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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
 
== 고대 ==
평사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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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소규모의 원주민 부락만 있던 태평도에 한 중국인이 일가 식솔 전체를 동반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현재 성서 현 지역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들은 ‘최(崔)’씨 가문의 시초가 된다. 5세기, 최씨 가문은 성서 현 부근에 평사국 최초의 봉건제 국가인 [[서도]]를 건국하였다. 각각 8개 지방의 귀족인 봉서, 운서, 운북, 봉동, 인남, 인북, 온동, 온남이 있었는데 국왕은 이 지방귀족에 의해 선출되었고 이로 인해 세습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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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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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년, 6세기 들어 강화되던 왕권에 대립하여 봉씨와 운씨가 [[도동국]]을 건국하였다. 도동국은 현재의 성도 성에 위치한 국가로, 초반에는 서도국보다 퇴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정을 펼치는 선거군주들과 귀족의 타협, 태평도 동부의 비옥한 땅 덕분에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른 603년, 선거군주제인 도동국이 귀족들의 요청으로 세습군주제로 바뀌었다. 세습군주제가 되자, 국정이 안정되었고, 그 결과 서도국과 도동국의 국력의 격차가 2배 이상 나게 된다. 또한, 593년에 서도국은 온씨의 독립으로 [[신온국]]이 세워져 더욱 약해진 상태였고, 610년 도동국은 서도국을 침공하여 합병하였다. 서도국을 합병한 도동국은 국호를 [[정도국]]으로 바꾸고 신온국을 정복하여 성서 현과 성도 성 일대를 전부 장악한다.
  
3세기 무렵, 원주민만 조금 있던 태평도에 한 중국인이 상륙했습니다. 그는 일가 식솔 전체를 동반하고 평사국에 정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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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년, 정도국은 현재의 난본 지역으로 확장을 시도하였다. 난본 지역에는 원주민 국가와 도망자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도국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주민과 도망자들이 연합해 반격하여, 정도국은 300명 정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한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 원주민과 도망자들의 국가인 [[남서국]]이 세워지고, 856년까지 정도국과 남서국은 전쟁을 치루게 된다. 남서국은 천혜의 요새인 중앙 산맥을 끼고 방어전을 치루었으며,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인해 정도국의 피해가 남서국의 피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725년, 남서국이 성도 성의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804년에 당과 관계를 수립한 정도국은 중국 호족이 보내준 돈으로 전쟁을 계속하고, 남서국은 829년 성도 지역을 다시 상실한다. 남서국은 착취당하던 정도국의 농민들에게 군수품을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856년 도동국이 항복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는 현재엔 성서 현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원주민과 결혼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최(崔)’씨 가문이 생겨났습니다.
 
 
5세기 무렵, 이미 원주민과 동화된 이민자들은 성서 현 쪽에 태평도의 첫 국가를 세웁니다.
 
 
그 국가는 ‘서도(西島)’ 라고 불렸으며, 정치체제는 동양식 봉건제의 비슷한 것이였습니다.
 
 
서도왕(西島王) 아래에는
 
각각 총 8개 대 지방의 귀족인
 
봉서, 운서, 운북, 봉동, 인남, 인북, 온동, 온남이 있었는데, 이는 초기 씨족인 봉씨, 운씨, 인씨, 온씨의 각 가문이 분립한 것입니다.
 
 
국왕은 이들로서 선출되었고, 세습은 매우 적었습니다.
 
