출된 민창원 의장은 다양한 의회시스템 도입을 추진했다. 우선 왕국의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해 원내교섭단체 제도를 신설하여 의장과 교섭단체 대표의원 간의 긴밀하고 조속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임위원회 제도를 개편하여 법안의 심사와 논의의 전문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발생했다. 민창원 의장은 상임위원회 위원 인선에 대해서 모든 정당의 대표의원이 합의해 조속한 시일내에 합의안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만약 여야의 정쟁으로 합의가 불발된다면 인선을 의장의 재량으로 강행할 뜻도 밝혔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일부 야당의 계속된 반발로 결국 여야는 상임위원 합의에 실패했고 민창원 의장은 이전에 예고한대로 상임위원회를 의장의 재량에 따라 상임위원회를 배분할 것임을 개진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인선이 완료되었다.

민창원 의장은 상임위원회 개편 외에도 의사일정 제도와 최초로 예산안을 작성하기 위해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또 차가워진 여야 정국을 풀기 위해 의원 대항 스포츠 데이를 개최했으며 왕국의회 최초로 의원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상임위원회와 의원회관의 생산적인 이용을 위해 왕국의회 설계도 제작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왕국의회로 거듭나기 위해 왕국의회 로고 변경과 마스코트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야의 차가운 정국을 타파하기 위한 민창원 의장의 노력은 모종의 이유로 변질되어 극단적으로 치닫고 만다.

최고재판소법 사건

민창원이라는 인물에게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사건
입법부 수장이 사법부 수장을 몰아내려한 초유의 사건

당시 하늘미르 정계에서는 한비자 전 총리에 대한 특검이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한비자 전 총리의 부계정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국가사회주의당을 운용하면서 제1야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국민중심당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잃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온 방안이 정당 해산이었다. 정당을 해산하기 위해서는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최고재판관이었던 김우석 판사에 대해 국민중심당 일부 세력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를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고안해낸 장본인이 바로 민창원 의장이었다.

민창원 의장은 기존에 없던 최고재판소법을 신설해 김우석 판사를 몰아내려고 했다. 민창원 의장이 당시 발의한 최고재판소법의 최고재판관 정년을 이용해 김우석 판사의 나이보다 낮게 만들어 당연퇴직 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계략을 꾸몄다. 결국 이 졸렬한 계획은 당사 채팅방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무산되었고 국민중심당은 큰 비난과 함께 대부분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계략의 고안자인 민창원 의장 본인에게도 외부로부터 정치적 비난이 쇄도했으며 이 사건으로 정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제5대 왕국의회는 해산하게 되었다.

현재 민창원 前 의장은 그 당시 사건에 대해 회고하면서 매우 부끄럽고 경거망동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사건에 대한 아무런 변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어리석었던 한 사람이 정권이 눈이 멀어 이와 같은 경망스러운 행동을 했기에 한없이 부끄럽고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정계에서 물러나고 언론인 생활을 할 적에는 매일 그 사건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통회(痛悔)하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 시절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창원 의장은 충분히 정계은퇴를 할만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은퇴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말소되어 어떻게 민창원 의장이 정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오리무중이다.

아무튼 민창원 의장은 제5대 왕국의회가 해산된 후 127명의 의원과 함께 하늘미르당[2]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하늘미르 경제가 침체되었다고 주장하는 한비자 전 총리가 창당한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제6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한비자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졸렬한 짓까지 벌인 민창원 의장이 한비자 전 총리의 정당에 들어갔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으로 보인다.

민창원 위원장은 왕국의회 의원 공천에 있어서 최초로 점수표를 제작해 점수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을 차등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의 공천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공관위원끼리 주관적인 입장에서 채점했다는 문제와 공관위원장 본인이 자신을 채점한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당 내부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민창원 위원장은 3번의 수정을 거쳐 공천안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공천을 마무리한 후 민창원 위원장은 선거운동에 전념했다. 당시 하늘미르의 선거 방식은 국내 선거 반영비율이 50%였고 국외 선거 반영비율이 50%였는데 민창원 위원장은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선거 비율이 사회적으로 전혀 합의하지 않은 사항이라는 명분으로 주장했지만 사실상 국외 선거에서 불리한 공화당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공화당 내부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맹박 후보가 로베르토 알 미르 국왕에 대한 비판성 글을 기고하자 이를 비판하며 당 윤리위원회 제소를 주장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은 당초 마지노선으로 정한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171석을 얻으면서 내홍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비자 대표가 부계정을 이용해 부정선거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하늘미르 정계는 혼란 그 자체였다. 민창원 위원장은 한비자 대표의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부정선거가 사실로 드러나자 공화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한비자 대표가 카페를 탈퇴함에 따라 탈당을 철회했다. 민창원 위원장은 부정선거에 대해 우선 선거 결과를 어쩔 수 없지만 용인하고 6대 의회에서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법안과 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검의 추진을 주장했다.

