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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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역사

잉글랜드의 배경

잉글랜드 땅을 형성하는 섬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브레타니아라고 남긴 것이 처음이고,기원전 2세기에 폴리비어스가 브레타니아를 주석이 나는 섬으로 묘사한 것이 그 다음이다.기원전 55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전기'에서 잉글랜드 땅과 사람에 관해 기록한 것이 최초의 완전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브리태니아와 켈트인인 브리튼 사람에 관한 것이지 잉글랜드와 앵글로색슨에 관한 것은 아니다.켈트인은 브리태니아에 살던 원주민들로,오늘날 북부 아일랜드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는 게일인들과 웨일스에 남아 있는 웨일스인 등의 조상이다.

줄리어스 시저 이후 오백 년 동안 브리태니아에서는 로마의 역사가 벌어졌고,런던을 중심으로 로마의 길이 사방으로 뻗었고,온천장인 배쓰가 로마계 브리티쉬의 중심지가 되었다.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셉티머스 세베루스 황제 등의 원정으로 스코틀랜드에 하드리안 월이라는 역사적 유물이 만들어지고,이 이남지역은 완전히 로마화되었다.남부지역에 여러 도시가ㅣ 생겨났으나 북쪽에는 아일랜드 해적과 픽트족의 침입이 잦았다.북쪽의 침입자들과 색슨인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5세기 중반에 로마군이 철수하고 이 섬은 대륙에서 건너온 주트,앵글스,색슨스의 차지가 되었다.6세기 초에는 앵글로색슨의 7왕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1066년에 데인족(지금의 덴마크인)들과 노르만 민족(지금의 노르만 민족과 프랑스 민족)이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거주함으로써 민족 구성의 기반과 문화에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역사는 튜튼족(지금의 독일,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민족)민족 이동이 한 축을 이루면서도 네덜란드나 독일의 역사와 구별된다.섬나라 잉글랜드는 유럽대륙과 불과 30여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유럽대륙과 다른 문화를 이루는 주된 원인이 된다.잉글랜드에는 주석이나 철,구리,아연 등과 같은 광물과 특히 석탄이 풍부했다.또한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진 목장의 육류와 곡물 생산은 18세기 중엽까지 유럽에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했다.

잉글랜드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유럽대륙의 지역에서는 겨울의 기온이 영하 30~40도로 내려갔지만,이 섬나라를 둘러싸고 흐르는 대서양만류는 이 나라의 겨울을 그다지 춥지 않도록 유지시켜 주었다.섬나라로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대륙의 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배양할 수 있었다.

기원전 55년부터 450년경까지 오백 년 간 유지된 로마의 지배는 영국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했고,잘 닦인 길을 남겨놓았다.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했으므로 그 생명이 유구한 것이고,이때 만들어진 길은 지금까지도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432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로 성자 패트릭을 파견하였고,이후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장기간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대륙에서 침입한 이교도들에게 접수된 브리튼 사람들의 나라는 색슨인들의 나라인 에섹스,웨섹스,서섹스와 주트의 나라인 켄트,앵글스의 나라인 이스트 앵글리아,머시아,노썸브리아 등의 7왕국으로 발전하였다.로마교황 그레고리 대제는 597년에 성 어거스틴을 파견하여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는 사라지고,잉글랜드 문화는 중세초기에 유럽대륙을 지도할 정도로 발전했다.669년에 로마에서 파견된 캔터베리 대주교 데어도어는 교회행정을 재조직하고 그레코로만 문명을 수입하여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던 7왕국을 통일국가로 만들고 영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발전의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다.끊임없는 민족이동은 새로운 정복과 피정복의 반복을 가져왔으므로,잉글랜드는 내부의 질서회복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아일랜드의 민족인 스코트족은 스코틀랜드로 갔고,데인족은 브래타니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켰다.웨섹스의 왕 알프레드 대왕은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남기면서 국토 통일과 문화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시에도 데인족들이 끊임없이 침략을 해왔고,알프레드 대왕의 자손들이 브래타니아 통일을 이룩하자 데인족들은 프랑스 영토로 몰려가 911년에는 노르만디 공국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노르만디 공국을 세운 데인족은 잉글랜드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규모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을 1066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잉글랜드의 형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제국 군대가 잉글랜드에서 물러간 이후 약 5세기 동안 수많은 민족이동이 일어나 브리튼은 잉글랜드로 되어갔으며,근대국가의 모습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유럽에서도 이때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1066년의 노르만인들의 정복 이후 잉글랜드는 비록 봉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으나 중앙집권화되어 갔으며,의회제도와 내각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성직자,제후,지방호족들이 모인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구성하였으며,이들의 일부가 어전회의를 구성하였다.노르만인 정복자들의 왕인 윌리엄 1세는 1066년부터 108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하였으며 납세와 행정을 위하여 토지대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은 잉글랜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불어와 고딕예술과 대학의 수입은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 떄에는 노르만디 공국의 왕이 잉글랜드의 국왕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대륙은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후에 헨리 2세(1154~1189)가 플랜타지넷 왕조를 열었다.그는 상속과 결혼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하여,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반이 그의 통치 하에 놓였다.이는 잉글랜드와 대륙이 문화적,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지만,훗날의 영토분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건설은 윌리엄 1세가 주춧돌을 놓았다면,헨리 2세가 기둥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그는 민병제도를 강화하여 왕의 군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왕의 법률을 실시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법관들로 구성된 중앙법원의 지휘 하에,순회재판과 배심제도에 의한 공평한 재판을 실시함으로써 봉건제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일반 국민들은 왕권 확립에 찬성하여 중앙집권이 빠르게 진전되었다.1128년 프랑스의 씨또 수도원이 들어와 습지를 개간하고 수도시설을 설치하며,각종 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농사방법을 개향하여 가축을 기르고 특히 양모 생산을 증대시켰다.

헨리 2세의 뒤를 사자심 리차드가 이었다.그는 프랑스와 팔레스타인에서 제 3차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느라 국내정치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리차드의 부재중에 왕위를 찬탈한 존은 노르만디 및 프랑스 내의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1204)대헌장을 승인하였다.(1215).노르만디를 상실함으로써 노르만인들과 색슨인의 구별이 없어지고,진정한 잉글랜드인(Englishman)이 형성되게 되었다.또한 "대헌장"은 매그너스 콘실리엄을 국회로 변경시킨 원동력이 되어 입헌정치의 기초가 잡히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잉글랜드를 완성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브리튼 후손들의 거주지인 웨일스를 정복하였고,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의 통치기간 중에 양모산업의 발달로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확장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져,잉글랜드 역사의 새 단계가 열리게 되었다.그는 왕의 법률을 확립하기 위하여 법원의 권한을 셋으로 나누어 형법은 고등법원이 세금과 국고수입에 관한 법은 재무재판소가,민사관계 법은 민사소송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하였다.이로써 잉글랜드에는 로마법이 사라지고 관습법이 완되는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1337년에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일으켰다.이 전쟁은 프랑스 지역인 버건디 공국(현재의 플랑드르 지방)의 귀속문제에 대한 다툼으로 영국의 흑태자,프랑스의 잔다르크 등의 활약으로 봉건기사의 몰락과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장기간의 전쟁터였던 프랑스의 피해도 컸지만,이 떄 유행한 흑사병(1349)은 잉글랜드의 인구를 400만에서 250만으로 줄어들게 하여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가져왔다.전쟁으로 인한 호경기와 평민보병부대가 귀족기사단과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에서 나타난 평민세력의 강력함 등은 15세기 잉글랜드의 산업,경제,문화,정치 등의 모든 면에 변화를 일으켜 중세문화가 근세문화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장미전쟁(1445-1485)은 잉글랜드에서 기사가 완전히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일스의 리치몬드 백작 헨리 7세가 1485년 튜더 왕조를 시작함으로써 장미전쟁이 끝난 것은 잉글랜드로써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 당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이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고 있었고,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바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였고,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였다.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평민세력이 등장하여 왕권이 강화되며,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는 시기에 잉글랜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앞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잉글랜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다 유리했던 점은 지리적인 면에 있어서 섬나라라는 특성 떄문이다.잉글랜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며,특히 의회정치의 잘전은 왕권과 시민권의 연합을 긴밀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잉글랜드에서는 도시사람들의 시대인 근세의 주인공인 부르주아의 세력이 크게 발전하였고,이로써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확고하게 마련되었다.

