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국/역사

< 잉글랜드 왕국
Ocelot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3월 19일 (화) 21:49 판

잉글랜드의 배경

잉글랜드 땅을 형성하는 섬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브레타니아라고 남긴 것이 처음이고,기원전 2세기에 폴리비어스가 브레타니아를 주석이 나는 섬으로 묘사한 것이 그 다음이다.기원전 55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전기'에서 잉글랜드 땅과 사람에 관해 기록한 것이 최초의 완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브리태니아와 켈트인인 브리튼 사람에 관한 것이지 잉글랜드와 앵글로색슨에 관한 것은 아니다.켈트인은 브리태니아에 살던 원주민들로,오늘날 북부 아일랜드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는 게일인들과 웨일스에 남아 있는 웨일스인 등의 조상이다.

줄리어스 시저 이후 오백 년 동안 브리태니아에서는 로마의 역사가 벌어졌고,런던을 중심으로 로마의 길이 사방으로 뻗었고,온천장인 배쓰가 로마계 브리티쉬의 중심지가 되었다.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셉티머스 세베루스 황제 등의 원정으로 스코틀랜드에 하드리안 월이라는 역사적 유물이 만들어지고,이 이남지역은 완전히 로마화되었다.남부지역에 여러 도시가ㅣ 생겨났으나 북쪽에는 아일랜드 해적과 픽트족의 침입이 잦았다.북쪽의 침입자들과 색슨인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5세기 중반에 로마군이 철수하고 이 섬은 대륙에서 건너온 주트,앵글스,색슨스의 차지가 되었다.6세기 초에는 앵글로색슨의 7왕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1066년에 데인족(지금의 덴마크인)들과 노르만 민족(지금의 노르만 민족과 프랑스 민족)이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거주함으로써 민족 구성의 기반과 문화에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역사는 튜튼족(지금의 독일,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민족)민족 이동이 한 축을 이루면서도 네덜란드나 독일의 역사와 구별된다.섬나라 잉글랜드는 유럽대륙과 불과 30여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유럽대륙과 다른 문화를 이루는 주된 원인이 된다.잉글랜드에는 주석이나 철,구리,아연 등과 같은 광물과 특히 석탄이 풍부했다.또한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목장의 육류와 곡물 생산은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에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했다.

잉글랜드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유럽대륙의 지역에서는 겨울의 기온이 영하 30~40도로 내려갔지만,이 섬나라를 둘러싸고 흐르는 대서양만류는 이 나라의 겨울을 그다지 춥지 않도록 유지시켜 주었다.섬나라로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대륙의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배양할 수 있었다.

기원전 55년부터 450년경까지 오백 년 간 유지된 로마의 지배는 영국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했고,잘 닦인 길을 남겨놓았다.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했으므로 그 생명이 유구한 것이고,이때 만들어진 길은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432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성자 패트릭을 파견하였고,이후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장기간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대륙에서 침입한 이교도들에게 접수된 브리튼 사람들의 나라는 색슨인들의 나라인 에섹스,웨섹스,서섹스와 주트의 나라인 켄트,앵글스의 나라인 이스트 앵글리아,머시아,노썸브리아 등의 7왕국으로 발전하였다.로마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597년에 성 어거스틴을 파견하여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는 사라지고,잉글랜드 문화는 중세초기에 유럽대륙을 지도할 정도로 발전했다.669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캔터베리 대주교 데어도어는 교회행정을 재조직하고 그레코로만 문명을 수입하여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던 7왕국을 통일국가 잉글랜드로 만들고 영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발전의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다.끊임없는 민족이동은 새로운 정복과 피정복의 반복을 가져왔으므로,잉글랜드는 내부의 질서회복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아일랜드의 민족인 스코트족은 스코틀랜드로 갔고,데인족은 브래타니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켰다.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남기면서 국토 통일과 문화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시에도 데인족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해왔고,알프레드 대왕의 자손들이 브래타니아 통일을 이룩하자 데인족들은 프랑스 영토로 몰려가 911년에는 노르만디 공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노르만디 공국을 세운 데인족은 잉글랜드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을 1066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잉글랜드의 형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제국 군대가 잉글랜드에서 물러간 이후 약 5세기 동안 수많은 민족이동이 일어나 브리튼은 잉글랜드로 되어갔으며,근대국가의 모습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유럽에서도 이때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1066년의 노르만인들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느느 비록 봉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중앙집권화되어 갔으며,의회제도와 내각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성직자,제후,지방호족들이 모인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구성하였으며,이들의 일부가 어전회의를 구성하였다.노르만인 정복자들의 왕인 윌리엄 1세는 1066년부터 108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하였으며 납세와 행정을 위하여 토지대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은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불어와 고딕예술과 대학의 수입은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 떄에는 노르만디 공국의 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대륙은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후에 헨리 2세(1154~1189)가 플랜타지넷 왕조를 열었다.그는 상속과 결혼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하여,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이 그의 통치 하에 놓였다.이는 잉글랜드와 대륙이 문화적,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지만,훗날의 영토분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건설은 윌리엄 1세가 주춧돌을 놓았다면,헨리 2세가 기둥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그는 민병제도를 강화하여 왕의 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왕의 법률을 실시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법관들로 구성된 중앙법원의 지휘 하에,순회재판과 배심제도에 의한 공평한 재판을 실시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반 국민들은 왕권 확립에 찬성하여 중앙집권이 빠르게 진전되었다.1128년 프랑스의 씨또 수도원이 들어와 습지를 개간하고 수도시설을 설치하며,각종 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농사방법을 개향하여 가축을 기르고 특히 양모 생산을 증대시켰다.

