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바티온 왕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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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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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현재 이스체르 주 이스펜에서 기원전 95만년~80만년 전의 발자국과 석기 도구들이며, 이것은 멸종된 고인류인 호모 안테세소르의 것으로 추정된다. 50~40만년 전부터 하이델베르크인과 네안데르탈인 등 다양한 고인류들이 거주했으나, 모두 수렵채집인들이 단기적으로 머무는 데에 그쳤고 18~6만년 전까지는 무인도 상태였다. 그러다 4만년 전부터 네안데르탈인이 쿠르텐 섬에 재정착 했으나, 약 3만년 전부터 초기 유럽 현생인류 집단이 쿠르텐 섬, 페닝엄 섬, 그리고 칼턴 섬으로 유입되며 이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기원전 4천년 전 무렵 아나톨리아에서 기원한 초기 유럽 농경민들이 브리튼 섬에 정착하며 농업을 도입했다. 이들이 스톤헨지를 세운 이들로 추정된다. 기원전 2천년경에는 원시 인도유럽인과 유럽 농경민이 혼합된 종형 비커 문화 집단이 현재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시작해 브리튼 섬으로, 그리고 끝내 쿠르텐 섬으로 건너오며 셀바티온 제도에 인도유럽어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시대

켈트시대

기원전 9세기에 처음 등장한 켈트족들은 인근 갈리아와 브리튼에서 세력 싸움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이주하게 된 켈트족들이 대부분의 인구를 채웠다. 이후 브리튼 섬의 켈트족들과 같이 본토의 대륙 켈트족과 차별화된 도서 켈트족의 문화가 브리튼 섬과 유사하게 발전했다. 이후 대륙의 로마인들과 교류를 하며 점점 더 계급 사회가 세분화되기 시작했고, 곧 이어 칼턴인의 왕, 쿠르텐인의 왕, 페닝엄인의 왕 등 명목상 상위 왕도 생겼지만, 로마인들의 기록을 보면 체계화된 중앙집권체제는 만들지 못했고 부족들이 자치권을 갖고 서로 견제하고 동맹을 맺으며 차별화된 나라처럼 지냈다고 한다.

로만 아틀란티스

기원전 5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갈리아 켈트족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쿠르텐을 침공하여 인질들을 끌고 갔다. 그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모두 최소 한번씩은 군사 켐페인을 진행했으며 크라우디우스 때가 됐을 땐 이미 쿠르텐 섬은 대부분 로마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후 크라우디우스는 로마 휘하의 쿠르텐 섬을 아틀란티스 주로 편성하고 칼턴섬과 페닝엄 섬에서도 군사작전 계시했다. 끝내 기원후 49년에는 셀바티온 제도 전체가 아틀란티스에 속하게 되었다. 모든 영토가 그랬듯 셀바티온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지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로마-아틀란틱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도 세르바의 지명은 이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8년에는 로마군이 셀바티온 제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세시대

삼국체제의 설립

로마군이 셀바티온에서 철수한 이후 이베리아에 정착한 고트족들이 대거 쿠르텐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브리튼 섬에선 앵글로족들과 색슨족, 그리고 유트족들이 페닝엄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군사체계가 무너져버린 이 두 섬은 빠르게 게르만 이방인들에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내 쿠르텐 섬에서는 북고트 왕국이, 페닝엄 섬에선 레파고르 왕국이, 그리고 칼턴 섬에선 남아 있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로마의 잔해라고 주장하며 아틀란티스를 선포하였다. 이렇게 셀바티온 제도는 3가지 왕국으로 나뉘어지며 삼국시대를 맞이했다.

바이킹 침공

10세기 무렵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을 세울 만큼 위세가 강성해진 노르만 바이킹들은 서유럽 전체를 약탈하고 겁탈하기 시작했다. 물론 셀바티온 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륙에 가까운 거대한 섬은 노르만인들에게는 너무나도 탐이나는 땅이였다. 967년에 바이킹선 85척이 포르본에 상륙하였다. 이후 바이킹들은 레파고르의 해안선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레파고르에게 큰 골칫덩이가 되었다. 이에 레파고르의 왕 레드월드 2세는 북고트의 왕 테오도리크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북고트 왕은 바르데니아 섬 주위에서 흩어져있던 바이킹선 20척을 격파하는 해상전 승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에 분개한 바이킹들은 약탈의 거점을 레파고르에서 북고트로 바꾸고 학살까지 저지르는 등 무고한 북고트 시민들에게 분노를 배출하였다. 이에 테오도리크 3세는 군을 모아 콘노르 전투에서 무찔렀다.