중세

중세를 이해할 때 우리는 중세의 생활 수단을 현대적 생활 수단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보다 우수하다 또는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어떤 시대에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물질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데,호화로운 삶이라든가,안락한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노르만인 귀족들의 집에는 목욕탕이나 등불같은,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필수적인 생활 도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들도 나름대로 최대한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즐기며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중세의 생활에는 어두운 면도 많았다.기촞거인 위생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질병이 찰궐하였고,유아사망률은 끔찍할 정도로 높았고,모두가 피부병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피부병은 질병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또한 의료시설이나 약품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병과 사고로 불구자가 많았으며,특히 법률이 가혹하여 불구자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사소한 범죄에도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가혹한 법률이 시행되었다.또한 전반적으로 가난한 삶을 영위했으나,자유인이 아닌 농노들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교회의 가르침은 부유한 자들이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타인에 대해 봉사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고 사회구제,구호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일반 대중들은 성이 없었으므로 세례명이나 신체적 특징을 따서 부르거나,사는 지방 또는 직업을 따서 부르는 것이 차차 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예를 들어 롱(Long),쇼트(Short)등은 신체 크기에 따라 붙여진 것이고,브라운(Broun),러셀(Russel) 등은 피부나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또한 그린우즈(Greenwoods),글렌(Glenn) 등은 살던 지역에서,스위트밀크(Swetemilk),스미스(Smith) 등은 직업에서 생겨난 성이다.일반 대중들이 이렇게 성을 갖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중세는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웃음의 시대였고,유머의 시대였다.중세 유머는 특히 예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서적은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그러므로 일일이 손으로 배껴 쓰는 수고를 하는 필경사나 작가는 긴장감을 풀기 위하여 여백에 온갖 괴상한 그림을 남겨놓았다.인간의 각양각색의 형태를 동물과 뒤섞어 그려놓기도 했다.문학작품에도 이러한 정경이 그려져 있고,실생활에도 낭만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장원과 마을

중세의 잉글랜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궁극적으로는 왕의 땅이었으나,차례대로 봉건영주들의 지배로 내려와 결국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토지를 누구나 소유하고 있었다.심지어는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에도 로마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큰 농장 주변의 땅들은 그 지역 주민들이 경작하고 있었다.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장원제도가 발달하여,토지에 매인 사람들인 농노계급이 탄생하였으나,그들도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로마인들의 큰 농장을 가리키는 빌라(villa)라는 말에서 촌락들의 이름이 발전하여 예를 들면 사우스빌(Southvil) 같은 마을이 나오고,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인으로부터 빼앗아 거주하던 지역을 나타내던 툰(tun)에서 예를 들면 찰스턴(Charleston),제임스타운(Jamestown) 등과 같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장원에는 성당과 영주의 집이 반드시 있었는데,이 두 건물은 장원의 생활을 간단하게 요약한다.영주의 저택은 장원 거주자들의 현실의 괴로움과 노동을 상징하는 영주가 거주하는 곳이었고,성당은 그에 대한 반대세력,즉 인원을 옹호하고 위안과 희망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성당은 장원 내의 모든 행사의 중심이 되었다.그 곳은 마을 사람들의 집회장소였으며 거래시장이었고 오락실이었으며,심지어는 은행이나 창고의 역할까지 하였다.주민들의 집조차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귀중품을 성당의 창고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휴일도 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휴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일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공휴일뿐이었다.공휴일은 크리스마스나 성모축일,아니면 다른 성자들의 축일로서 대개는 여러 가지 축하행사가 거행되었고,시장이 열리고 음주와 가무가 허용되어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며 즐겁게 지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행사가 성당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지방에서는 농민이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도시에서는 상인과 제조인들이 생겨났다.로마인들이 세운 성에서 비롯된,예를 들면 랑카스터,글루스터 등과 같은 도시가,색슨인들의 성에서 비롯된,예를 들면 에든버러,찰스버러 등과 같은 도시가 무수히 생겨났다.색슨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성은 원래 군사적인 목적에서 건설되었으나,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자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따라서 항구나 포구 등과 같은 교통요충지에 도시가 번성하게 되었고,큰 수도원이나 성당 주변에 종교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이러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매여 사는 농노와는 달리 완전한 자유인이었는데,농노들도 도시로 와서 일년 이상 숨어 지내면 자유인이 되었다.도시 주민들은 모두 평등한 입장에서 자치제도를 실시했고,모든 정책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한 회의에서 결정하여 시행하며,시장과 기타 관리들도 직선으로 선출해싿.도시의 주민 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동업조합을 조직했으며,도시 자체가 하나의 자치조직으로 마치 독립국가와 같은 역할을 하며 다른 도시나 외국과 여러 가지 협정을 맺기도 해싿.또한 도시는 그 자체의 사법권도 갖고 있어서 그 도시에서 발생하는 각종 상업적인 분규를 해결했다.

도시의 번성은 급격하게 진행되어 14세기 말에는 런던에는 3만 5천명,요크와 브리스톨에 각각 1만명,코벤트리에 7천명,노르위치에 6천명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도시가 발달했으나 주민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도시의 주민 수는 많지 않았으나 복잡함은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차도와 인도와 하수도가 구별 없었기 떄문에 행인들은 수레를 조심하고 길가에서 버리는 물벼락을 조심하며 길을 다녀야 했다.거리의 이름도 없었으며,문자가 발달하지 못하고,무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게의 간판도 그림을 그리거나 물건을 매달아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그러나 도시에는 상인들이 많았으며,종교행렬,연극공연,전시회,닭싸움,공싸움 같은 각종 구경거리가 많아서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신앙의 시대