선거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됨에 따라 제7대 내각 구성을 위한 총리를 선출하게 되었다. 민창원 위원장은 7대 내각의 가장 중추적인 목적이자 존재 이유는 부정선거 방지와 대책 마련이라고 주장하며 동시에 공화당의 총리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당에서는 공천 과정부터 민창원 위원장과 마찰을 빚었던 이맹박 의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공화당 전당대회도 같이 진행하게 됨에 따라 민창원 후보는 당시 당대표 후보였던 조윤상 후보와 사실상 러닝메이트를 맺게 되었다.

공화당 총리 후보 경선은 초반부터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경선 준비를 위한 과정에서 공천관리위원회가 경선을 공고하는 등 많은 혼전이 있었다. 가장 갈등이 컸던 부분은 경선의 방식이었다. 민창원 후보와 조윤상 후보 측은 국민참여경선을 주장했고 이맹박 후보 측은 당원 투표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양측은 열띤 공방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민창원 후보와 조윤상 후보는 공화당 당헌에서 총리 경선은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한다는 당헌을 발견하고 논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국민 투표의 반영 비율을 가지고 양 측은 공방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임시대표였던 이맹박 후보는 경선위원회 위원장에 안철정 의원을 임명하면서 민창원 후보 측은 편파 인사 논란을 제기했다. 결국 경선위원회의 결정으로 당원 투표 70%와 국민 투표 30%로 결정되었다. 당시 대국민 여론조사에서는 민창원 후보가 앞섰기 때문에 민창원 후보 측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경선 방식의 논의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한 번 사건이 발생했다. 이맹박 후보가 민창원 후보에게 단일화를 요청했고 민창원 후보는 그것을 거절했는데 이에 대해 이맹박 후보가 민창원 후보를 향한 폭언을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창원 후보는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이맹박 후보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이맹박 후보는 사과했지만 사퇴는 하지 않았다.

결국 경선 결과 이맹박 후보가 공화당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고 민창원 후보는 이에 대해 승복했다. 그리고 조윤상후보도 당대표 선거에서 낙선했다. 하지만 끝날 줄 알았던 내부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서로 간의 계파를 인정하기로 각 계파 별 의석수를 할당함에 따라 공화당은 이맹박계와 개혁계[3]로 나뉘게 되었다. 다만 분당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6대 왕국의회 의장을 선출할 때도 계파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결론적으로 민창원 후보가 다시 맡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본회의에서 선출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6대 왕국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6대 왕국의회 의장 시절

민창원 의장은 기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상임위원회 시스템을 다시 한 번 개편했다. 법안 심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법무법제위원회만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위원장에 조윤상 의원을 보했다. 이맹박계 측에서는 편파 인사라고 비판했다. 이맹박계에서는 의장의 무당직 의무화를 주장하는 등 계속해서 민창원 의장과 개혁계를 압박해왔다.

그리고 이맹박계는 민창원 의장과 개혁계 인사들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공화당과 자유당의 합당을 선언했다. 262석의 거대정당 생성을 통한 정권 재창출이 목적이었다. 철저히 무시당한 민창원 의장과 개혁는 결국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조윤상 의원의 탈당 선언을 필두로 개혁계 의원 70인은 자유민주당(공화당)을 탈당했다. 이에 이맹박 측은 계파를 동반한 탈당은 법적 근거 없는 불법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민창원 의장은 의장이 가진 유권해석의 권한을 통해 탈당에 대한 유권해석을 진행함으로써 탈당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창원 의장은 조윤상 의원과 함께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새정치를 결의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탈퇴했던 한비자 전 총리가 한비자 전 총리의 딸 컨셉으로 23명의 의원과 탈당을 선언하자 민창원 의장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계파는 용납될 수 없다는 취지의 유권 해석을 했다.

이맹박 내각은 계속해서 민창원 의장과 국민회의를 공격했다. 심지어 이맹박 총리가 임명한 검찰총장은 처벌의 조항이 없는 절차법인 하늘미르 왕국 왕국의회법을 위반했다는 취지의 공소장으로 민창원 의장을 기소했지만 민창원 의장은 사법서사 육장을 대리인으로 지명해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리고 무죄로 판결됐다.