셀바티온 왕국의 건국

바이킹 침공의 결과로 레파고르 왕국의 제정 상황은 최악이었다. 나라의 국고는 거의 파탄이 났고 군대도 있으나 마나한 상황이였다. 그로 인해 북고트와 레파고르는 970년 세르바 조약을 체결했다. 테오도리크 3세는 레드월드 2세의 딸과 결혼울 하였고 이들의 아들은 두 국가를 연합하기로 한 정략결혼이 이루어 졌다. 이후 1003년 게프하르트 1세는 이 레파고르와 북고트의 왕으로 오르며 이 두 국가 사이에는 동군연합체가 완성되었다. 이후 게프하르트 1세는 두 국가의 통일과 함께 셀바티온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근세시대

신항로 개척

셀바티온 왕국의 오랜 동맹국이였던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 소식을 접한 후 바로 1493년에 셀바티온 신대륙 탐험단을 구축해서 보냈다. 탐험단은 신드워드 제도에 상륙을 하여 셀바티온 국왕의 이름으로 윈드워드 3섬을 셀바티온의 영토라고 선포를 하였다. 이로써 셀바티온의 최초 식민지인 셀바티온령 카리브가 만들어졌다. 이 섬들은 주로 플랜테이션에 쓰였으면 노예 무역으로 인구를 비축해서 지금도 흑인 인구가 대부분이다. 스페인을 따라 북아메리카를 넘어 아시아로까지 항해를 성공한 셀바티온 탐사대는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였다. 이후 믈라카 술탄국과 접촉을 했지만 종교 문제로 대치 후 탐사대는 스페인령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아프리카를 돌아 희망봉으로 가는 도중 케냐에 들려 거기에 해안선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얻은 해안선이 셀바티온령 동아프리카의 시조가 되었다

종교 개혁

셀바티온은 북고트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교황을 충실히 따르는 가톨릭 국가였다. 때문에 북부독일에서 마틴 루터에 의해서 개혁의 바람이 부는 반면, 셀바티온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출했었다. 허나, 교황청을 포함한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끝내 몇가지 요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국왕이던 게프하르트 2세는 다수의 성당들이 천주교 교리에 어긋난다며 재산을 몰수하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 본토에서 시작된 종교분쟁은 30년 전쟁이라는 대전쟁으로 이어졌다. 셀바티온은 당연하게 제국 동맹에 속한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의 편에 참전했다. 특히 셀바티온은 제4차 전쟁인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활역을 많이 했는데, 뛰어난 해군으로 프랑스 비스케이 해에서 재해권을 잡아 프랑스 해군을 무찔렀다. 하지만 과감하게 브르타뉴에 상륙을 한 셀바티온군은 프랑스 보병에게 패하고 엄청난 양의 사상자를 내며 셀바티온 역사상 가장 큰 피해의 전투로 기록되었다.

아틀란티스-셀바티온 전쟁

게르하르트 2세는 이후 눈을 유럽에서 동쪽의 멸망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는 로마의 최후의 보루, 아틀란티스에게 향했다. 게르하르트 2세는 아틀란티스의 독특한 그리스도교를 이단이라고 주장을 하며 침공하였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많은 추측을 하고 있지만, 아마도 브르타뉴 켐페인의 참사를 만회하기 위해서나 아님 신항로를 위한 더 좋은 수로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셀바티온은 현재의 오르텐, 발레스, 세르카, 쿠데스, 그리고 하르센 모두에 상륙을 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전투 경험은 무슨, 이방인과 교류도 별로 없던 아틀란티스는 로마의 후예라는 타이틀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점령 당하였다. 하지만 네르빌에서 성공적인 역공을 가하여 전세가 기울어지는 듯 했지만 베르테버르 전투에서 아틀란티스의 황제 글리케리우스 13세가 전사하며 3살짜리 콘스탄틴 12세가 왕위에 올랐고, 제국의 섭정인 카피톨리누스는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는 같은 해에 오르텐 조약에 서명을 했다. 이 조약을 통해 아틀란티스는 셀바티온에 합병이 되었고, 2400년의 로마 역사는 끝이 났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조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며 셀바티온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국과 함께 했다. 하지만 사실 지상 병력은 그리 강하지 않던 셀바티온군은 전쟁에서 영국 해군을 보좌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이후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가 들어왔을 때 스페인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근대시대

7년 전쟁

영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이번에도 7년 전쟁에는 영국과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을 하였다. 영국과 함께 프랑스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공략을 하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괴멸시키는 등 스페인 왕위 전쟁 보다 더 크게 활약을 하였다. 이후 영국과의 밀약에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셀바티온의 말레이 반도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1764년 런던 밀약을 체결하였다.

