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인물을 다루는 문서입니다. |
고구려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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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초대 국왕 동명성왕 | 東明聖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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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추존 국왕 졸본부여 말대 군주 조선 비왕족 추존 국왕 | ||||||||||||||||||||||||||||
| 국학원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는 동명성왕 동상[1] | ||||||||||||||||||||||||||||
| 출생 (음력) |
기원전 58년 4월[2][3] | |||||||||||||||||||||||||||
|---|---|---|---|---|---|---|---|---|---|---|---|---|---|---|---|---|---|---|---|---|---|---|---|---|---|---|---|---|
| 북부여[4] 또는 동부여[5] | ||||||||||||||||||||||||||||
| 사망 (음력) |
기원전 19년 9월 (향년 39세)[6] | |||||||||||||||||||||||||||
| 고구려 졸본성 | ||||||||||||||||||||||||||||
| 능묘 | 고구려 용산(龍山)[7] 홀본 동쪽(忽本東)[8] 동명왕릉(東明王陵)[9] | |||||||||||||||||||||||||||
| 재위기간 (음력) |
고구려 초대 국왕 | |||||||||||||||||||||||||||
| 기원전 37년 2월 ~ 기원전 19년 9월 (18년 7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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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신 추모 임금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자라를 띄워라!"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임금의 언령. 광개토대왕릉비 중 발췌 |
” |
묘호와 시호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뒤에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 따로 있다는 점도 동명성왕의 호칭인 태조가 묘호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칭호
보통 주몽과 동명(東明)을 동일시하지만 당대 기록인 702년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東明)과 '주몽'(=추모/중모)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다.
|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 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연남산 묘지명〉 中 |
이처럼 고구려 때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삼국시대가 끝난 뒤 훗날 고려 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추모왕이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명왕 문서 참조.
생애
| 신이하고 이상한 일(靈異),《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의 서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 임금 도산(塗山)의 모임에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0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부여의 왕 부루가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할 때,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15]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자, 왕이 이상하게 여겨 그 돌을 치우니 금색 개구리처럼 생긴 아이가 울고 있으니, 왕이 '이는 내게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하여 데려와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짓고 태자로 삼았다.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일전에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이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이곳을 피하라 하였는데, 동해 바닷가에 땅이 있는데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어 5곡(五穀)이 잘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하여 왕이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로 하였다. 부여의 옛 땅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내려와서 도읍으로 삼았다. 한나라 신작(神雀) 3년[16] 임술년에 하늘이 태자를 부여의 옛 도읍에 내려보내 놀게 하니, 이름은 해모수이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따르는 무리 100여 명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채색 구름이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려 퍼졌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무르다가 10여일 만에 내려오니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찬 채 아침에는 나라의 일을 보고 밤에는 올라가니 세상에서는 그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칭했다.[17] 성 북쪽 청하(靑河)[18]에 하백의 세 딸이 있으니 맏딸이 유화(柳花), 둘째딸이 훤화(萱花), 막내딸이 위화(葦花)이니 그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다. 세 딸이 웅심연(熊心淵)가에서 놀고 있는데, 왕이 좌·우(左右)에게 말하기를 '저 여자를 얻어서 비(妃)를 삼아 후사를 보리라'고 하니, 세 딸들이 곧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물 속으로 도망가 피했다. 좌·우가 말하기를 '왕은 어찌하여 궁전을 지어 저 여자들을 방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옳다'하여 말채찍으로 땅을 잠깐 그으니 순식간에 구리로 집이 지어져 금술잔에 맛있는 자리를 차리니, 세 여자들이 서로 그 자리에 앉아 마셔 취하였다. 왕이 세 여자가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나가 막으니, 맏딸 유화가 왕에게 붙잡혔다. 하백이 이에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급히 달려가 고하길래 너는 누구길래 내 딸을 붙잡아 두느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지금 그대의 집안과 혼인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하백이 다시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만약 네가 구혼하려거든 정식으로 중매를 보내 시켰어야 하거늘, 갑자기 내 딸을 억류해 두니 이런 무례가 있는가'라고 했다. 