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10가지 계율이기에 '십계명'으로 불린다. 기독교에서는 이 십계명을 위반한 여부를 가지고 대죄이냐 소죄이냐를 판별하기도 한다. 또한,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이 살았던 족장시대에 야훼의 말씀을 기록한 성문화된 경전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에녹이 에녹서를 썼다고 하나 이는 외경으로 취급받는다. 십계명은 '말씀'을 담은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 있으면서 깨끗한 석판에 하느님의 말씀을 적어서, 기쁘게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자기 형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화가 난 모세는 석판을 던져서 깨버렸다. 이후 모세가 자기 형 아론에게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냐고 따지니 아론은 할 말이 궁색해서 사람들이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길래, 금을 가진 사람들에게 청해 금을 모아서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오더라고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했다. 이에 제대로 열받은 모세와 레위인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된 이유를 이 일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들은 우상을 숭배한 3,000명 가량의 사람들을 숙청해 버린다. 그 후에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다시 받았다고 한다.
종교적 관점을 제하고 봐도 모세의 행동은 충분히 정당성이 있다. 기껏 고생하면서 하느님의 말씀(=타락하지 않기 위한 행동지침)을 곰곰이 생각하며 새겼건만, 그 사이를 참지 못한 백성들이 그새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미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 성서에서는 단순히 석판을 깨고 군사를 모아 우상 숭배자들을 몰살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지만, 영화 십계에선 한 술 더 떠,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금송아지에 집어 던지자 금송아지 주변에 있던 땅이 갈라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원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개신교의 경우 성경을 출판할 때에 따로 발췌하여 부록으로 수록하는 경우가 많으며, 가톨릭 성경에는 부록으로 발췌하진 않고 대신 기도서에 들어있다. 이는 기도서의 유무에서 비롯된 차이인데,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정형화된 기도문이 많기에 따로 기도서를 발행하고 십계명도 여기에 적은 것이다. 즉 개신교 입장에서는 정형화된 기도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주기도문, 사도신경 정도가 전부이기에, 성경의 부록으로 합쳐서 휴대성을 극대화한것. 원래 성경 겉표지 안쪽에 십계명을 넣은 이유 자체가 예배 때 외우라고 있는 것이고, 실제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보수적인 장로교나 개혁 교회에서는 오전 예배 시작 때 이것을 낭독하며, 흔히 생각하는 사도신경은 저녁 예배 때 낭독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예배 순서에서 십계명을 외우는 개신교는 사실 별로 없다.
가톨릭에서도 가톨릭 기도서 내 주요 기도문으로 십계명이 실려 있다.
타 종교에서 비슷한 개념을 들자면, 불교에서 재가인(평신도)이 지켜야 할 규정인 오계가 있을 것이다. 음주를 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도 평신도에게는 완화되어 술에 취하지 마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승려들은 술 마시지 마라고 해석한다. 오계의 내용은 십계명에서도 비슷한 규정을 찾을 수 있다. 오계 이외에도 팔계, 십계 등도 불교에 있으나 너무 빡세서 잘 안 쓰인다.
원문
성경에서 모세의 십계명에 대한 직접적 서술을 한 곳은 출애굽기(탈출기)와 신명기다. 밑의 내용은 출애굽기(탈출기)에 나오는 모세의 십계명에 대한 구절이다.
구분법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 가톨릭과 루터교회의 제1계명이 정교회나 다수 개신교에서는 제1계명과 제2계명으로 나뉘어져 있다. 반면에 가톨릭과 루터회의 제9계명과 제10계명이 정교회나 다수 개신교에서는 제10 계명으로 합쳐져 있다.
첫 1~4(가톨릭 및 루터교회에선 1~3)계명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나중에 있는 5~10(4~10)번은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인 도덕규범이다. 특히 앞선 계명들은 인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하느님과 같은 자리(또는 그 위의 위치)에 오를 수 없음을 의미하기에, 훗날 나타난 개념인 메멘토 모리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 역시 1등은 항상 하느님이 차지하고 있으니 절대로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살라는 지침이었다.
또한 굳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어도 5~10(4~10)번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높은 확률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 살인, 강간, 위증, 절도, 강도는 모두 형법상 죄이며, 간통의 경우 한국에서는 더이상 형법상 죄가 아니지만 민사상으로 여러가지 불이익이 뒤따른다. 굳이 따지자면, 이혼 시 높은 위자료를 청구 받거나 재산 분할에서 큰 불이익을 당하는 등, 다시 말해 이혼을 요구할 권리를 잃는 모든 일을 말한다. 다만 6번째 혹은 7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 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그 중요성이 크게 감소한 계명이긴 하다. 간음은 간통이나 문란한 성행위만을 의미하진 않고 '결혼 관계 외의 모든 성행위'를 일컫기 때문에 연인 간에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충실하고 심지어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면 둘 사이의 성관계는 간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들은 혼전순결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현대에 이르러 서구 사회나 한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책임질 준비가 된 연인 간에 갖는 혼전 성관계는 도덕적 타락으로는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 물론 이슬람권이나 하레디 사회 등 아직도 혼전순결이 당연한 문화권 역시 많이 남아있다.
물론 모든 도덕과 법이 항상 지켜지지 않듯, 십계명 또한 심지어 그리스도교 내에서조차도 항상 지켜지지는 않는다. 종교적 해석에 기인하자면,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날마다 계명들을 어긴다. (전도서 7:20, 요한 1서 1:8, 창세기 8:21, 야고보서 1:14, 3:2-8, 시편 19:1–12, 열왕기 상 8:46) 심지어 현대에도 기복신앙에 젖은 몇몇 탐욕스러운 종교인들은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십계명을 온전히 준수하려는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며, 계명 어기는 것에 대한 여러 성경 구절들은 인간의 영적인 나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결국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지론.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 한두 번은 어길 수밖에 없는 마당에, 대놓고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행위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예레미야 7:9절 에서 대놓고 까발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에 있어 가장 무시되고 있는 계명이자, 어찌보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계명은 다음의 계명이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는 동아시아에 있는 피휘같은 관념이 이었는데 자기보다 높은 사람의 면전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건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나 가능했다. 문제는 하느님은 누구보다도 높은 존재이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이 계명은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무도 못부르고, 적지도 못하다보니 이름이 실전되어버린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아예 안쓸 수는 없어서 히브리어로 'יהוה'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신의 이름에서 모음만 기록한 것이다. 이를 라틴어계 문자로 옮기면 YHWH 또는 YHVH가 된다. 적을때는 자음으로 적었지만, 당시에는 신의 이름을 다들 알고 있었지만, 읽을 때 절대로 부르면 안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같이 읽을 때는 아도나이(나의 주인, 주님)라 읽게 되었다.
그리스에 전해진 이후에도 철저히 지켜지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테트라그람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 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네 글자라는 뜻으로 로마시대 이후까지 전해진다. 'יהוה', YHWH 또는 YHVH 마저도 피휘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처럼 야훼나 여호아를 감히 부르는 사람은 십계명 기준으로는 지옥에 떨어질 범죄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야훼는 하느님의 이름의 모음자만 모은 것으로 실제로 어덯게 불렀는지는 실전되어버렸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을 부른게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완전히 무시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계율이라는 이상한 형태로 준수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