제1차 대아프리카 원정

1782년, 바렌홀트호가 현 셀바티온령 세네갈의 다카르에 상륙을 했다. 주위 원주민들과 교류를 하고 노예 40명을 데리고 셀바티온 본토로 돌아왔다. 이후 왕실이 아프리카 식민지의 중요성을 확인하여 1784년에는 현 셀바티온령 시에라리온에, 1785년에는 당시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에 탐사를 보내기도 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골드코스트를 구매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가 거부당하였다. 이후 아프리카 여러 곳을 탕방하며 서아프리카 위주로 여러 부족들과 접촉을 하며 셀바티온의 영향력을 높였다.

나폴레옹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프랑스 혁명정부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후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하며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육지에서는 승산이 없어졌다. 그래서 영국과 함께 해군으로 재해권을 잡으며 항쟁을 이어나갔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영국과 셀바티온의 설득 끝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이 다시 뭉쳐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래 선전포고를 했다. 이 와중에 셀바티온은 1801년 세네갈에서 셀바티온령 서아프리카를 선포하였다. 이후 셀바티온 해군은 네덜란드가 바타비아 공화국으로써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되었가 때문에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와 네덜란드령 실론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하였고, 1802년 브레스트 조약을 서명하며 프랑스와 셀바티온 사이의 모든 군사적 적의를 끝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전의 대프랑스 동맹 전쟁과 다르게 이번에 셀바티온은 바로 참여하지 않고 1804년에 참전했다. 프랑스가 영국에 상륙을 하기 위해 엄청난 해군을 기르고 있자, 이에 위협을 느낀 셀바티온은 프랑스의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또 다시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며 지상전을 이끌어갈 능력을 상실하였다. 1806년에는 새로 점령한 시에라리온을 셀바티온령 서아프리카에 편입을 하였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전과 같은 결과다. 영국과 셀바티온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치뤘고, 프로이센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상국들은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또다시 전쟁이 무산되었다.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셀바티온의 지원을 받고 다시 한번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고. 오스트리아는 서쪽 영토를 잃은 뒤 다시 한번 평롸 협정을 맺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

스페인 전역에서 친나폴레옹 정권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며 프랑스군과 전투에서 놀랍게도 승리를 거두었다. 셀바티온은 프랑스를 약화 시킬 기회라고 생각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페인 혁명군에게 군사 사절단을 파견하고 재해권을 통해 프랑스군의 해상 보급을 차단하고 무기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이베리아는 프랑스에게 엄청난 골칫덩어리가 되었고, 수만명의 프랑스 사상자와 부상자를 내는 국력 싱크홀이 되었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의 군단은 이제 끝이날 시기가 왔다. 셀바티온,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국가들이 모두 나폴레옹을 몰아내기 위해 모였다. 결과는 드디어 대프랑스 동맹의 승리였다. 나폴레옹은 축출되었고, 부르봉 왕조가 다시 프랑스에서 왕위를 되찾았다.

100일 천하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복귀 하면서 나폴레옹을 축출하기 위해 셀바티온을 포함한 유롭 전역이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셀바티온은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며 나폴레옹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나폴레옹 전쟁은 막을 내렸다.

빈 회의

빈 회의에서 셀바티온은 명백한 승전국과 준강대국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셀바티온이 점령한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와 네덜란드령 실론을 셀바티온의 식민지로 인정 받았지만 추진하던 브리타뉴의 독립은 실패하면서 회의는 끝났다. 이후 1820년에 셀바티온령 골드코스트를 설립하며 베넹과 토고까지 확장을 했다.

1848년 혁명

혁명의 해, 전 유럽에서 혁명이 터지는 가운데, 셀바티온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턴 섬에서는 아직도 로마인이라는 민족 의식이 남아 있어 1848년 5월 아틀란티스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1848년 7월에는 세르바와 칸델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주의를 위한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셀바티온 혁명이라고 부른다. 아틀란티스 독립 전쟁은 영국군의 도움으로 진압아 되었고 셀바티온 혁명은 레오나르도 5세가 입헌군주체제를 포함한 여러 개혁 방안들을 추진하며 진정되었다.

제국주의 경쟁기

베를린 회담

베를린 회담에서 셀바티온은 셀바티온령 골드코스트, 셀바티온령 서아프리카, 셀바티온 동아프리카 회사의 부지, 그리고 셀바티온령 콩고와 가봉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는 모두 받아들여졌다. 같은 연도에 셀바티온령 서아프리카를 각각 셀바티온령 세네갈과 셀바티온령 시에라리온으로, 셀바티온령 콩고에 가봉을 합병하고, 셀바티온 동아프리카 회사의 부지를 셀바티온령 동아프리카로 재편성 하였다.

