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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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韻
창운

이청 폐하 즉위 기념식.jpg

1988년 11월 14일 거행된 즉위식 이후, 바로 오후에 내각총리대신과 각부 대신들이 중앙청 앞에서 진행한 기념식 사진
개막 1988년 11월 14일
기간 1988년 11월 14일 ~ 현재
대황제 창운제
내각총리대신 전두환 (1988~1995)
노태우 (1995~1997)
김영삼 (1997~1999)
이회창 (1999~)

개요

창운(昌韻)은 창운제(이청)가 재위했던 1988년 11월 14일부터 현재까지 사용되는 한국의 연호이자 시대 구분이다.

황제탄신일은 4월 23일이다.

용례

서기 1988년이 '창운 원년(元年)'이다. 즉, 1989년 = '창운 원년(1년)', 1990년 = '창운 2년' 식으로 진행했다.

시대적 특징

창운이 개막한 시기는 단군 이래 최고 호황기와 한국 버블경제 붕괴를 동시에 겪은 시대로써 중년층과 청년층이 기억하는 특징이 첨예하게 갈린다. 중장년층의 경우 창운시대를 한국의 호황으로 생각하는 반면, 청년층은 경제 붕괴 이후 태어난 세대로써 저성장의 늪에 빠진 시기로 기억한다.

한국 밖에서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40년 넘게 세계를 갈라 놓았던 미 · 소 냉전이 종식된 시기였다.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공산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공산권 전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창운시대 개막 1년 전 이웃나라 대만주국에서 열린 신징 올림픽에 공산권 국가 선수단이 대거 참가할 만큼 인류는 첨예한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창운시대가 개막한 1989년부턴 동유럽 각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공산권이 붕괴했으며 이듬해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창운시대 개막 이후인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체제 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이웃나라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이후 한국인 납북[1]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2010년대 이후로는 해상으로 미사일 발사를 반복한 탓에 북한관계[2]는 남북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냉전을 겪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1961년부터 이어져온 족청의 독주 체제가 처음으로 무너졌었다. 저성장과 지속적인 부정부패 스캔들로 인해 족청은 2005년 8월 민참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으며 야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그 결과 노무현을 총리로 하는 비(非)족청 2당 연립 내각이 출범했다. 노무현 내각은 당내 계파 문제와 진보정당과의 마찰로 총리가 사임하면서 5년도 되지 않아 붕괴했고, 새천년-열우당 국회 폭력 사태로 연정도 와해되었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문재인이 총리로 등극했으나 2년만에 문재인 게이트로 붕괴하고, 2012년 8월부턴 다시 족청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된다.

또한 전후 박정희 정권 이후 수십 년간 평화주의 정책을 유지해온 한국이 본격적으로 대외확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2000년대 초반 이회창 정권 당시부터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선 박근혜 정권이 헌법을 재해석해 간도와 대마도 영유권을 재주장함으로써 대외 군사 개입의 명분을 마련했다. 한국의 재확장 의지는 1950년대부터 내려온 한국 극우 세력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지만, 대외 군사 개입 부담을 줄이고 대신 동맹국 한국의 군대를 활용하려는 미국의 의중이 담겨 있기도 하다. 때문에 박근혜 정권은 집단적 영유권 주장 및 군비 증강과 함께 NATO를 필두로 한 서방과 밀착하면서 중공 견제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동시에 한국 사회에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 역사수정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해 대만주국 및 중공과의 역사 분쟁이 격화되기도 했다.

  1. ↑ 만공으로의 납치
  2. ↑ 여기서 북한관계는 만공과 대한제국의 관계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