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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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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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 제2공화국 ·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 제5공화국 · 제6공화국
  1. ↑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 한사군은 한국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4. ↑ 4.0 4.1 4.2 외세의 점거로 인해 한민족에 의한 정권수립이 되지 않은 경우.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고구려[1]
高句麗 | Koguryŏ(Goguryeo)
80%
군기[2]
100%
기원전 37년[3]~서기 668년 12월 3일[4] (70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조선 현도군[5]
고구려현
당
안동도호부[6]
발해[7]
부여 소고구려[8]
고구려부흥운동[9]
예맥계 소국들[10] 신라[11]
패서 호족 • 보덕국
국호 졸본부여[12] → 고구려[13] → 고려[14]
위치 한반도 중 · 북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프리모리예 지방 일대[15]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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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건국, 졸본성 도읍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1년 서안평 점령[16]
313년 낙랑군 축출
314년 대방군 축출[17]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10년 동부여 병합
427년 평양성 천도
475년 위례성 점령
494년 북부여(부여) 병합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연씨 정권 수립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수도 졸본성 → 국내성[18] → 평양성[19]
삼경 국내성[20] · 평양성 · 한성[21]
민족 예맥, 한(韓), 말갈[22]
언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구결
종교 무속[23], 대승불교[24]
정치 체제 군주제
(제가귀족제 → 전제군주제 → 군사독재)
국가원수 태왕(太王)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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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해(解) → 고(高)[37]
현재 영토 대한민국 대한민국
틀:나라자료 북한
중국 중국
러시아 러시아

개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고대 한반도 삼국시대 세 나라 중 북쪽에 위치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도 발해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국가였다. 신라(991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이기도 하며,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등장하였다.

각주

  1. ↑ 장수왕 이후 고려(高麗)로 개칭. 문단 참고.
  2. ↑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
  3. ↑ 위 영토 사진은 5세기에 고구려가 최전성기를 이루었을 때의 최대 영역이다.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문서로.
  4. ↑ 무진(戊辰)년 계해(癸亥)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10월 21일, 율리우스력에서는 11월 30일이다(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중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했다.
  5. ↑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했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국, 졸본부여, 조나국, 구다국 등의 소국들이 군장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6. ↑ 나당전쟁과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통치기관이다. 단, 아직 건재하던 때 약 22,800에서 33,200여 호(戶)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영주와 중원 일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7. ↑ 영주 일대에서 탈출한 대조영과 걸걸중상의 고구려 유민 세력, 그리고 만주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들 외에도 속말말갈을 비롯한 친고구려 성향의 말갈 부족들이 힘을 모아 건국했다.
  8. ↑ 소고구려의 실존 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다만 실존했다면 발해의 선왕 대에 이르러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 ↑ 발해 건국 세력 이외에도 패서(浿西)와 요동(遼東)에서 활동한 남북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들. 남부에서는 한성의 검모잠과 안승이, 북부에서는 북부여성의 고정문과 오골성의 고연무 등이 있다. 나당전쟁 당시 부흥운동이 꺾이자 이들 대다수는 신라에 합류했다.
  10. ↑ 잘 알려진 동예, 옥저를 비롯해 비류국, 조나국, 개마국, 구다국, 주나국, 해두국, 행인국, 황룡국, 대수맥, 소수맥, 양맥 등 수많은 소국들이 초기 고구려 형성 과정 중 병합되었다.
  11. ↑ 전북 일대의 보덕국민, 호로하 일대와 그 이북인 패서의 고구려인, 영동 일대의 고구려 유민, 그리고 요동 등 북방에서 대량으로 귀부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이 있다.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후손인 왕건은 훗날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250여 년 만에 부흥운동의 결실을 맺게 된다.
  12. ↑ 동명성왕~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
  13. ↑ 동명성왕~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4. ↑ 장수왕~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고려 태조가 이어갔으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 세계에서 한국의 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15. ↑ 영남의 신라와 그 주변부 그리고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헤이룽장성, 연해주 남부의 유목, 수렵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 장수왕 대에 유연#s-3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후속 연구는 수십 년 째 전무하다.
  16. ↑ 건국 당시 내륙 국가였던 고구려가 비로소 서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서해 진출의 의의는 중국 및 백제 방향으로의 진출이 해상으로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고구려가 수군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반면 고구려가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 때는 57년 옥저를 복속했을 때이다.
  17. ↑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래로 장장 400여 년간 지속된 걸로 추정되는 이민족의 지배를 청산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것이다.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한 것은 404년 광개토대왕때지만, 광개토대왕이 마지막으로 축출한 현도군은 이미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의 영토 밖에 있었다. 따라서 현도군은 축출했다기보다는 침공해서 점령에 성공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이 사건이 백제에 끼친 영향력도 상당한데, 낙랑군·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는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대량으로 흘러들어온 신진 문물을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훗날 백제가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할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건이 한반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18. ↑ →환도성→국내성
  19. ↑ →장안성.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명왕 대에 국내성(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의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국내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평양 동쪽 황성(혹은 평양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이후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 ↑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 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환도'(丸都)의 '환'(丸)을 '중'(中)으로 잘못 표기한 기록으로 보인다.
  21. ↑ 패서 지역에 속하는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인근으로 비정된다.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수도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설치됐으며 안승과 검모잠이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서는 통일신라가 차지했고, 이후의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비롯한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 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22. ↑ 흑수말갈, 속말말갈, 백산말갈 등
  23. ↑ 고구려/종교 문서로.
  24. ↑ 소수림왕 시기부터
  25. ↑ 개국군주,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정벌
  26. ↑ 동부여, 개마국 병합, 낙랑군 정벌, 청천강 이북 점령
  27. ↑ 동옥저, 갈사국, 조나국 정벌, 중앙집권체제 마련
  28. ↑ 을파소를 재상으로 등용, 진대법 실시
  29. ↑ 서안평,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 정벌
  30. ↑ 전진으로부터 불교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31. ↑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 사용, 만주(숙신)와 한강 이북 점령, 백제, 왜, 가야 연합군 격파, 동부여 병합
  32. ↑ 평양성 천도, 남한강 유역 확보, 5부 개설
  33. ↑ 북부여(부여) 병합
  34. ↑ 양나라, 동위와 수교
  35. ↑ 고구려-수 전쟁 발발, 신집 편찬, 왜에 담징 파견
  36. ↑ 연개소문에 의해 즉위, 고구려-당 전쟁 발발, 망국의 군주
  37.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몽(추몽)은 부여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다. 원래 해(解)씨였으나 고구려 건국 이후 횡성 고씨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