아시아

말레이와 실론 지역에서의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가차없는 수탈을 시작했다. 자원을 축출하기 위해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처했다. 특히 말레이의 이슬람을 없애고 기독교들을 선교한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모스크들을 성당으로 바꾸거나 폐지하였다. 말레이와 실론의 고유 문화를 박해하고 셀바티온식 법과 제도를 강요하는 형식으로 식민 수탈은 진행되었다.

동맹 형성

영국과 몇백년째 동맹을 유지하는 입장과 독일제국의 무모한 해군 팽창에 위협을 받아 프랑스, 러시아, 영국과 함께 협상국을 만들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이탈리아의 중앙 동맹에 맞섰다.

1차세계대전

참전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유럽 전역이 전쟁으로 휘말리자, 셀바티온 왕국은 처음에는 영국과 같이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영국과 함깨 공동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서부 전선

유럽 대륙의 서부전선에서는 셀바티온의 지상군 투입은 제한적이었다. 셀바티온은 전쟁의 상징성과 동맹국과의 연대를 고려해 소규모 병력을 서부전선에 파병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참호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공세를 주도하지는 않았고, 육군 손실 역시 주요 참전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해양 전장

전쟁 기간 동안 셀바티온 해군은 영국 해군과 협력하여 북해와 대서양에서 독일 제국 해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셀바티온은 북해 봉쇄 작전의 일부를 분담하고, 비스케이만과 아일랜드 인근 해역에서 연합국 수송선 보호 임무를 맡았다. 또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응해 대잠 초계와 호송 체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며, 협상국의 해상 보급로 유지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식민지 전선

식민지 전선에서 셀바티온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셀바티온령 콩고, 가봉, 동아프리카를 거점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압박하며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독일군을 현지에 묶어두는 효과를 낳아, 독일이 유럽 본토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아시아에서는 말레이와 실론을 안정적인 후방 기지로 유지하며 인도양 항로를 통제해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들 함락해 큰 기여를 했다.

승전

1918년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자, 셀바티온은 명백한 승전국으로 국제 무대에 섰다. 비록 전쟁의 중심 전장에서 대규모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으나, 해군력을 통한 기여로 협상국 승리에 크게 기여한 국가로 평가받았다.

전간기

국제무대에서

셀바티온은 1차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 연맹에 가입하며 국제 평화의 존속을 유지하는데 큰 힘을 썼다. 올란드 위기 당시 누구보다도 먼저 국제 연맹을 통한 해결 방안들을 제시하였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때는 이탈리아의 국제 연맹 추방을 주장하는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 호황기

경제적으론 호황기였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국토가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사상자도 크지 않아 경제가 별로 타격을 세게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더욱더 촘촘해지는 국제사회에 따라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크개 발전한 호황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한 1929년 경제 대공항에 의해 망가졌다. 그래도 셀바티온의 경제는 차차 회복을 하기 시작하며 1936년에는 호황기 때 만큼은 아니지만 꽤 경제 규모가 다시 커졌다.

식민지 개혁

1차세계대전 때 아시아의 식민지들의 활약을 높이 산 것과 동시에 말레이와 실론에서 격해지는 독립 운동으로 인해 셀바티온 내각은 각 식민지에게 자치권을 주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 인해 말레이 자치령과 실론 자치령이 설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반(1939~1940)

독일이 다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셀바티온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중립으로 무관하며 대공황의 남은 여파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연합국에 합류하였다.

셀바티온 침공

1940년 9월 7일, 독일국은 셀바티온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10일에는 사자작전을 통해 이스체르 주 동부 이스펜 시에 상륙을 개시하며 본격적인 침공의 시작을 알렸다.[1]전쟁 초반에는 이스체르 주 동부에서 생각보다 뛰어난 전과를 올리며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독일군의 추가 상륙과 2군단의 배신으로 결국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셀바티온군이 세르바에서 최후까지 격렬한 저항을 펼쳤으나, 12월 30일, 세르바가 함락되며 페닝엄섬으로 후퇴하였다.

셀바티온 군정청

독일은 쿠르텐섬과 칼텐섬의 점령지에 셀바티온 군정청을 설립하였으며, 페닝엄섬으로 넘어간 남은 잔당들을 몰아내기 위해 수차례 폭격을 진행하고 1941년 1월 20일, 바르데니아 제도 상륙과 함께 본격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각주

  1. ↑ 셀바티온은 대공황 수습 과정에서 기존의 40% 수준까지 군축을 진행하는 등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