국민회의와 자유민주당이 계속해서 공방을 가지는 가운데 이맹박 총리는 결국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이맹박 총리와 그 측근들의 민창원을 향한 폭언은 선을 넘을 정도로 과격해졌다. 이맹박 측은 민창원 의장의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속 언급하며 의장 사퇴를 촉구했고 그 측근들도 욕설과 망발을 민창원 의장에게 퍼부었다. 민창원 의장은 당시 모종의 이유로 며칠 동안 잠수를 탄 상태였다. 그리고 민창원 의장은 잠수를 탄 이유가 현실에서 부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과 함께 이맹박 총리와 그 측근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의장 사회권을 이양했다. 그와 동시에 해당 발언을 한 이맹박 총리와 육성준 장관을 고소했다.

선거 결과, 위 사건의 여파로 국민회의는 34석이라는 반 토막의 결과를 얻게 된다. 민창원 의원은 현실에서 상황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에 가상국가에 신경을 상대적으로 덜 쓰게 되었고 이때 조윤상 대표와도 대화가 단절되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조윤상 의원은 말없이 잠적하고 결국 민창원 의원은 홀로 남게 되었다.

국민회의 당대표 시절

하늘미르 정치는 계속된 혼란의 상태였다. 당시 한비자계 정당인 친한연대와 김재헌 총리와 이맹박 의원 외 여럿이 모인 늘푸른당 [4]은 치열한 기싸움을 펼치고 정쟁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제7대 왕국의회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들어섰다. 거대 양당의 싸움으로 인한 정국의 마비와 의장단 선출도 하지 못한 제7대 왕국의회에서 민창원 국민회의 원내대표는 조속한 의장단 선출을 주장하며 본회의장 앞에서 국민회의 의원들과 의회 마비를 규탄하는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원내대표단 성명을 통해 의장단 구성 합의를 양당에 강력하게 주장했고 당 산하의 왕국의회정상화추진단을 구성해 활동했다.

그리고 김재헌 내각 총리는 당시 일부 인사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자살 설정을 위해 만들어진 누오르바위에 대한 설정 파기를 추진했다. 이에 이맹박계와 그 측근들은 반발하며 민창원 의원에게 행했던 폭언과 욕설을 정부 내각에 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민창원 원내대표를 필두로 한 국민회의는 계속해서 의원들의 의회 복귀를 주장하고 본회의장 앞에 현수막을 지속적으로 게시하여 일하는 정당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동시에 국민회의는 누오르 바위와 관련하여 관심 없음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의회 정상화를 계속 주장했다.

전당대회에서 민창원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피폐해진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개헌을 주장했다. 민창원 대표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수 마르코 의원이 입당하면서 국민회의는 당 정비를 시작했다.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설치를 추진했으며 느티, 데스노트 등 많은 재야인사와 중립 인사들이 입당하면서 당세를 키웠다. 그리고 제3회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가운데 야권의 큰 정계개편이 찾아왔다.

당시 제1야당이자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던 보수신당에 대항하고 하늘미르를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늘푸른당, 민주당, 민진당은 합당을 선언하고 한울당을 창당했다. 이에 국민회의는 한울당의 이념에 동의했기 때문에 한울당으로의 흡수 합당을 선언했다.

한울당 시절

남상은 당대표의 충언 이전

국민회의가 한울당에 흡수 합당을 선언하자 한울당의 탄생을 축하하던 한비자 의원과 보수신당은 이를 철회하고 국민회의가 합당에 참여한다면 격렬히 대항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그리고 의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한울당은 역사적인 첫 번째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의 기초를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다.

한비자 보수신당 대표는 2018년 2월 20일 새벽 2시, 기습적으로 본회의를 개최해 김재헌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의결했다. 이 사건으로 군부는 쿠데타를 진행했으나 진압당하고 김재헌 내각과 한울당은 격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을 시작 했다. 민창원 원내대표를 대표로 하여 법원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고 불신임안에 대한 무효확인의 소장을 제출했다. 이와 동시에 보수신당의 이맹박계는 보수신당을 탈당하고 새나라개혁당을 창당했다. 결국 한비자 대표의 시도는 사법부의 판결무효가 되었다. 이에 한비자 대표는 또다시 카페를 탈퇴하며 잠적했다.