중세가 신앙의 시대였음은 도시에 있는 성당의 숫자로 증명된다.런던에는 성 바오로 성당 외에 13개의 수도원과 136개의 성당이 있었으며,노르위치에도 50여 개의 성당이 있었다.이들의 신앙은 로마교황이 최고의 수장인 카톨릭이었다.교회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신부가 되면,주교,대주교는 물론 교황의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었다.1154년부터 59년까지 로마의 교황이었던 아드리안 4세는 세인트알반스시의 소시민의 아들이었고,추기경이며 총리대신이었던 울시는 농부의 아들이었다.교회는 이론상으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죄에 대해서도 평등하게 벌을 주었으며,'주기도문'과'사도신경','성모경'을 라틴어나 영어로 모두가 평등하게 암송하도록 요구하였다.그러나 실제로는 성직자들 자체가 봉건제도에 구속되어 있었으므로 모두가 평등하게 대접받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들이 모두 거륙한 인격자는 아니었고,모든 국민이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성직자들은 헌신적이었고 국민들의 신앙심도 깊었다.모든 생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회가 일종의 행정조직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모든 국민은 세상에 태어나는 즉시 세례성사를 받고,성인이 되어 견진성사,죄를 지었을 때 마다 고해성사,주일에는 성체성사,결혼할 때 에는 혼배성사,임종할 때 종부성사를 받기에 그 기록이 교회에 남아있다.따로 기록을 보관해두는 행정조직이 발전하기 전에는 교회가 행정조직의 역할을 했다.이 여섯 가지 성사에 성직자가 되려는 신품성사를 더하여 일곱 가지 성사를 성직자들 대부분은 잘 받들었다.

중세에는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나름의 목적과 규약을 갖고 활동하는 수도자들이 모였다.이 수도원들은 대부분 16세기 이후 국가의 탄압과 재산몰수로 인해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으나 19세기에 다시 부활하여 지금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일반적으로 남자 회원은 수사,그 집단을 수도원이라고 하며,여자 회원을 수녀,그 집단을 수녀원이라 한다,수도원은 그 크기와 직제에 따라 대수도원과 수도원으로 분류되며 대수도원장이나 대수녀원장과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이 대표가 된다.수도원의 수사 중에는 신부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신부들을 위한 수도원도 있었기 때문에,성직자들은 교구신부와 수사신부로 나누어졌다.또한 대부분의 수사들은 수도원에서 집단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나 탁발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사들,즉 탁발수사도 있었다.

중세의 수도원은 병원,고아원,양로원과 같은 사회구호사업을 시행하는 유일한 단체였고,옛 문서수지브사본제작,주석첨가,편찬,저작 등과 같은 출판사와 연구소 또는 학문연구기관의 역할을 하는 유일한 기관이기도 하였다.또한 수도원에 따라서 산림을 개간하거나,수리사업을 하고,도로나 교량을 건설하고,농지를 개량하며,농사일을 중심으로 하여 중세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된 경우도 많다.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하고,의무교육이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수도원에 무지몽매하고 미신에 사로잡힌 백성들의 삶을 완전히 바로잡지는 못했으나,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수도원에서는 무수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대표적인 학자로는 옥스퍼드 프란시스코회의 베이컨을 들 수 있다.그는 경험론을 창시하였으며,근세 초기 과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또한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인,합리주의적 토미즘에 반대하여 독창적인 학설로 근대철학을 예비한 던스 스코터스나 윌리엄 오캄 등도 프란시스코회 회원이었다.이들이 도미니카 회원들과 학문적으로 경쟁하여 마침내 변증법 보다는 실증주의를,사변철학 보다는 실험과학을 주장하는 잉글랜드의 경험론 철학을 발전시켰다.

교육과 언어변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언어인 앵글로색슨어와 귀족계급들의 언어인 노르만 프랑스어가 함께 영어로 되면서 어휘가 대단히 풍부하게 되었고,명사의 성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남성,여성,중성 등의 구분이 없어지고 자연성을 따르는 일부 어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중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앵글로색슨어와 노르만 프랑스어는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공존하였다.14세기 후반에 백년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와 끈질긴 전쟁을 하는 동안에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져 영어가 앞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476년 윌리엄 켁스톤이 인쇄기를 발명하여 책이 대량생산 됨으로써 영어는 확고한 철자체계를 갖게 되었다.

영어의 모체는 앵글로색슨어로서,11세기 경에 쓰여진 것으로 짐작되는 작자미상의 고대영시'베오울프'나 알프레드 대왕이 편찬한'앵글로색슨 연대기'등에 사용된 영어는 격변화가 심하고,철자가 현대의 영어와 너무 달라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윌리엄 랭글랜드의 작품으로 추측되는'농부 피어스'나 초서의'캔터베리 이야기'에 쓰인 영어는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철자가 현대영어와 많이 다르지 않다.따라서 영어는 14세기 중반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군대

노르만인들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잉글랜드는 봉건제도 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봉건제도는 토지소유권을 줌심으로 하고 있어 토지를 위한 싸움이 필연적으로 개입되게 되므로 무사집단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들과 주종관계를 맺는 토지소유자가 핵심이다.따라서 기사라는 계급은 이 제도 하에서 번창하고 그들의 예절인 기사도는 '봉건제도의 꽃'이라고 찬양받아싿.기사는 원래 귀족이었으며,영토의 크기 이외에는 다른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기사 작위를 부여하는 것은 왕의 권한이며 장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그 권위를 높였다.

외부의 침입을 막고,교회를 보호하고,농부의 곡식을 해치는 새나 짐승들을 사냥하고,소작인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기사들도 있었던 반면에 그렇지 못한 기사들도 있었다.대부분의 기사는 자기보다 가난하거나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고,자신과 같은 계급이거나 윗사람에게만 기사도를 보였다.기사들은 전쟁에 나가 전투하는 것이 주 임무이므로 전쟁이 없을 때에는 마상시합을 한다든지,사냥을 한다든지 하여 자신의 기량을 향상 시켰다.

12세기에 들어 기사들이 중무장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투구를 철가면으로 만들어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게 되었다.철가면을 쓴 상태에서는 서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므로 서로를 식별하기 위하여 가문의 문장이 발달하게 되었다.가장 쉽게 눈에 뜨이는 방패에 간단한 도안을 선명한 색체로 그리기 시작한 문장은 사자나 독수리 등과 같은 용맹한 동물들이 많았고,점차 세련되고 섬세하게 되어 방패 이외에도 여러 곳에 사용하게 되었다.십자군 시절에는 갑옷 위에 가문의 문장을 단 외투를 걸쳤도,삼각형 깃발이나 사각형 깃발에도 가문의 문장을 붙였다.이러한 가문의 문장은 세습되어 그 가문에서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에 사용하게 되었다.도안의 독창성과 색깔의 조화는 중세인들의 예술감각을 보여준다,세습적인 가문의 문장과는 별도로 예를 들면 장미전쟁 때 랭카스터 집안의 붉은 장미,요크 집안의 백장미와 같이 일시적으로 사용된 문장도 있었다.이러한 문장은 중세생활을 호화롭게 장식했다.

15세기에 들어 기사의 세력이 약화되었다.중무장을 하고 자신의 기량에 따라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던 기사들은 부대의 체제가 가벼운 무장을 한 부대로 발전하고 또 보병밀집부대로 발전하고 화약에 의한 총포가 등장하자 사라지고 말았다.그들은 다만 기사라는 작위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후에 잉글랜드가 세계 제일의 해군력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으나,중세에는 해군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육군을 구성하는 것 처럼 어부들이 해군을 구성하는 것은 당연했다.잉글랜드 해군의 모체는 해스팅즈,도버,샌드위치,하이쓰,그리고 롬니 등 다섯 항구의 어부들이다.원래 이 항구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국왕의 부름을 받아 해군의 역할을 하게 되고 이로써 이 항수의 시민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다.그러나 14세기 이후 배의 크기가 커지고 항구의 포구가 낮아져 이 다섯 항구의 해군이 현대 해군의 근간이 되지는 못했다.