헨리 2세의 뒤를 사자심 리차드가 이었다.그는 프랑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제 3차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느라 국내정치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리차드의 부재중에 왕위를 찬탈한 존은 노르만디 및 프랑스 내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1204)대헌장을 승인하였다.(1215).노르만디를 상실함으로써 노르만인들과 색슨인의 구별이 없어지고,진정한 잉글랜드인(Englishman)이 형성되게 되었다.또한 "대헌장"은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국회로 변경시킨 원동력이 되어 입헌정치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잉글랜드를 완성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브리튼 후손들의 거주지인 웨일스를 정복하였고,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의 통치기간 중에 양모산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확장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져,잉글랜드 역사의 새 단계가 열리게 되었다.그는 왕의 법률을 확립하기 위하여 법원의 권한을 셋으로 나누어 형법은 고등법원이 세금과 국고수입에 관한 법은 재무재판소가,민사관계 법은 민사소송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하였다.이로써 잉글랜드에는 로마법이 사라지고 관습법이 완되는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1337년에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은 프랑스 지역인 버건디 공국(현재의 플랑드르 지방)의 귀속문제에 대한 다툼으로 영국의 흑태자,프랑스의 잔다르크 등의 활약으로 봉건기사의 몰락과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장기간의 전쟁터였던 프랑스의 피해도 컸지만,이 떄 유행한 흑사병(1349)은 잉글랜드의 인구를 400만에서 250만으로 줄어들게 하여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가져왔다.전쟁으로 인한 호경기와 평민보병부대가 귀족기사단과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에서 나타난 평민세력의 강력함 등은 15세기 잉글랜드의 산업,경제,문화,정치 등의 모든 면에 변화를 일으켜 중세문화가 근세문화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장미전쟁(1445-1485)은 잉글랜드에서 기사가 완전히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일스의 리치몬드 백작 헨리 7세가 1485년 튜더 왕조를 시작함으로써 장미전쟁이 끝난 것은 잉글랜드로써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었고,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바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였고,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였다.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평민세력이 등장하여 왕권이 강화되며,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는 시기에 잉글랜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앞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잉글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다 유리했던 점은 지리적인 면에 있어서 섬나라라는 특성 떄문이다.잉글랜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며,특히 의회정치의 잘전은 왕권과 시민권의 연합을 긴밀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잉글랜드에서는 도시사람들의 시대인 근세의 주인공인 부르주아의 세력이 크게 발전하였고,이로써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확고하게 마련되었다.

중세

중세를 이해할 때 우리는 중세의 생활 수단을 현대적 생활 수단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보다 우수하다 또는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어떤 시대에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물질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데,호화로운 삶이라든가,안락한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노르만인 귀족들의 집에는 목욕탕이나 등불같은,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필수적인 생활 도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들도 나름대로 최대한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중세의 생활에는 어두운 면도 많았다.기촞거인 위생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질병이 찰궐하였고,유아사망률은 끔찍할 정도로 높았고,모두가 피부병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피부병은 질병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또한 의료시설이나 약품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병과 사고로 불구자가 많았으며,특히 법률이 가혹하여 불구자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사소한 범죄에도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가혹한 법률이 시행되었다.또한 전반적으로 가난한 삶을 영위했으나,자유인이 아닌 농노들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교회의 가르침은 부유한 자들이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타인에 대해 봉사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고 사회구제,구호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일반 대중들은 성이 없었으므로 세례명이나 신체적 특징을 따서 부르거나,사는 지방 또는 직업을 따서 부르는 것이 차차 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예를 들어 롱(Long),쇼트(Short)등은 신체 크기에 따라 붙여진 것이고,브라운(Broun),러셀(Russel) 등은 피부나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또한 그린우즈(Greenwoods),글렌(Glenn) 등은 살던 지역에서,스위트밀크(Swetemilk),스미스(Smith) 등은 직업에서 생겨난 성이다.일반 대중들이 이렇게 성을 갖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중세는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웃음의 시대였고,유머의 시대였다.중세 유머는 특히 예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서적은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그러므로 일일이 손으로 배껴 쓰는 수고를 하는 필경사나 작가는 긴장감을 풀기 위하여 여백에 온갖 괴상한 그림을 남겨놓았다.인간의 각양각색의 형태를 동물과 뒤섞어 그려놓기도 했다.문학작품에도 이러한 정경이 그려져 있고,실생활에도 낭만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장원과 마을