왕이 부끄러워하여 이제 하백에 가서 고하고자 하였으나 하백의 방에 들어갈 수 없고, 또 그 딸을 놓아주려고 하니 이미 그 딸이 정을 통하였으므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용수레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하니, 잠시 후 하늘에서 오룡거가 내려와 왕이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순식간에 풍운(風雲)이 일어 대번에 하백의 궁에 이르렀다.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자리에 앉아 이르기를, '혼인의 예는 천하의 규범이거늘, 어찌 무례를 저질러 우리 가문을 욕보이는가'하며, '왕이 천제의 아들이면 어떤 신이한 능력이 있는가'하니 왕이 '그저 시험해 보시면 될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 물에서 잉어가 되어 물결을 따라 헤엄치니 왕이 수달이 되어 붙잡았다. 하백이 이번에는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승냥이로 변해 쫓았다. 하백이 꿩이 되자 왕은 매가 되어 공격했다. 이에 하백이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라 여겨 혼인의 예를 갖추고 자칫 왕이 딸을 데려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자리를 성대히 차려 왕으로 하여금 크게 취하게 한 후,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집어넣어 용거에 실려 하늘로 올려보내려 하였다. 그 수레가 아직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왕이 곧 술에서 깨어 여자의 황금 비녀로 가죽 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홀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에 하백이 그 딸에게 크게 노하여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끝내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하고 옆에 있는 신하들을 시켜 딸의 입을 묶어 당기게 하니 그 입술이 석 자나 되게 하고 종 두 사람만을 주어 우발수(優渤水) 속으로 추방했다. 우발은 연못 이름인데 지금의 태백산 남쪽에 있다. 부여의 어부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금와왕에게 고하기를, '근래에 어망에 잡힌 물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없나이다'라고 하여 이에 왕이 어부를 시켜 그물로 끌어내게 하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내 비로소 한 여자를 얻었는데 돌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 여자가 입술이 길어 말을 하지 못하매, 세 번 그 입술을 끊어내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이 해모수의 왕비인 것을 알고 별궁에 두었더니 여자의 품 안에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비쳐 임신하고 신작(神爵) 4년 계해년 여름 4월(기원전 58년경)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울음소리가 매우 크고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에 왼쪽 겨드랑이에서 큰 알을 낳았는데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이 새 알을 낳다니 이는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라고 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말들이 서로 밟지 않았으며, 깊은 산에 버리자 짐승들이 모두 보호했고, 구름이 낀 날에도 알 위에 늘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왕이 알을 가져다 어미에게 기르게 하니 알이 마침내 갈라져 사내아이가 나왔다. 태어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말을 능숙하게 하고, 어미에게 말했다. '파리 떼가 눈을 물어 잘 수가 없습니다. 제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십시오'하니 어미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에 있는 파리를 쏘았는데 죽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컬어 '주몽'이라고 했다. 나이가 많아지자 그 재능이 날로 겸비해졌다. 금와왕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평소에 주몽과 함께 사냥을 나가면, 왕자와 시종 40여 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 여러 마리를 잡았으니 왕자들이 시기하여 주몽을 붙들어 나무에 결박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가자 주몽이 나무를 뽑아버리고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고하기를 '주몽은 영리하고 용맹한 놈이며 외양이 남다릅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주몽의 뜻을 시험하고자 말을 기르게 했다. 주몽이 한(恨)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저는 하늘의 자손인데 남을 위해 말이나 기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그 어미가 타이르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 길을 떠나려면 반드시 준마(駿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가 말을 골라 주겠다'고 하여 마구간에 가서 긴 채찍으로 마구 때리니 말들이 모두 놀라 도망쳐 나갔다. 붉은 말 한 마리가 두 길이나 되는 울타리를 뛰어넘자 주몽이 좋은 말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꽃아 두니 이에 말이 혀가 아파 물도 먹이도 먹지 못해 몹시 야위었다. 왕이 마구간에 순시 나왔다가 말 떼가 모두 살찐 것을 알고 크게 기뻐서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듣고 바늘을 뽑아 말을 도로 먹였다. 왕자와 신하들이 다시 주몽을 죽이려고 일을 꾸미니 어머니가 이를 눈치채고 이르기를, '장차 사람들이 또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서 무엇인들 안 되겠느냐. 여기서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룸이 바람직하다'라고 하였다.[19] 그리하여 주몽이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등 세 사람과 남쪽으로 엄사수(淹㴲水) 가에 이르니, 이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며 압록강 북동쪽에 있다. 주몽이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고 추격해오는 군사가 곧 들이닥칠까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한탄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이르렀으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뜠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러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들의 다리가 곧 무너져 모두가 빠져 죽었다. 