동업조합과 고딕예술

중세에는 기술과 예술이 동일시 되었다.사람들이 물건을 만들 때 그 물건은 만드는 사람의 인격과 예술적 소양을 그대로 반영하게 되고,자신이 최선을 다한 작품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중세인이다.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분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기계가 없었으며 독립경영을 하는 자급자족의 기업이 생산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대부분은 자기 지역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했으나 도자기나 광산물 같은 것은 지역적인 영향을 다분히 받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업종도 자치적,인격적으로 관리 운영되었는데 이는 동업조합이라고 불리는 자치조직 때문이었다.

동업조합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조직으로 양편의 이익을 모두 고려하는 자치적인 조직이었다.동업조합은 고용인의 번영과 더불어 일 자체의 명예를 소중히 하고 최고 수준의 기술을 얻기 위하여 노력했다.또한 동업조합은 지역별,업종별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으나 도시 자치정부에 적극 참여했으며,자체의 성당이나 제단을 갖고 자체의 종교행사를 갖는 증 종교적인 유대가 강했다.이러한 동업조합은 고용주와 고용인이 상하관계가 아니라 가족적인 유대관계에서 맺어져 고용인은 숙식을 같이하며 함께 일하는 고용주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종의 학원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동업조합 중에서 수공업 동업조합이 가장 대표적이다.수공업 동업조합은 명장,견습공,낮일꾼으로 구성되어 있다.명장은 자신이 가게를 운영하는 독립한 노동자를 말하며,기술에 대한 자격을 가리키는 것일 뿐 주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명장은 7년 이상 견습공으로 장인 아래서 일을 배운 후,명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명작을 만들어 동업조합에 의하여 시험된 후에 얻는 자격이다.견습공이 7년 이상 일을 배운 후 동업조합의 자격심사에 합격하면,가입금을 내고 동업조합의 일원으로 가입했다.가입금과 가게를 차릴 비용이 없는 장인들은 낮일꾼으로 활동했다.15세기에 낮일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낮일꾼들이 증가한 원인은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인한 수공업지원자의 증가,동업조합가입장벽의 강화,영세한 명장들의 전락 등으로 분석된다.

자본주의가 발생하여,영업의 자유,경쟁의 자유,이운추구의 자유가 크게 강화되면서 동업조합 조직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상업의 발달과 신흥재벌의 등장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재벌은 섬유업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며,16세기 초에는 대량생산 제도에 의해 수백 명,수천 명의 직공을 거느린 경영주가 나타났다.이로써 직공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일손으로 전락하게 되었고,거대한 자본과 공장과 기계가 발전하면서 동업조합을 완전히 물러나게 했다.이 때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는 산업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다.

동업조합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기수링 에술이었기 때문에 금은세공이나,목각장식,성당의 제단장식 같은 훌륭한 예술작품이 많이 나왔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수한 예술품은 건축에서 찾을 수 있다.문명인의 집,특히 온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예술에서는 건축이 으뜸이게 마련이다.중세에는 건축에 있어서 독특한 고딕양식이 발전했고,바로 이 고딕양식이 중세의 예술의 지배적인 표현양식이 되었다.고딕건축양식은 원래 프랑스 문화의 산물이었지만,잉그랜드에서는 잉글랜드적인 색채가 가미된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였다.이 당시의 건축에서는 설계는 대강의 윤곽만을 제시할 뿐이고,그 세부사항,특히 장식적인 면ㅇ느 전적으로 기술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따라서 기술자들은 자신의 기분과 예술적인 안목에 따라 나름대로의 장식을 만들어냈고,그렇기 떄문에 동일한 모델이라도 세부적인 스타일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게 되었다.잉글랜드식 스타일은 대체로 가볍고,우스꽝스럽고,아담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느낌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경건한 성자들의 표정이나 심각한 악마들의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경우가 많고,동물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거나 사회의 여러 인물들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음악에 있어서는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준 명장들이 많이 있었다.이는 서양음악이 독특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윈체스터 대성당에는10세기에 400개의 청동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이 만들어져 그 소리가 온 시내에 울려 퍼였다고 한다.

14세기에는 수공업자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상업자본가들이 등장하였다.노르만인의 브리타닝 정복 이후 잉글랜드와 유럽대륙 사이의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특히 십자군 전쟁이 그것을 더욱 대규모화하여,14세기에는 귀족상인들의 황금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교회가 고리대금업을 죄악시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것을 독점하여 더욱 부유하게 되고,플로렌스와 제노아 등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중세의 경제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는 화폐단위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13세기 말까지는 페니라는 은화밖에 없었으나,14세기에는 4페니 짜리가 등장하고 에드워드 3세 때에는 반 마르크 짜리 금화가 나오게 되었다.잉글랜드의 화폐제도는 유럽연합 가입으로 인하여 유로를 사용하기 전 까지는 대단히 복잡했었는데 그 이유는 이처럼 여러 가지 화폐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유럽연합 가입 전에 사용되고 있던 화폐단위가 이때 이미 자리잡았던 것이다.페니가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12페니가 1실링,160페니가 1마르크,240페니가 1파운드가 된다.2002년 1월 1일에 유럽대륙에서 화폐통합이 이루어져 유로화가 출범하였을 당시 잉글랜드의 화폐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14세기 말에는 농노제도가 완전히 붕괴되고,자작농이 출현하였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흑사병으로 잉글랜드의 주민수가 40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줄어들어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을 가져왔으며,더욱이 장미전쟁,깁자군전쟁 같은 장기간의 전쟁은 노동력 부족현상을 심화시켰다.또한 전쟁으로 인해 소작료를 곡물 대신 금전으로 납부토록하는 조치와 네덜란드지방의 양모업자들이 잉글랜드로 몰려온 것도 자작농의 출현에 기여했다.15세기에는 목장을 경영하기 위해 인클로저가 성행하고 대량생산제도의 공업형태가 확립되었으며,이로 인해 동업조합이 사라지게 되어 중세적인 사회생활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국교회주의와 엘리자베스시대

