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제2대 국왕 유리왕 琉璃王 | |
|---|---|
| 본명 | 유리 |
| 출생 | 기원전 38년 |
| 고구려 | |
| 사망 | 18년 |
| 고구려 | |
| 재위기간 | 왕태자 |
| 기원전 19년 | |
| 섭정 왕태자 | |
| 기원전 19년 ~ | |
| 제2대 국왕 | |
| 기원전 19년 ~ ~ 기원전 17년 | |
| 전임 | 태상왕 |
| 후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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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구려 2대 국왕.
약력
생애
동명성왕과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왕태후 예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보였으며, 어머니인 왕태후 예씨의 큰 기대를 받았다. 이후 국왕으로 즉위하여 뛰어난 외교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업적을 이어갔다.
프로이센을 새 왕후로, 그리고 두 번째 왕후를 예씨로 새로 맞이하였다.
대외 관계
개인적 면모
성향이 매우 독재적이며, 고구려 전체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어머니인 대왕태후 예씨와도 갈등을 빚었으며,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의사도 없어 보이는 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인다.
비판 및 논란
유리왕은 독재자로 선포된 이후 어머니인 대왕태후 예씨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어머니를 궁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대왕태후 예씨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고 다시 복귀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당시에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아무리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국왕의 자리에 올려준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그마저 내쫓은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으로 볼 수 없다. 더욱이 대왕태후 예씨는 왕태자 무휼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유리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교와 국정에 힘썼다는 점과는 별개로,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어머니의 뜻을 무시하고 왕위를 독점하려 한 점에서 유리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는 왕실의 계승 질서를 흔들고 독재적인 통치를 강화한 사례로 평가되며, 훗날 국가의 혼란과 쇠퇴를 예고하는 징조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어록
평가
독재를 꿈꾸던 유리왕은 끝내 왕위에서 물러났다. 아들인 무휼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영원히 국왕의 자리에 머물고 싶어 했던 유리왕이었으나, 현실을 자각했는지 결국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가족 관계
별명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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