중세의 잉글랜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궁극적으로는 왕의 땅이었으나,차례대로 봉건영주들의 지배로 내려와 결국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토지를 누구나 소유하고 있었다.심지어는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에도 로마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큰 농장 주변의 땅들은 그 지역 주민들이 경작하고 있었다.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장원제도가 발달하여,토지에 매인 사람들인 농노계급이 탄생하였으나,그들도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로마인들의 큰 농장을 가리키는 빌라(villa)라는 말에서 촌락들의 이름이 발전하여 예를 들면 사우스빌(Southvil) 같은 마을이 나오고,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인으로부터 빼앗아 거주하던 지역을 나타내던 툰(tun)에서 예를 들면 찰스턴(Charleston),제임스타운(Jamestown) 등과 같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장원에는 성당과 영주의 집이 반드시 있었는데,이 두 건물은 장원의 생활을 간단하게 요약한다.영주의 저택은 장원 거주자들의 현실의 괴로움과 노동을 상징하는 영주가 거주하는 곳이었고,성당은 그에 대한 반대세력,즉 인원을 옹호하고 위안과 희망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성당은 장원 내의 모든 행사의 중심이 되었다.그 곳은 마을 사람들의 집회장소였으며 거래시장이었고 오락실이었으며,심지어는 은행이나 창고의 역할까지 하였다.주민들의 집조차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귀중품을 성당의 창고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휴일도 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휴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일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공휴일뿐이었다.공휴일은 크리스마스나 성모축일,아니면 다른 성자들의 축일로서 대개는 여러 가지 축하행사가 거행되었고,시장이 열리고 음주와 가무가 허용되어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며 즐겁게 지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행사가 성당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지방에서는 농민이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도시에서는 상인과 제조인들이 생겨났다.로마인들이 세운 성에서 비롯된,예를 들면 랑카스터,글루스터 등과 같은 도시가,색슨인들의 성에서 비롯된,예를 들면 에든버러,찰스버러 등과 같은 도시가 무수히 생겨났다.색슨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성은 원래 군사적인 목적에서 건설되었으나,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따라서 항구나 포구 등과 같은 교통요충지에 도시가 번성하게 되었고,큰 수도원이나 성당 주변에 종교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이러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매여 사는 농노와는 달리 완전한 자유인이었는데,농노들도 도시로 와서 일년 이상 숨어 지내면 자유인이 되었다.도시 주민들은 모두 평등한 입장에서 자치제도를 실시했고,모든 정책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한 회의에서 결정하여 시행하며,시장과 기타 관리들도 직선으로 선출해싿.도시의 주민 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동업조합을 조직했으며,도시 자체가 하나의 자치조직으로 마치 독립국가와 같은 역할을 하며 다른 도시나 외국과 여러 가지 협정을 맺기도 해싿.또한 도시는 그 자체의 사법권도 갖고 있어서 그 도시에서 발생하는 각종 상업적인 분규를 해결했다.

도시의 번성은 급격하게 진행되어 14세기 말에는 런던에는 3만 5천명,요크와 브리스톨에 각각 1만명,코벤트리에 7천명,노르위치에 6천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도시가 발달했으나 주민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도시의 주민 수는 많지 않았으나 복잡함은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차도와 인도와 하수도가 구별 없었기 떄문에 행인들은 수레를 조심하고 길가에서 버리는 물벼락을 조심하며 길을 다녀야 했다.거리의 이름도 없었으며,문자가 발달하지 못하고,무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게의 간판도 그림을 그리거나 물건을 매달아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그러나 도시에는 상인들이 많았으며,종교행렬,연극공연,전시회,닭싸움,공싸움 같은 각종 구경거리가 많아서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