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문종의 왕녀 보령대장공주ㅣ保寧大長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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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45년 10월 20일 |
| 고려 개경 본궐 연창궁 | |
| 사망 | 1137년 8월 13일 |
| 고려 개경 본궐 경령전 | |
| 능묘 | 온묘 |
| 재위기간 | 고려 보령공주 |
| 1046년 10월 20일 ~ 1071년 11월 31일 | |
| 고려 장공주 | |
| 1071년 11월 31일 ~ 1101년 1월 14일 | |
| 고려 대장공주 | |
| 1101년 1월 14일 ~ 1137년 8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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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 문종과 인평왕후의 장녀이며 최장수 공주이다. 오랜 세월동안 왕실의 어른으로써 활약하야 헌종때 대장공주에 봉해졌다.
생애
문종의 장녀
보령공주는 고려 문종의 장녀로, 1046년 10월 20일 개경 본궐 연창궁에서 태어났다. 부계는 개성 왕씨이며 모계는 안산 김씨이다. 출생 당시 문종은 후계였던 왕자를 기대했으나 장녀의 탄생으로 인해 궁중의 관심이 분산되었고, 이후 모후 인평왕후가 불임 진단과 관련된 스트레스로 사망하자 공주는 아버지에게 큰 위안이자 의지로 자리했다.
어린 시절에는 궁궐의 숲과 전각에서 이복 형제자매들(선종, 선희왕후 , 진한공) 등과 함께 자주 어울려 놀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송의 황후가 될뻔하다.
고려가 태평성대을 누리며 북송과의 외교를 강화하던 시기, 혼인 외교를 통해 양국 관계를 공고히하려는 논의에 따라 보령공주는 송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송으로 향하던 도중 곤녕궁 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북송 황싱의 태황태후였던 자성광헌황후가 살해되는 등 정국이 급변하자, 사태의 위험을 우려한 고려 측은 공주의 송행을 중단하였다.
곤녕궁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은 보령공주는 고려군의 보호 아래 급히 귀환하였고, 결과적으로 북송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 2차 여요전쟁을 겪다.
여요전쟁 발발 당시 보령공주는 왕실의 피난 행렬에 합류하여 가마를 타고 벽란도로 향하던 중 철기군의 기습을 받아 혼비백산한 상황을 맞았다.
도중에 이복여동생이자 올케였던 선희왕후가 가마에서 떨어지는 위기를 맞자 공주는 곧바로 가마에서 내려 그녀를 구하고자 함께 이동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무너진 만월대 일대에 숨어 철기군의 추격을 피하며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 기간 동안 보령공주는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행동하여 왕실 내에서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김러시아의 난을 겪다.
궁궐이 김러시아의 반란군에 의해 위협받았을 때에도 보령공주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난이 궁궐을 습격하였으나, 공주는 계모인 인예왕후와 함께 궁궐을 지키며 왕실의 안위를 도왔다.
궁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실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녀의 행보는 이후 왕실 내에서 장년기에 이르는 동안 지속적인 존경과 신임을 받는 바탕이 되었다.
대장공주가 되다.
짐의 고모님이신 보령공주는 지난 수십년간 궐을 지키며 왕실의 어른으로써 각종 국난들속에서도 나라를 지탱해왔느니라. 내 이를 가상히여겨 정 1품 대장공주에 봉하고 왕후와 태후에게만 내릴수있는 전각을 하사하는 바이니 과거 원성왕후께서 쓰시던 경령전을 하사하는 바이다. — 헌종의 교지
오랜 기간 왕실의 어른으로서 여러 난국과 외교적 위기를 겪으며 집안을 지탱한 공주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헌종 때 정1품의 대장공주로 봉해졌다. 관직·품계와는 별개로 공주는 생애 내내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아 왕가의 전통과 의례를 수행하며 중앙가문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평화로운 죽음
보령공주는 말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존경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1136년 8월 13일 개경 경령전에서 향년 90세로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경순보령대장공주(慶順保寧大長公主)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왕실의 안정과 전통을 지킨 인물로 기려졌다.
역사적 평가에서는 외교 위기와 내란기에도 침착하게 왕실을 수호하고 후대 왕실에 이바지한 점이 강조되어 전통적 군주제 하에서의 ‘왕실 어른’ 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가족관계
여담
북송으로 가던도중 인예왕후가 직접 말을 타고 가마행렬을 지위하며 공주를 구하러 왔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