튜터왕조가 시작될 무렵 유럽에서는 스페인 왕국,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이 강성한 국가로 되어 가고 있었으며,잉글랜드의 가장 좋은 교역상대국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이 열강의 침략대상이 되었다.튜터왕조의 헨리 4세와 헨리 7세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도모하고,공영권 확보를 위해 외교와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따.신흥중산계급과 국회의 힘을 교모하게 이용하여 국민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려는 정책을 펴면서,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아이러닉하게도 가장 민주적인 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모직물공업과 해외식민지 건설에서 강력한 경쟁 관계를 이루고 있던 스페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네덜란드의 독립을 선동하고,바다의 깡패들에게 특허장과 군함과 기사작위를 부여하며 그들을 양성하였다.그들은 비호를 받아가며 아프리카의 토인들을 잡아다가 앵글로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왕국 영토에 팔고,대서양에서 스페인 왕국 무역선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왕국의 국력을 소모시키고,그 약탈품을 여왕에게 진상하여 잉글랜드의 국력 신장에 큰 기여를 했다.스페인 왕국제해권장악을 위해 무적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와 대규모 해전을 치렀으나,잉글랜드 해군과 폭풍우로 인하여 전멸함으로써,잉글랜드는 명실공히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다.미국대륙에서는 이 여왕을 기념하여 만든 식민지인 버지니아가 발전하고,모험상인들로 구성된 특허상사가 많이 생겨나서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성장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특허상사 중에 인도를 정복한 동인도회사와 노예무역을 주된 업무로 운영된 아프리카상사가 특히 유명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대외적인 눈부신 성공에 더하여 국내정치에서도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그레샴과 같은 유명한 재정가들의 공헌으로 국내 경제가 안정되었고,맨체스터와 같은 공업도시가 출현하여 산업혁명을 예비했고,중상주의,보호무역주의 등의 정책을 구현하여 중산계급의 발전을 가져왔다.이 여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선언하고,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그 매력을 국내 신하들의 관리와 외국과의 외교관계에 십분 이용하였다.이 여왕의 통치 하에 잉글랜드는 스페인 왕국,프랑스와의 경쟁의 위기에서 정치적 통일과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해양국민으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하고 민족적 영광을 드높이는 나라로 발전하였다.또한 셰익스피어,마알로우,스펜서,베이컨 등의 시인,극작가,사상가들이 나타나 잉글랜드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1세는 모든 영광의 상징이 되었으며,19세기 빅토리아여왕과 함께 잉글랜드의 지배에 의한 평화의 위대한 건설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엘리자베스여왕이 1603년에 후손 없이 사망하자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던 스코틀랜드여왕 피의 메리의 아들 제임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아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왕국이 하나로 합병되는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사건이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왕국은 제임스 1세가 두 나라를 모두 통치하기 시작한 후 100년이 지난 1707년에 대영제국으로 평화적으로 합병되었고,1801년에 아일랜드까지 합병하여 연합왕국으로 발전했다.

국회,정당,내각,정치

왕권과 모험상인의 비약적 발전을 남긴 튜더왕조의 뒤를 이은 스튜어트왕조는 중산계습의 세력이 엘리자베스 1세 때 강화되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15,16세기 왕권의 비약적 발전은 봉건귀족을 타도하기 위한 왕권과 중산계급의 결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봉건귀족이 몰락한 이후 절대적 권한을 가진 왕은 봉건귀족들 보다 가혹하게 중산계급의 이익을 억압하고,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통상과 무역에도 제한을 가하였으며,특히 왕권을 둘러싼 세력다툼은 전쟁을 유발하여 산업을 마비시켰다.중산계급의 세력이 강화될수록 전제정치가 이루어지기는 힘든 일이다.신성한 왕권을 주장하며 로마교황의 신권을 뺴앗아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신흥세력에게 그것을 분배하며 국가를 통치하던 왕들은 이제 그 신흥세력인 중산계급에 의해 타도 대상으로 변화했다.이러한 변화는 1688년의 명예혁명에서 시작되어 1776년의 미국독립과 1789년의 프랑스 혁명으로 전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이러한 혁명의 결과는 중산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혁명의 권리를 인식한 일반국민들이 노력하여 19세기에는 중산계급이 가진 특권을 공유하게 되고,이로써 민주주의의 실현에 이르게 되었다.따라서 스튜어트왕조가 의회와 싸우고 그 결과 얻어진 명예혁명은 전 세계에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튜어트왕조와 의회의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헌법투쟁의 모습이었지만,사실은 엘리자베스 1세까지의 종교적 투쟁의 결과에서 오는 내란으로,같은 시기에서 프로이센 공화국에서 발발한 삼십 년 전쟁(1618-1648)과 마찬가지로 신교도 분열 이후 150여 년에 걸친 유럽의 지루한 종교전쟁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스튜어트왕조가 겪은 의회와의 정면충돌은 제임스왕조가 튜더왕조보다 더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튜더왕조시대의 의회는 일종의 거수기와 같은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엘리자베스 1세는 45년 간의 재위기간 동안 의회를 14회만 소집했을 정도로 의회의 권한은 절대적인 왕권에 비할 바 없이 약했다.튜더왕조시대에 의회와 왕과의 마찰은 의회의 권한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의회의 권한 강화는 영국의 국교가 비록 로마교황에게 반대하는 주교들에 의하여 이끌어진다는 의미에서 신교도감독교회라고 불렸지만,주교라는 교회감독자를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장로교도들이 의회에서 강한 세력을 갖게 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이 장로교도들은 신흥중산계급이었으므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세금을 적게 내려고 노력하면서 세금을 많이 부과하려는 국왕과 자연히 충돌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들의 약탈품을 진상받아 국가 운영비를 충당함으로써 의회의 동의 없이 나라를 이끌 수 있었으나,이러한 재주가 없이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재정문제를 의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국왕이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고 기부금을 강요하기 위해 불법감금이나 가택침입을 못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권리청원'에 동의하였다.이후 스코틀랜드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장기간 의회가 열림에 따라 의회의 권력은 국왕과 대등한 위치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때 의회는 보수세력인 왕당파와 청교도들인 의회파로 양분되어 있었으며,청교도들은 장로교파와 조합교회파로 나뉘어져 있었다.청교도들은 국왕의 정치,종교적 권한을 약화시키는 일에는 파벌에 관계없이 일치 단결하였으나,교회조직행정에 있어서는 의견이 대립되었으며,국회의원에는 장로교파가,군대에는 조합교회파가 우세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왕당파를 이긴 군대는 올리버 크롬웰의 영도 하에 장로교파 국회의원을 몰아내고,찰스 1세를 사형하고(1649),귀족원을 해산하고,자유공화국을 선포하였다.1653년에 조합교회파 청교도 군대는 크롬웰을 종신 호국경으로 하는 독재국가를 출현시켰다.

자유공화국은 정부문서라는 근세 최초의 성문헌법을 바탕으로 수립되었으며,이 문서는 여러 나라의 입헌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크롬웰식 혁명과 독재는 많은 모방자를 냈다.많은 종파 사이의 마찰과 국민의 반대로 인하여 자유공화국은 사라지고,찰스 2세의 왕정이 복귀되었으며(1660),의회가 부활하였다.그러나 왕권은 이전에 비하여 상딩히 약화되고 국민의 권리가 강화되었다.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여 의회는 '선서령'을 제정하여 가톨릭을 공직에서 완전히 추방하고,인신보호법을 제정하여 굿ㄱ영장 없이는 구속을 못 하도록 하여 지금까지 임의적으로 행해지던 불법구속을 금지하였다.찰스 2세의 아우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속박하는 법률의 집행을 정지시키자 국회는 메리와 그의 남편인 네덜란트 총통 윌리엄 3세를 연합군주로 삼고 '인권선언'을 수락하도록 하고,무혈혁명을 완성하였다.이것이 명예혁명이다.

