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공화국의 설정역사

1979~1989

혁명이후 집권한 호메이니는 그당시 소련에 의한 내정간섭과 자유주의 탄압으로 인한 미국의 대규모 군사제재를 걱정하며, 일부 강경주의 노선을 지닌 운동권 인사와 혁명을 부정하는 기존수구세력을 제외한 기타 공산주의자, 온건 자유주의자에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이라크-이란 전쟁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오만등과 접촉하여 기존 수니파세력과의 화해를 도모하기위한 1981년 4월 9일 화해의 날로 지정하게되었다. 또한 기존의 석유 자원에대한 영국과의 극적인 협상끝에 영국/이란 3:7수준의 석유가치 분할을 마치며 서방과의 화해모드를 내비쳤다.또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양국대사가 무려 19번 접촉하여 각종 문화/기술교류를 단행함으로써 기존 이양인 배척문화를 청산하기위한 이민자 평등을 위한 권익위원회를 설치하는등 더욱더 국내산업발전과 소프트파워를 키우는등의 다양한 조치를 시행하였다.


1990~1992

1979년 이슬람혁명이후 12년이 흐른 1991년에 신연방조약으로인한 소비에트 주권공화국연맹으로써의 소련의 다당제 개혁과 부분적 민주화로 생긴 민주화의 열망은 그당시 만연한 이슬람혁명수비대의 경제적 지배와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당연하였던 뇌물문화는 당시 혁명주도 세력이었던 상인들조차도 불만을 품을정도로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1991년 9월 3일 람사르에서 "이란민중의 민주화 요구결의안"을 발표하는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중소형시위가 만연히 일었다.허나 이란정부의 강력한 대응아래 사그라들게 된다.그리고 1992년 4월3일 호라산지역 전역에서 현 이란 좌파의 근간이되는 이란동지회를 필두로한 봉기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에 당시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사람을 절구로 빻아죽이는 비인륜적행위가 팽배하였다고 증언한다.

1993~12월 민정이양운동 이전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이란정부는 강력히 이란내의 민주화세력을 탄압하기위해서 이란자체의 인트라넷 "E채널"을 구축하여 외부 정보통신을 차단하는등의 폐쇄적인 정책을 진행하였다. 허나 당시 이란 전체노동자의 34%가 총파업에 참가하는등의 반정부 기조는 확대되었고 1994년 2월과 5월에 마슈하드에서 2차례에 걸친 민주화 시위로 이어지게되었다. 또한 테헤란민주언론인연합(TVT)가 창립되었으며 "이란학생투쟁그룹"을 비롯한 이란의 운동권세력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면서 1994~1995년까지 정치범으로 수용된인원이 3400명을 넘겼다고 추정될 만큼 강력히 단속하였다.그러나 1년뒤 1995년 11월 22일 TVT자유의소리에서 4월사건당시 피해자명단과 영상등을 E채널을 비롯한 방송국에 송출한 "4월사건 피해자명단 송출사건"으로 12월 민정이양운동발생하게 되었다.


개혁헌법공개~제1대선까지

민정이양운동이후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1월1일에 "개혁헌법"을 발표하였다. 개혁헌법는 샤리아법을 금지하고 국가지도자회의와 전문가회의를 해산하였으며 이란 최초의 민주적의회인 "국민회의"를 신설되였다. 또한 기존 최고지도자 직속 혁명수비대를 헌법수호위원회 산하로 이관하여 권한을 축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종교 자유화와 정당의 정치참여및 국민회의 참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1996년 1월 23일에 제1대 국민회의 선거가 개최되면서 이상대표의 "자유의 혁신"과 투하쳅스키의"이란공산당"를 비롯한 군소 22개의 정당이 국회에 참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게되었다. 그중에서 자유의혁신과 이란공산당(이하 이란좌파당)이 원내에 40%를 차지하면서 거대정당으로 성장하게된다. 또한 국회 구성일 이틀후 2월 10일에 빠르게 대선을 치루게되었다. 이때 이상(전)제1대 대통령후보자가 그당시 이란기독당 대표인 영유와 단일화를 시행하면서 당시26%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통해 당선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