한울당은 다시 당의 기초와 지방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당대회 결과 초대 당대표로 이연우 의원이 선출되었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탄탄하게 선거를 준비했다. 민창원 임시 원내대표도 선거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세에 참여했다. 그리고 제1차 의원총회에서 석스 정책위의장과 함께 초대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한울당은 제3회 지방선거에서 공천한 모든 후보가 당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정쟁은 끝나지 않았다. 당시 잔존했던 새나라개혁당 이맹박계는 당명을 바른미래당으로 변경하고 계속해서 한울당을 공격했다. 이에 김재헌 총리는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잠시 한울당을 탈당해 활동할 것을 한울당 당원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김재헌 총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비공식적인 말과 함께 한울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한울당 내부에서는 명분 없는 정치 실험으로 한울당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부 당원들은 김재헌 총리 없이 자강하자는 자강론을 내세웠다. 결국 민창원 원내대표와 몇몇 주요 인사들은 이에 동요해 당의 개혁을 명분으로 지도부의 총사퇴를 결의한다. 당시 이연우 대표는 잠수를 탔던 상황이었고 최고위원 중 일부는 탈당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위원회 개최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민창원 원내대표는 당무위원회를 소집해 지도부의 총사직을 결의한다.

당시 하늘미르 정계에는 야당의 계속되는 공세로 김재헌 총리 사퇴 정국이 형성되었으며 민창원 원내대표는 사퇴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김재헌 총리는 탈퇴를 선언하고 만다. 당시 한울당 느티 당대표는 성명을 발표해 내각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이맹박 당시 부총리가 총리 대행을 맡으면서 한울당은 사실상 여당의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같은당 이민서 의원은 자신의 계파라고 주장하는 40명의 의원과 탈당한다고 주장했다. 민창원 원내대표는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했으나 결국 소송까지 갔으며 사법부는 분명히 전례가 있고 법적으로 보장된 의장 유권해석의 권리까지 강탈하면서 억지 주장으로 계파 탈당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민창원 원내대표의 미투 운동이 제기되었다. 지은탁씨는 자신이 한울당 채팅방에서 차별받았다고 그것을 미투로 규정하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민창원 원내대표는 당원이 아닌 사람의 채팅방 입장은 본래부터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치를 취한 것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맹박 총리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민창원 의원의 제명안을 발의하여 정쟁의 물꼬를 틀었다. 이맹박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울당을 비판하면서 쓸모 없는 정쟁을 이어나갔고 결국 한울당은 사과했다. 그러나 미투운동과 이맹박 총리 측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민창원 원내대표 명의로 사과했다. 그리고 약 한 달간 휴식을 갖는다.

민창원 원내대표가 휴식을 갖는 동안 제8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가 진행됐으며 한울당은 선거 결과 100석을 얻었다. 당시 이맹박 대표의 개혁정당은 120석으로 과반을 얻지 못했지만 정당 간 합의도 진행하지 않은 채 총리 임명안을 계속 발의하고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해 재건공산당 강치 서기장은 적폐 내각을 규탄하고 야권연대로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40석을 얻은 철십자당은 개혁정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직설적으로 거절하면서 야권에서 총리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그리고 김재헌 전 총리는 한울당에 다시 입당했고 민창원 원내대표는 당내 연립정부추진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재건공산당과 철십자당과의 제10대 내각 연립정부 구성을 합의했다. 그러자 육성준 의원은 성명을 발표하며 민창원 원내대표가 총리 되는 것 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창원 원내대표는 즉각 출마 의사가 없을 밝히면서 일단락되었다.

한울당은 협치 정국을 완수하고 참된 협치를 강조하면서 샤르데냐 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3차 전당대회를 개최해 국난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총리 후보 경선에서 김재헌 후보가 의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했고 노태현 의원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총리 출마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결국 한울당의 계속된 우유부단함에 재건공산당이 연립정부 합의안을 파기하면서 사실상 총리 배출 가능성이 사라졌다. 결국 박이현 개혁정당 의원이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조용한 정국이 이어질 무렵 지은탁씨가 민창원 원내대표를 향한 미투운동이 배후 세력의 조작과 조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 했다. 그러나 당시 채팅 내용이 말소되어 논의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울당은 제4회 지방선거 결과, 칼리아리 특별시와 누오르 주에서만 당선인을 내어 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했다. 그러나 칼리아리 특별시를 지켰다는 점에서 완전한 패배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민창원 의장은 선거 이후 약 한달 간 휴식을 가졌다.

총리 직선제 개헌을 통해 진행된 제12대 총리 선거에서 한비자 전 총리가 당선되면서 재건공산당은 한울당에 야권연대를 제안했다. 다만 내부에서 논의를 거친 끝에 정책연대의 길은 열지만 정치연대는 거부하는 성명을 민창원 원내대표가 발표했다.

한울당 내부에서는 당을 혁신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민창원 원내대표의 주선으로 인스윈 목사를 한울당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 또 민창원 원내대표의 추진으로 한울당은 하늘미르 최초로 정당 산하의 싱크탱크인 한울연구원을 출범해 정책선거를 위해 노력했다.