의회의 권력이 이처럼 강해지자 정당이 출현하게 되었다.의회파 청교도들로 구성된 중산계급 출신의 의원들로 의회가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를 가졌고,상공업자들의 이익을 보호했으며,신교를 수호하는 정강정책을 가졌고,삶과 자유를 모토로 삼았다.이들은 휘그당으로 발전했다.이에 반하여 지주계급을 주로하여 구성된 토리당은 국왕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며 토지를 구호로 삼았다.이처럼 정식 정당이 조직되고 이를 바탕으로 실시되는 입헌대의정치는 전 세계의 모범이 되었다.'인권선언'은 이전의 '권리청원'에 더하여 국왕이 법률을 정지시키지 못하고,신교를 믿고,국회의 발언은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 등을 규정하였다.이러한 규정은 미국헌법과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도 원용되었고,유엔의 인권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의회는 정부의 출판물 인가제도를 없애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 대의정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왕의 권한을 크게 제한할 수 있는 의회는 전권을 행사하고,하원이 상원(귀족원)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각 정당의 대표들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신문,팜플랫 등이 선거운동에 사용되고,하원의 다수당 대표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고,이 내각이 입법부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치기술이 발전하였다.내각책임제의 정당정치는 독일에서 온 하노버왕조의 시조 조지 1세(1714~1727) 때 부터는 뚜렷해졌으며 이는 19세기에 미국을 제외한 강대국들에게도 수출되었다.

이 새로운 정치기술은 인간의 정치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고,신교도인 실업가나 지주들로 구성된 중산계급만을 위한 새로운 귀족정치로 되어 많은 사회적,정치적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혁명의 권리와 인민주권을 선언한 원동력이 되었다.이는 미국대륙에서 거대한 민주국가를 탄생시켰고,프랑스 혁명을 도화선으로 하는 대륙의 구제도의 탈피와 시민사회 건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명예혁명을 정치,철학적으로 합리화한 존 로크는 혁명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실업가와 지주의 권익을 토대로 하는 국책 수행은 드디어 한낮 섬나라에 불과한 영국을 해양제국으로,해가 지지 않는 국가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산업혁명을 세계로 전파하여,신석기시대이래 거의 변함 없이 계속되어온 인간의 생산수단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로크와 같은 시대에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도 나왔으며,또 비슷한 시기에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도 활동했다.

대영제국과 산업주의

영국에서는 정치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영국을 위시하여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이루어진 영연방/커먼웰스(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발전한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 성립되고 있었다.그 성립과정은 16,17세기의 다른 유럽국가들의 해양제국 건설과정과 동일했으나 포르투갈,스페인 왕국,베네룩스 연합왕국,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이 건설한 해외제국들이 모두 사라졌음에 반하여 영국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연방/커먼웰스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영국이 지닌 과잉인구와 정치기술 때문이다.

영국의 인구과잉은 경제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로부터 생겨났다.양모생산이 발전함에 따라서 영국에선 섬유상인들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농토에 울타리를 치고 목장을 경영하는 자본주의식 농업방식은 인클로저가 유행함에 따라 농촌의 많은 사람들이 농토를 상실하고 도시로 몰려들어가 실업자가 되었다.이 실업자들은 말썽을 일으키고,1601년 구빈법이 실시된 이후 여러 차례 빈민구제법이 실시되었다.1558년에 버지니아,1607년에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한 이래 제일 많은 해외 이민을 그 식민지들에 보낼 수 있었다.이 실업자들 이외에는 귀양가는 죄수가 많았고,국교제도의 강행,청교도 혁명과 그 반대혁명 등 종교적 내란에 의한 과잉인구도 식민지로의 이민을 부추겼다.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주대륙 플리머쓰로 건너간 순례 시조(Pilgrim Fathers)나 1634년에 메릴랜드를 건설한 가톨릭 이민 등은 종교상의 이유로 이민한 사람들이다.

영국은 식민지만 건설한 것이 아니다.영국은 인구가 많고 문화가 발달한 인도나 미개한 열대 아프리카 등에는 무역기지를 건설하여,그곳에 상사를 두고 경제적으로 침투하였다.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상사는 상아해안과 황금해안을 포함한 서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상아와 황금을 가져왔고,동인도상사는 포목과 비단,차와양념 등을 들여왔다.이로 인하여 영국에섲는 속옷을 입고,손수건,침대보,식탁보 등을 사용하고,차를 마시고 음식에 양념을 첨가하는 등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무역기지에는 이민이 불가능하여,영국의 정치기술이 수출되지는 않았지만,식민지에는 정치기술이 수출되어 새 영국(New England),새 스코틀랜드(Nova Scotia),새 남부 웨일스(New South Wales)등의 도시가 건설 되었으며,이들의 일부는 점차 발전하여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다.이 식민지들과 1960년에 프랑스에서 강탈한 캐나다와 1805년에 베네룩스 연합왕국에게서 빼앗은 남아프리카까지 포함한 자치령들이 대영제국의 중요부분을 구성한다.

영국의 자치령들은 주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을 통하여 수립되었으며,그 원동력은 섬나라,의회,해군 등 이었다.영국이 한 세기 이전에 이미 겪은 정치적 혼란을 유럽대륙이 17,18세기에 겪은 것이 천우신조였다.영국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면서 산업혁명을 겪을 때,민족주의가 널리 퍼진 19세기 유럽대륙에 산업주의가 보급되자 유럽의 열강은 제국주의와 세계정책을 펼치게 되었다.유럽대륙에서 프러시아왕이 독일 황제로 등극하여(1871) 러시아 황제와 세력을 견주자 대영제국도 빅토리아 여왕이 무굴제국의 제관을 1877년에 썼다.

빅토리아 여왕은 1873년부터 1901년까지 장기간 집권하였다.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대영제국의 위대한 건설자이며,그 절정기를 대표하는 통치자로 엘리자베스 시대보다 더 찬란한 빅토리아 시대를 열었다.빅토리아 시대는 외관상 호화로움에 비하여 그다지 평온하지 못했다.산업혁명의 여파로 사회적 불안과 동요가 있었으며 경제문제는 심각하였다.

산업주의의 보급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 인구의 이동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영국에서는 사람들이 템즈강 이남에서 주로 살고 있었으나 산업주의가 발전하면서 석탄과 철의 시대가 도래하고,그 생산지인 북쪽으로 주민들이 이동하여 버밍햄,맨체스터 등이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또한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동함으로 인하여 도시에 과잉인구가 많아졌으며,특히 생산의 증가와 생활의 개선으로 인하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영국의 대의정치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하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소수 귀족정치였다.하원을 구성하는 571명의 의원들은 자신의 출신지역이나 도시를 대표하는데 이들의 투표권은 성인남자인구의 10% 정도 에게만 주어져 있었다.선거구마다 인구수에 관계없이 두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는데,주민이동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나 심지어는 없어진 곳에서도 거수기 노릇을 하는 유령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반면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대도시로 변모한 버밍햄이나 맨체스터와 같은 새로 생긴 도시에는 공장이나 광산 노동자가 많았지만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었다.