주몽이 그 어미와 이별할 적에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이르기를, '너는 이미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곡식의 씨앗을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어찌나 생이별하는 마음이 간절한지 보리 종자를 잃어버렸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에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와 이르니, 주몽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걱정하여 어머니께서 사람을 시켜 씨앗을 보내신 것이다'고 하여 바로 활을 당겨 화살 하나로 한 쌍을 모두 맞춰 잡으니 목구멍을 열어 보리씨를 꺼내고, 물을 비둘기에게 뿜어 주니 곧 다시 살아나 날아갔다.[20] 일행이 모둔곡(毛屯谷)[21]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니 그 중의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 한 사람은 누더기옷(衲衣),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인가'묻자 삼베옷 입은 사람은 재사(再思), 누더기옷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 마름옷 입은 사람은 묵거(默居)라고 하였으니 성씨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내려주고 무리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큰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으로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22]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지세(山河)가 험하고 드디어 도읍으로 삼으려 했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치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씨 성을 삼으니,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고, 한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스스로 대강 띠자리 위에 앉아서 왕과 신하의 위치를 정하였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무리가 많고, 그 땅이 말갈 부락과 맞닿아 있어 침략과 도적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물리치니, 마침내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침입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비류왕 송양(松讓)이 상류에 나갔다가 왕의 얼굴이 비상하고 범상치 않음을 보고 묻기를, '바다 한가운데 궁벽한 곳에 있어 아직까지 군자를 만나 보지 못했소. 이제 비로소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대는 어떤 사람이고, 어디서 왔는가?', 왕이 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이며 서쪽 나라의 왕이오. 감히 묻건대 임금은 누구의 후예인가?', 송양이 말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예요. 대대로 이곳에서 왕을 지냈으니, 땅이 좁아 두 명의 임금으로 나눌 수 없고 그대가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되었으니 나의 부속국이 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왕이 또 말하니 '나는 천제의 뒤를 이었지만은, 그대는 신(神)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을 자처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이다'고 하였다. 송양이 왕이 여러 번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여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니 '왕과 더불어 활쏘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여 그린 사슴을 백 보 안에 놓고 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힘에 겨웠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玉指環)를 가져다가 백 보 밖에 매달듯 쏘았는데 산산히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왕이 '나라의 기업이 새로 만들어져 아직 북과 나팔의 위엄이 없다.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써 맞이하질 못하니 그 때문에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하니 왕을 모시던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나아가 고하기를 '제가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겠나이다' 왕이 말하기를 '다른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느냐?' 부분노가 답하니 '이는 하늘이 준 기물이니 어찌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께서 부여에서 곤욕을 당하고 계실 때에는 누가 대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만 번 죽음을 당할 위태한 곳에서 몸을 빠져나와 요동에 이름을 떨치고 계십니다. 이는 하늘이 시켜 그리 되는 것인데 무슨 일인듯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명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볼때 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속국을 정하려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1,000년은 되는 것 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끝내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왕이 서쪽으로 순행할 때 흰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蟹原)언덕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주하였다.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 비류국의 왕도를 물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벗어나려거든 너는 하늘에 호소하라.' 그 사슴이 슬피 울어 하늘에 사무치니 장맛비 온지 이레 만에 송양의 도읍이 물바다가 되었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건너고 오리와 말을 타고 다녔으며 백성들도 모두 그 밧줄을 잡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었다.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4년 7월에 검은 구름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그 산을 볼 수가 없었다. 수천 사람의 소리가 마치 토목 공사를 하는 것처럼 들리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해 성을 쌓는다'라고 하였다. 이레 만에 구름과 안개가 흩어지고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만들어져 있었다. 