제9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가 다가오자 야당과 정부여당인 전진당의 기싸움은 팽팽해졌다. 전진당의 이맹박 의원은 한울당은 김재헌 내각을 이은 정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공격을 이어갔고 김재헌 전 총리는 이에 반박하며 한울당에게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전진당 스스로부터 성찰할 것을 당부했다. 인스윈 상임고문은 전진당의 선거계략적 태도를 비판하고 한울당이 국민주의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정책선거에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민창원 원내대표는 하늘미르가 발전하기 위한 방법은 정치가 아닌 다방면적인 발전이라고 주장하며 이번 선거가 기필코 정책선거가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진당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민창원 원내대표는 인생에 있어 기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충언을 듣게 된다.

남상은 당대표의 충언

전문 보기

여야의 정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남상은 한울당 당대표는 '한비자, 이맹박, 민창원은 들어라'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정쟁의 가장 선봉에 서있는 위 세 사람은 모두 다 같은 적폐라고 남상은 대표는 말했다. 한비자 총리에 대해서는 욕심에 대해 충고했고 이맹박 전 총리에게는 공과 사의 구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당 원내대표인 민창원 원내대표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같은 소속이라 같은 길이라 제가 깔줄 몰랐나?

본인은 친구한테도 베스트 프렌즈한테도 거침없이 깐다.
그 솔직한 대답과 현란한 추임새로 친구들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라 그런다.
가끔은 하도 해도 뒷방 노인네, 연세 4300살, 이장님이라 그러더군요.

편의상, 민창원 대표라 부르겠다.

민대표, 당신도 위 두 분과 다름 없다는 사실 아는가?
당신도 하늘미르 적페다.

한울당 분들이 이 글을 보시면 뭉쳐도 안될판에 왠 자해를 하사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내 것에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해야한다.

민창원 대표는 이전에 남프로 전 재판관을 퇴임시키려 하는 음모가 있었고,
이를 위해 나이를 두어 퇴임 시키려고 했다.

이 사람도 위 두 사람과 같이 야합을 좋아하고,
야합을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는 사람이다.
그걸 이름을 걸고 보장한다.

민대표는 전진당에는 쇄신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쇄신을 전혀
실천하고 있지 않다. 어찌 그런지 영문이다.

민대표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길 바란다. 한마디로 오지랖을 버리길 바란다.

현재 민창원 논설위원의 회자에 따르면 이 충언을 기점으로 가상국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권력으로 인해 남이 받는 피해는 신경쓰지 않는 매우 이기적이고 일모불발(一毛不拔)의 태도로 가상국가에 임했고 가상국가에서 얼굴 붉히는 일을 아랑곳하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남상은 대표의 충언을 통해 가상국가에서 얼굴 붉히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좀스러운 행동인지를 깨닫고 더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며 설정중심주의라는 자신의 초심을 다시금 톺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민창원 논설위원은 충언의 마지막 문장을 수첩에 쓰며 매일매일 기억하며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는 가상국가라는 매체를 떠날 때까지 영원히 유지되고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했다.

남상은 당대표의 충언 이후

민창원 원내대표는 남상은 대표의 충언을 기억하며 활동에 임하고자 했다. 그리고 선거를 정쟁이 아닌 정책 선거로 이끌기 위해 당의 선거 공약 제작에 앞장섰다. 그리고 나온 것이 이것이다. 민창원 원내대표의 주도로 정책 선거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공약집 제작을 관례로 만들기 위해 이를 선가관리위원회에 자진 제출했다. 하지만 전진당, 특히 이맹박 의원 측의 공격은 언제나 그랬듯이 끝나지 않았다. 물론 위 공약집을 통해 정책을 비판하는 정책 선거의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다만 모든 정책을 싸잡아 비판하고 결론은 정쟁인 비판도 새롭게 출현했다.

전진당이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계속해서 정쟁적인 비난을 추진하고 당내 인물이 정책을 만드는거 보다 정책을 까는게 효율이 좋다라고 발언했다. 결국 정책 선거를 할 생각이 전혀 없던 전진당에 대항해 한울당-재건공산당-HNSLP는 정책연대 구성을 공식 발표했다.

선거 결과 야3당의 정책연대였던 하늘보리연대는 전진당의 과반 의석을 저지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당초 여론조사에서 더블스코어로 밀리던 상황에서 매우 약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부에서도 논평을 발표해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음을 강조했고 추후 선명야당으로서의 행보도 강조했다.