새로 생긴 대도시에서의 노동자들의 생활은 중세의 농노들의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공장은 위생이나 안전 또는 인도적인 면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건설되었고,공장 노동자들은 기계의 일부로 여겨졌을 뿐이다.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거두려는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일손으로 여기고,기계의 잘못으로 작업이 잘못되어도 노동자들을 매질하고,노동자들이 작업 중에 부상을 당해도 아무보상없이 쫓아냈다.일자리를 찾지 못한 실업자들이 무수히 많았으므로 고용주들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다.노동시간이나 노동자의 나이에도 아무 제한이 없었으므로 하루에 십여 시간씩 노동을 하였으며,어린 아이들까지 노예 그 이상의 노동을 하였다.이 결과 폐결핵,관절염,곱사등이 등의 질병으로 인한 환자들과 팔과 다리가 없는 불구자가 무수히 많이 생겨났다.다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그려져 있는 정경은 허구가 아니라 그 당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땅굴에 덮개를 덮은 움막에 비싼 세를 내고 세 들어 살았고,추위를 막을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고,배부르게 먹을 만큼 식량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어린이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청소년이 되어서도 간단한 덧셈이나 뺄셈을 할 수 없었고,영국의 수도 이름인 런던이나 당시의 국왕이던 빅토리아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고,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노동자들이 십여 시간의 노동 후 휴식시간에 즐길 오락이 없었으므로 값싼 술을 파는 술집이 번창하였다.이처럼 19세기 영국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고 암담했다.영국사회는 중산계급과 무산자계급의 대립이 심화되었다.또 중산계급도 상류 중산계급과 하류 중산계급으로 분화되고,무산자계급도 노동자,농민과 실업자 계급으로 분화되었다.이러한 환경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자본론'을 쓰고,제1차 국제 노동자 연맹(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에 기여하고 노동운동을 지도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하여 공산당의 시조가 되었다.

사회개혁과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초의 영국사회는 극도로 비참하였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나 영국은 공산화되지 않았다.프랑스의 칠월혁명(1830]]과 이월혁명(1848)이 정부와 민중의 유혈 충돌을 가져왔고,이 혼란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갈 때 영국은 피를 흘리지 않고 보다 성공적으로 사회개혁을 서서히 진행시켜 공화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이러한 성공은 영국 국민들의 느리면서도 꾸준한 정치 경험과 확고부동한 정당정치,내각책임제도와 56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통치하면서 통일의 상징으로 된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와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과 만족감에서 온 것이다.여러 가지 개혁의 실마리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전에 있었던 칠월 혁명의 결과로 지주계급 위주의 토리당이 내각을 실권하고,1832년의 선거법 개정으로 부패선거구가 없어짐과 동시에 중산층 실업가들의 세력이 지주계급의 세력과 대등하게 된 것에서 비롯했다.1832년의 선거법 개정은 선거권의 확대를 가져왔지만,노동자들에게까지 선거권이 주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에'인민헌장운동'을 가져오게 되었다.그렇지만 이 개혁의 결과 진보와 보수의 조화로운 양당정치가 확립되어 서로 정권을 교체하게 되었고,'공장법'을 제정하고,빈민구호정책을 개선하고,도시정부를 민주화하고,노예제도를 철폐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 발달한 기차와 기선에 의한 수송수단의 혁명적인 변화는 자유무역과 미개척지의 개발과 식민지로의 이민을 가능하게 하였다.스코틀랜드에서 약 5만,잉글랜드 왕국에서 약30만,아일랜드에서 약 200만에 가까운 인구가 미국으로 이민함으로써 사회적 긴장이 완화되었다.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1839년에는 연간 3,900만 부,1854년에는 연간 1억 2,200만 부의 일간신문이 발행되었다.일간신문의 보급은 종교적,인도주의적 사회개혁운동을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였다.신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생겨나 디킨스와 같은 소설가들이 현실 고발적인 소설을 써서 신문독자로 하여금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돌리게 한 것도 이때이다.1851년에 로이터가 로이터 통신사를 창설하여 전 세계의 소식과 새로운 사상을 빠르고 쉽게 전달하도록 한 것도 사회개혁에 일조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사회개혁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촉구하여 오웬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킹슬리의 기독교 사회주의,인민헌장운동 등이 일어났다.프랑스혁명사의 저자 칼라일 등의 영웅숭배적 보수주의 비판,낭만주의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문학자들과 종교가들의 인도주의적 이상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때이다.특히 러스킨,리드 등의 저술은 개혁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사회개혁은 종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오랫동안 계쏙되어온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사라졌으며,비국교도에 대한 시민권 제한도 사라졌다.1829년에 제정된'가톨릭 해방법'은 가톨릭 교도들의 국회진출을 허용했으며,웨스트민스터 대주교구의 창설(1851)을 가능케하고,1860년경에는 옥스퍼드켐브리지 대학의 문호도 비국교도를 비롯한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가톨릭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5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던 신도의 수가 일세기 정도 후에는 40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가톨릭의 이러한 비약적 발전은 1833년에 뉴만매닝 등이 이끈 옥스퍼드 운동의 성과였다.옥스퍼드 운동은 영국국교회를 국가의 관리에서 해방시켜서 진정한 영국의 가톨릭교회로 만들려는 운동이었다.이 운동은 영국국교회가 극단적으로 가톨릭화한 고교회파,이에 반대하는 저교회파,그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광교회파 등 세 종파로 갈라지게 하였다.스코틀랜드 국교도 자유교회가 분열하면서 신앙의 자유가 확대되어 국왕 이외에는 모두가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산업주의가 발전하면서 결정론기계론,물질주의가 유행하고,지식인들은 종교에서의 해방과 과학만능주의에 물들게 되었다.1859년에 발표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다윈주의를 유포시켜서 사람들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도 19세기에는 사회적 관심이 증대되었다.디킨스 이후 킹슬리의 '이스트'와 '알튼 로크',가스켈의 '메리 바톤',택커리의 '허영의 도시',엘리엇의 '사일러스 마이너',디즈레일리의 '코닝스비'와 '씨빌' 등 수많은 폭로적,사실적,이상적인 정치사회소설이 발표되었다.시에서도 테니슨,브라우닝,바레트 등의 위대한 시인들이 나왔다.

19세기 중엽 이후 신발명과 경제적 번영으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는데,이는 수송수단의 혁명적 발전과 자유무여겡 힘입은 바크다.곡물법이 철폐되어 해외의 곡물수입이 자유로워져 식량이 풍부해지고,전문화된 공업제품을 전 세계로 수출하면서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 되었다.무산자계급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여 중산계급으로 향상되고 사회보장제도와 교육 및 선거권이 확대되는 등 영국은 모든 면에서 현저히 진보하였다.이에 따라만족하고 여유로운 빅토리아 중산계급의문화가 찬란하게 개화하였다.