왕이 하늘에 절하고 나아가 지냈다. 6년 가을 8월에 신작(神雀, 상서로운 새들)이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 명하여 태백산 동쪽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복속시켰다. 10년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해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4년(B.C 2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사망하니,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19년(B.C 19년)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오니 왕이 이를 기뻐하고 태자로 삼았다. 이름은 유리(類利)인데 유류(孺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인이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나온 뒤 태어났으니 그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렸을 때부터 기이한 기질이 있었다 한다. 어릴 때는 늘 참새를 쏘면서 놀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깨뜨렸다. 이에 그 아낙이 노하여 난하기를 '아비도 없는 미련한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부수었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진흙 탄환을 쏘아 물동이의 구멍을 막아 되돌려 놓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어머니가 유리가 어리다고 생각해 농담 삼아 '네게는 딱히 아버지가 없다'고 하니 유리가 울면서 '사람이 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는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하니 어머니가 놀라서 말리기를 '아까 한 말은 장난으로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 신세임을 원망하여 멀리 남쪽으로 떠나 나라를 열었단다. 네가 가서 뵙겠느냐?'유리가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나라의 임금이 되었으나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제가 비록 재주는 안 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어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떠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유리가 산골짜기로 가서 찾다가 찾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는데, 집에서 구슬픈 소리를 들으니 그 기둥은 주춧돌 위의 소나무였고 몸통에 일곱 모가 나 있었다. 유리가 마침내 스스로 깨달아 말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는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의 소나무라면 기둥이다' 라고 하여 일어나 가 보니 기둥에 구멍이 있었다. 거기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어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 홍가 4년(기원전 17년)에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명과 함께 고구려로 달아나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받들어 올리니, 왕이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온전한 한 자루가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말하니 '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어떤 신이함이 있느냐' 하니 유리가 곧바로 몸을 날려 공중에 솟구쳐 창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가리는 신성함을 보여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19년 가을(B.C 19)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왕의 나이가 40세였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 채찍을 용산(龍山)에 묻어 장사지냈다. |
각주
- ↑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동명성왕의 상이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동명성왕의 영정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
- ↑ 《구삼국사》 기록.
- ↑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건국 당시의 동명성왕의 나이가 12세(만 11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역산하면 기원전 48년생이 된다.
- ↑ 광개토대왕릉비 기록.
- ↑ 《삼국사기》 기록.
- ↑ 《삼국유사》 기준으로 29세
- ↑ 《삼국사기》 기록. 중화현 용산에 있는 동명왕묘일 수도 있다.
- ↑ 광개토왕릉비 기록. 용산과 같은 지역일 수도 있다. 혹은 미창구 장군묘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으며, 중국 학자들은 망강루 4호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 고려 북계 중화현 용산에 위치. 고려시대에 동명왕릉으로 전해지던 능묘다. 대한제국 때 동명왕릉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내려져 오고 있다.
- ↑ 가장 흔히 알려진 이름.
- ↑ 졸본부여의 군주 또는 월군(越郡) 사람의 딸이라고 한다.
- ↑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이 있었던 알의 크기가 5되였다는 기록이 있다.
- ↑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에선 고구려 후손 안승의 조상 "태조 중모왕"으로#, 일본의 사서인 《신찬성씨록》에선 백제의 초대 임금 온조의 부왕 "태조 도모대왕" 으로 나와 있다.
- ↑ 고려시대에 평양의 신으로 추앙되며 높혀진 칭호. 평양 인리방에 성제를 모신 동명성제사가 있었다.
- ↑ 북방 지역의 전승으로 큰 물고기인 곤(鯤)이 때마다 새로 변해 남쪽으로 향하는 연못을 의미한다.
- ↑ 기원전 59년경
- ↑ 이 전승은 《제왕운기》 기록에도, 해모수의 아들인 동명성왕으로 대를 이어 반복된다.
- ↑ 지금의 압록강
- ↑ 《삼국사기》에만 언급되는 내용으로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이러한 직접적인 동기가 생략되어 있다.
- ↑ 대지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되던 유화부인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 압록강 중류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추정하며,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음술수(音述水)라고 언급되어 있다.
- ↑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와 전승이 비슷하여 원류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위서》 〈고구려전〉에는 홀승골(紇升骨)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과 비정이 거의 동일한 곳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