내각의 여러 미숙한 행보로 인해 정계가 시끄러울 즈음에 국가보안법에 따라 설치된 중앙정보부가 민창원 의원 외 6인을 체포한다는 성명을 밝혔다. 적국에서 공직을 맡거나 적국에서 하늘미르의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맹박 의원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언론사를 이용해 사상 초유 사태 <전직 의장 체포>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민창원 의원은 중앙정보부의 체포에 대해 즉각 반박하며 체포의 이유도 없이 체포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체포가 아닌 소환이라며 정정했고 검찰청은 영장도 없이 체로하는 행위를 비판했다. 중앙정보부는 민창원 의원 그외 인사에 대해 출두를 요청했고 이에 민창원 의원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해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한 점을 풀겠다고 말했다. 민창원 의원이 출두한 이유는 내각이 적국으로 지정한 바람나라에서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람나라 내에서 군사 미니게임을 하기 위한 게임 시스템에서의 직책이지 실제로 맡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중앙정보부장이 사임하면서 조사는 일단락되었다.

한울당은 제5대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했지만 지도부가 공석인 상태였고 원내대표도 민창원 의원이 임기를 끝낸 이후 누구도 출마를 하지 않아 사실상 당은 마비상태였다. 임성민, 찢베명, 라두 셰르네처 알구어 그리고 느티 후보가 출마를 하긴 했지만 선대위원회도 없이 선거를 치뤄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연우 전 당대표가 복당을 했고 이에 따라 당의 정신적 지주인 김재헌 전 총리가 복당하면서 당은 다시한번 비상의 방로를 꾀했다. 한울당은 5차 전당대회를 개최해 지도부를 재건하고 당헌과 강령 개정을 통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당의 전략적 인사였던 이청우 의원도 최고위원에 출마하며 당의 분위기를 도모했다. 그리고 한비자 내각은 계속된 실책으로 전진당 내부에서도 불신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지율이 폭락했다. 그리고 한울당은 선거 3일전 여론조사에서 56.7%를 기록하며 당 최고 지지율을 획득했다.

그러나 사사리주 주지사 후보였던 라두 셰르네처 알구어 후보가 민주당 재건을 위해 한울당을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와 동시에 임성민 칼리아리특별시 시장 후보와 이청우 최고위원이 최고위원직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메디오캄피다노주 주지사 후보인 느티 후보가 한울당을 탈당하고 전진당에 입당함에 따라 한울당의 후보자는 임성민 후보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진당은 이 틈을 이용해 민창원 의원에게 경알못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한울당으로부터의 모든 정책적 비판은 정쟁으로 간주했으며 심지어 이맹박 의장은 과거 모의전에서 있었던 일을 가져와 비판하기까지 이르렀다. 정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울당은 과거 경험했던 더러운 정쟁의 역사를 기억했기 때문에 SNS를 이용한 반박의 선에서 대응했고 공식 논평은 작성하지 않았다. 김재헌 전 총리는 논평을 통해 한울당의 변혁과 동시에 전진당의 태도를 비판했다.

선거 결과, 한울당이 유일하게 후보를 낸 칼리아리특별시에서 임성민 후보가 낙선하면서 당선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당 일각에서 당 해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창원 의원은 이를 반대했지만 최고위원회와 당원협의회에서 강력하게 의견이 개진되면서 결국 당 해산에 대한 전당대회가 공고되었다. 당 해산 시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민창원 의원을 대표로 하는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결국 한울당은 해산했다.

무소속 의원 시절

한울당이 해산함에 따라 잔류한 한울당 출신 의원 43인은 남은 임기동안 투표권을 위해 민창원 의원을 대표로 하는 교섭단체 미래의 대안구성했다. 원외에서 데스노트 전 의원과 김재헌 전 총리를 중심으로 참여당 창당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일단락되어 민창원 의원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 한 달 간 휴식을 갖는다.

미래의 대안 시절

민창원 전 의장은 2018년 8월 24일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쿠오도르, 알베르트 몬디, 수 마르코 전 의원들과 함께 설정중심주의 정당인 미래의 대안을 창당했다. 당색은 기존에 사용되지 않았던 분홍색이었다. 민창원 전 의장은 쿠오도르 전 대표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당시 하늘미르는 한비자 전 총리가 국가 개혁을 명분으로 국가재건위원회라는 초법적 기구를 만들어 활동하던 시국이었다. 민창원 대표와 미래의 대안은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청우 국왕이 이를 조건부로 인정하면서 미래의 대안도 참여하게 되었다. 민창원 대표는 재건위원회의 설정확립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두 번의 권고안을 제출해 하늘미르의 설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국가재건위원회가 여러 반인권적 행위를 행하자 미래의 대안은 대변인 명의로 논평을 발표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지 의사를 철회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결국 변화는 없었고 결국 민창원 위원장은 설정확립위원장직을 사퇴했다.