영국은 중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아시아를 모두 지배하게 되고,리빙스턴의 탐험에서 쎄실 로드의 침략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새로운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삼을 준비를 하였다.또한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이집트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고,키프로스와 아프가니스탄,미얀마를 새 영토로 확보했따.빅토리아 여왕은 1831년에 1,600만에 불과했던 영국의 인구를 1901년에는 3,700만으로 증가시키고 이 세상의 사분의 일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여'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국내적으로는 ,파머스턴,러셀,디즈레일리,글래드스턴 등의 위대한 정치가들이 물질주의적이며,금전을 숭상하는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정신을 억압하지 않으며 입헌정치의 규범을 확립하였다.예술에 있어서는 고딕예술이 부활되어 템즈강변에 고딕양식의 국회의사당이 세워졌다.노동조합법이 제정되어(1871)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었으며,패비안사회같은 국가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표방하는 단체가 나타났다.패비안사회는 ,웰즈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이 그 회원이었다.이러한 변화는 결국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보수와 진보라는 양당정치의 전통을 깨뜨리는 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은 굉장한 산업의 발달,물질적 번영,정치적 자유를 가져와 영국에 의한 세계의 지배,세계의 평화를 명실공히 이루었다.

현대

영국인,즉 앵글로색슨의 주도 하에 제국주의가 건설되어 전 세계의 서양화가 이루어지고 백인의 세계 지배가 실시되었으나 영국에 의한 세계 평화는 영속될 수 없었다.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영국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든다면 농업을 경시하고 공업을 중시하는 정책과 인권을 중시하는 정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영국은 곡물법이 철폐된 이후 자국의 식량생산 기반이 무너져 대부분의 식량을 외국에 의존하는 식량 수입국가가 되었다.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이 그 과실을 독점할 수있었을 때에는 빠른 공업화가 바람직했으나,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산업화하여 많은 공산품을 자국에서 생산하고 또 수출까지 하게 되자 공업화의 폐단이 나타났다.식령을 자급자족하지 못하고,석유같은 지하자원이 부족한 영국은 그 모든 것이 풍부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 비해 많은 약점을 지닌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권을 중시하는 영국의 저치사상이 외국으로 수출되면서 각 식민지에서는 독립운동 등이 이렁나고 그 결과 대영제국은 처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영국이 경험한 여러 가지 정치적 실험,즉 로크의 혁명권과 인민주권사상,그리고 국가주의와 자유주의,다윈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같은 사회과학분야의 발전된 사상 등으로 인하여 식민지의 여러 나라에서 민족적 자각이 일어났다.아시아의 민족주의와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는 독립국가의 건설로 나아갔고,그 결과 대영제국의 식민지는 거의 사라지게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더불어 세계 제일의 투자국이었던 영국은 엄청난 부채를 짊어진 채무국으로 전락했고,세계 금융의 중심은 런던의 롬바드가에서 미국 뉴욕의 월가로 옮겨갔다.세계 예술의 중심은 영국의 피카딜리에서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옮겨갔다.또한 아일랜드의 분리와 인도의 독립,모택동 군대에 밀린 영국군의 양자강변에서 철수 등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는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갔다.

잉글랜드 본국과 영연방/커먼웰스의 장래의 관계 변화에 관계없이 영국이 미주대륙과 호주대륙에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민족을 퍼뜨려놓았고,동남아에서 극동지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어문화권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은 현대문화에 매우 중요하다.현재 한자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주민의 숫자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주민의 숫자보다 많기는 하지만,현대문명의 발전 양상을 볼 때 영어가 적어도 한동안 세계적인 공용어로 사용되리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이는 앵글로색슨족인 잉글랜드인들이 현재 세계에 끼친 가상 큰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

영국의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지는 세계 111개국 가운데 아일랜드를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선정했다.낮은 실업률과 경제성장,정치적 자유 등이 전통적 가치와 성공적으로 결합된 나라라는 이유에서이다.반면에 아일랜드를 거의 800여 년 동안 식민통치했던 영국은 29위를 기록했다.유럽의 최빈국이 불과 10년 간의 고도성장을 통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고,완전고용을 실현함은 물론,1인당 국민소득에서 영국을 앞지른 과정은 가히'리피강(더블린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이룬 남아일랜드(공식 명칭은'아일랜드 공화국'이며,영문 명칭은'Republic of Ireland')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메랄드 빛 전원의 나라이다.에메랄드 빛 아일랜드 섬은 서유럽의 끝자락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전체 면적은 약 8만 4천KM2이다.이 중 남아일랜드가 섬의 83%를 차지하며,남아일랜드의 인구는 3백 90만이고 북아일랜드의 인구는 1백 70만이다.북아일랜드의 수도는 벨파스트이고 남아일랜드의 수도는 더블린이다.기후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이지만 여름 3개월을 제외하고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 많다.일상 언어로는 그들의 토속 언어인 게일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인종은 켈트족이고,종교는 주로 가톨릭이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이래로 근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특히 그들의 주식인 감사의 고사병으로 인하여 1845년 부터 2년 동안 지속된 대기근의 참혹한 역사는 인류 역사상 전후무후한 것이었다.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방치 하에 150만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굶주림 속에서 지쳐 죽어나갔고,끝내는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영국,호주,캐나다,미국 등으로떠났다.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사랑하는 가족,친지,연인들을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울면서 헤어질 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대니 보이'로,이는 그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에 뼈아팠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애국가 다음으로 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이다.

아일랜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켈트족은 본능과 상상력을 중시하는 정감적인 민족이다.계절의 변화가 펼쳐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야생의 생활을 즐기면서,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호탕한 기질을 가진 민족이다.421년 로마교황이 파견한 선교사 팰라디우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고,432년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패트릭에 의해서 수도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민중들 사이에 보급되기 이전까지,그들은 삼라만상의 자연에 편재하는 정령과 영혼의 불멸성을 미든ㄴ 이교도들이었다.

수도원의 설립과 기독교의 보급은 켈트족의 찬란했던 과거 문화유산을 화려하게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민중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던 신화,민담,설화,역사 등이 수사들에 의해서 기록되어 널리 보급되고 보존되면서,아일랜드는 유럽의 암흑기에 유럽 정신문명의 진원지이자 유럽문화의 중심무대가 되었다.또한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로마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과거 문화유산이 대부분 소실되었디만,아일랜드에는 로마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그드르이 찬란했던 고대 켈트문화가 문헌으로 온전히 보존되고 전수되어 오늘날 그들의 문화적 위세를 전 세계에 뽐낼 수 있는 자산이 되고 있다.아일랜드는 조지 버나드 쇼,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사뮤엘 베케트,셰이머스 히니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위시하여,조나단 스위프트,오스카 와일드,숀 오케이시,존 밀링톤 싱,올리버 골든스미스,제임스 조이스 등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수많은 대문호들을 배출함으로써 문학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는 전통악기인 보드란,하프,피들 등으로 연주하는 아일랜드 민속음악이 유명하고,이런 전통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 가수들은 세계 팝 음악계에서도 상당한 팬을 확보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로는 엔야,모리슨,메리 블렉,시너드 오코너,다니엘 오도넬,다미엔 라이스 등이 있고,대표적인 그룹으로는 클래나드,치프테인스,크랜베리스,더블리너즈,코어스,보이존,U2 등이 있다.U2 그룹의 리드 싱어인 보노는 최근 세계은행 총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며,감미로운 목소리로 1999년 데뷔한 5인조 밴드인 웨스트라이프도 모두 아일랜드 출신의 맴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일랜드의 전통 무용으로는 4쌍의 남녀가 함께 추는 단체 무용의 하나인 아일랜드 세트 댄싱이 150년 동안 인기를 누려오고 있다.특히,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발만을 이용하여 추는 탭댄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근래에는 현대무용을 가미함으로써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