제10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가 다가오자 미래의 대안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정당보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선거를 대비해 나아갔다. 해성제 대부여국 국왕을 인재 영입했고 이연우 전 한울당 당대표와 김재헌 전 총리가 입당했다. 체계적인 선거 조직을 위해 빠르게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민창원 대표는 선대위원장에 해성제 대부여국 국왕을 임명했다. 그리고 선착순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공천해 공천 잡음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선거 결과, 당초 마지노선으로 정한 제3당의 지위를 넘는 원내 2당의 지위를 얻는데 성공했다. 민창원 대표는 성명을 발표해 국민의 초월적인 선택에 감사하다는 뜻을 내비추고 새로운 정당이 될 것임을 약속했다. 그리고 미래의 대안은 제2차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민창원 대표는 대표에 출마하지 않고 당 소속 의원으로서 활동할 것이라고 발혔다. 전당대회 결과, 당대표로 쿠오도르 의원이 선출되었고 동시에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해성제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민창원 의원은 하늘미르의 침체를 벗어나고 초월적인 시대를 위해 개헌을 주장했다. 그리고 왕국의회 정상화를 위해 의장단 선출을 위한 TF 구성을 주장했다. TF에서 미래의 대안과 미래정당은 총리에 미래정당 후보를 의장에 미래의 대안 의원을 각각 추천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민창원 의원은 재건공산당이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민창원 의원은 이때를 기점으로 용모를 설민석 역사강사에서 星野源(호시노 겐) 일본 가수로 변경 했다.

미래의 대안 몫의 의장 후보로 민창원 의원이 추대됨에 따라 민창원 의원은 의장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 선언문에서 민창원 의원은 남상은 대표의 충언을 인용하며 그의 말을 수첩에 적어 매일매일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곤 법안 발의, 통과, 회의 출석률 1위를 강점으로 내세우며 일하는 의장, 능력있는 의장임을 강조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얼어붙은 하늘미르 정국을 따뜻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미래정당이 의장 후보에 민창원 의장을 지지했고 결국 본회의에서 의결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10대 왕국의회 의장으로 선출 및 임명되었다.

제10대 왕국의회 의장 시절

민창원 의장은 의장에 당선되자마자 당선사 대신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설치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미래정당과 미래의 대안이 각각 개헌특위 창설을 의장에게 요청했고 민창원 의장은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안을 발표하면서 제10대 왕국의회를 개헌의회로 칭했다. 민창원 의장은 개헌특위 위원장에 재건공산당 출신 블라디미르 마테오 강치 의원을 임명하고 개헌에 대한 몇가지 권고 사안을 밝혔다. 첫째는 원외의 목소리를 들을 것, 둘째는 타 국가의 헌법을 그대로 스트랩하지 말 것이었다. 만약 일부 정당이 날치기를 통해 헌법 개정안을 처리한다면 의장으로서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외에는 의장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헌법 개정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가고 밝혔다.

헌법 개정안은 지금까지 없었던 평화적인 절차와 장고를 논의를 거듭한 끝에 발의되었다. 민창원 의장은 헌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하고 임시회를 공고해 개헌의 막바지 작업을 추진했다. 마침내 헌법 개정안이본회의에서 가결됨에 따라 민창원 의장은 개헌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민창원 의장은 헌법 개정안을 표결한 후 의장실 성명을 발표해 개헌특위의 해산을 선언하고 의원들 한 명 한 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민창원 의장은 정계은퇴를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도 남상은 대표의 충언을 인용했다.

제10대 의회의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여 최종적으로 개헌 작업을 완수하게 되었다. 이후 박이현 내각은 개헌의 후속 조치와 하늘미르 안정화를 위해 협치정국을 구성했고 미래의 대안도 동참했다. 민창원 의장은 조용히 의장으로서의 임기를 채우고 있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제10대 왕국의회 의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의사당에 출근한 민창원 의장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계 은퇴를 공식화하고 제11대 왕국의회 일원에게 격려와 응원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행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후회하고 남상은 대표와 여러 인사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전달했다.

같은 날,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친한 친구였던 쿠오도르 전 대표가 노환으로 사망함에 따라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정치가 민창원으로서의 마지막 공식석상이었다.

미래의 대안은 제11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에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고 정당법에 따라 해산되었다.

ANM 논설위원

2020년 2월 16일, ANM은 민창원 전 의장을 논설위원으로 위촉했다. 이에 민창원 논설위원은 약 1년 2개월 만에 ANM 오피니언의 형식으로 인사말을 발표하면서 언론인으로서 활동할 것임을 밝혔다. 이와 동시에 1년 2개월 동안의 기간 동안 몇몇 내각에서 공직 요청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했음을 밝혀 절대로 정계 복귀와 공직 활동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오피니언에서는 언론이 제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형평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ANM의 공신력과 권위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라고 기고했다.

같은 날, ANM 공식 오피니언인 民피니언 기고를 발표하면서 하늘미르의 다양성을 톺아보고 지금까지 전혀 논의된 적 없거나 거의 논의되지 못한 소재를 주제로 기고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정치 칼럼은 기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정계와 선을 그었다.

다음 날, 民피니언의 첫번째 칼럼, 생명에 대해서가 기고되었다. 하늘미르에서 경시되었던 의료계 설정과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생명권 수호를 언급하며 하늘미르는 남들이 하지 않았던 새롭고 참신한 설정을 해야 한다고 기고했다. 그리고 독서 칼럼인 민의의 서재의 기고를 발표하면서 독서를 통해 얻는 교훈과 지식은 기필코 하늘미르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2020년 2월 민의의 서재 도서는 Rosling Hans의 Factfulness로 지정했다.

2020년 2월 21일, 뉴 칼리아리 특별행정시에 자택을 건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본인이 직접 건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2월 23일, 두번째 民피니언 기고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독립적 형평성의 원칙이다. 민창원 논설위원은 하늘미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되는 반독점적 형평성의 원칙에서 타파하고 독점적 형평성의 원칙을 수용하여 과점의 형태로 언론시장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언론계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리고 가상국가는 오직 여흥(餘興)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바람나라에서의 활동

문학인으로서 활동

이연우 국왕의 요청으로 민창원은 바람나라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분야는 문화예술계였다. 당시 하늘미르의 정쟁으로 인해 지쳤기 때문에 바람나라에서 만큼은 정치를 하고 싶지 않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당시 바람나라는 직업제도를 운영했기 때문에 민창원은 개척되지 않았던 문화예술계에 진출했다. 그리고 활동을 위해 문학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명은 풍류문학재단이었고 재단 이사장은 민창원 본인이었다.

풍류문학재단은 바람나라의 문학적 발전과 문학인 양성을 목적으로 제1회 풍류 신춘문예를 개최했다. 총 10개가 넘는 작품이 출품되었고 3개의 작품이 수상하였다. 이후 민창원 이사장은 5개월간 휴식기를 가졌다.

5개월 후 바람나라는 활발했던 초기의 모습과 다르게 활동량이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각종 기본법도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남은 활동 인원들 사이에도 혼전을 빚었다. 이에 민창원 이사장은 바람나라의 활동을 증진시키고 기본 기강을 세우기 위해 남은 활동 인원을 규합하여 새로운 헌법과 각종 법률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민창원은 헌법과 행정조직법을 [1]했다. 그리고 국가재건시무안을 발표했고 정부조직법과 작위 및 귀족에 대한 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현대사 이전의 역사를 편찬해 제안했지만 실제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 바람나라가상국제연합에서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국제사범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했다. 민창원 이사장은 이 사태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으나 군부가 일으킨 일임을 알고 관련자의 탈퇴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리고 바람나라 관리국의 자격으로 가상국제연합에 공문을 발송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잠시 휴식을 가졌다.

한 달 뒤, 계속된 활동 침체로 이연우 국왕은 민창원 이사장에게 바람나라 재건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재건위원회는 법률상 왕족만 맡을 수 있으므로 이연우 국왕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이승우의 설정을 허락했다. 따라서 민창원 이사장은 이승우 재건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재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활동

이연우 국왕은 이승우 왕제(王弟)를 바람나라 재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이승우 재건위원장은 성명을 발표해 바람나라 정부의 3가지 기조를 발표했다. 그리고 재건위원회의 인성을 마무리 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재건위원회는 출범했다. 이승우 재건위원장은 재건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정부 재건과 헌법 수립을 통한 새로운 바람나라의 창조라고 발언했다. 이에 재건위원회는 정부조직법을 공포해 정부내각의 기초를 세웠다. 그리고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이승우 재건위원장은 공식적으로 재건위원회의 해산을 공시함에 따라 임무를 완수했다.

얼마 뒤 교통사고가 발생해 식물인간으로 몇 달을 생활했으나 2020년 2월에 완쾌하고 국왕이자 동생인 이민우 국왕을 왕제로서 보좌하고 있다.

대부여국

  1. 바람나라 한정
  2. 국민중심당이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위해 당명을 하늘미르당으로 변경했고 대표는 이청우 의원이었다.
  3. 민창원 의원과 조윤상 의원의 계열
  4. 자유민주당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