  
== 중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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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남서국은 평온국으로 국호를 바꾼다. 평온국이 각 지역에 맞는 정치를 하며 국력을 강하게 키우던 1136년, 옛 정도국의 성서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평온국은 군축의 결과로 순식간에 멸망한다. 평온국 멸망인 1140년부터 1325년까지는 통일 세력이 나오지 않은 전란의 시대가 되었다.
평사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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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
기원후 567년, 서도국이 분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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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왕으로 모시는 평남국은 거의 50개에 달하던 군소 국가들을 전부 통합시켰고, 평온국의 영토를 전부 되찾은 거대 국가가 되었다. 평남국은 중앙집권적인 세습군주국가였고, 또한 풍요로운 동쪽 지방, 평범한 서쪽 지방으로 나뉘어(동쪽•농업 서쪽•상업) 국가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들은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규모는 대체로 1만명 내외였다. 17세기 무렵, 평남국에 3년간 지속된 전국적인 흉작이 발생하였다. 흉작으로 인해 농민들이 살기 힘들게 되었고, 서쪽은 상업의 필요성 때문에 동쪽에 세금을 그대로 매기자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동쪽 농민들의 반란이 발생하여 18세기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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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들어 강화되던 왕권에 대립하여 봉씨와 운씨가 떨어져 나갔으며, 도동국(島東國) 이라는 국가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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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년, 평남국은 에스파냐 제국과 접촉하였다. 에스파냐 제국은 평남국에 100명 정도의 부대를 보내 공격을 시도해보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한 평남국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3차례 지속된 스페인의 패배는 필리핀 식민당국에게 무력을 포기시킨 이유가 되었고, 결국 무력 대신 상업으로 이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때 스페인에서 전해진 좀 더 진보된 총기와 건조공법 등은 평남국을 꽤나 준수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1759년에 평남국은 서양 현 지방을 합병하고, 광서 현 지방 역시 통치권 아래에 넣어 국토의 거대화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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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국은 현재의 성도 성에 위치한 국가로, 초반에는 서도국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국가였지만, 서도국의 지속되는 폭정에 대비해 선정을 펼치는 선거군주들과 귀족의 타협, 또한 풍족한걸로 알려진 동쪽 땅의 도움으로 서서히 서도국보다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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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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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군함 한척이 난주 성 부분의 도시인 남시 시에 찾아와 정박을 요청한다. 이미 스페인과 교역하며 개항이 되어 있던 평남국은 영국군의 군함을 입항 시켜주는데, 그 군함에서 나온 400명의 병력은 남시 지역(현 난주)를 점령한다. 그 뒤에 들어온 3척의 영국 군함이 남시와 성도 근처로 향하자 결국 평남국은 영국에게 8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난주의 영유권을 판다.
그 강력함에 정점을 찍은 때인 603년, 7세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서였죠.
 
 
선거군제인 도동국이 귀족들의 ‘원함’ 으로 세습군주제로 바뀌었습니다. 세습군주제가 되자, 국정이 안정되었고, 그 결과 서도국과 도동국의 국력은 이미 두배 이상 벌어지고 맙니다.
 
 
게다가 593년에 서도국은 온씨의 독립으로 ‘신온국’ 이 세워져 더더욱 약해진 상태였고, 610년 도동국은 서도국을 공격했고, 승리합니다.
 
 
그렇게 서도국을 합병한 도동국은 국호를 ‘정도 왕국(政島 王國)’이라 칭하게 됩니다. 통일국가가 된 정도국은 신온국을 간단히 함락시켜 버리고, 성서 현과 성도 성 일대를 전부 장악합니다.
 
 
그렇게 평온하게 50년을 더 보내던 677년, 정도국은 현재의 난본 지역으로 확장을 시도합니다.
 
 
난본 지역에는 원주민 국가와 도망자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도국은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원주민과 도망자들이 연합해 반격한 위력은 상당했고, 300명 정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합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 원주민과 도망자들의 국가인 ‘남서국(楠西國)’이 세워지고, 856년까지 계속될 정도국과 남서국의 전쟁이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보다 강력했던 남서국은 천혜의 요새인 중앙 산맥을 끼고 방어전을 치루며 정도국을 고생시켰고, 정도국 역시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계속 전투를 치루며 피해만 늘어갔습니다.
 
 
그렇게 계속 전쟁이 되풀이되던 725년, 남서국이 드디어 대승을 거두고 성도 성의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킵니다.
 
 
이로서 세력이 절반 절반이 된 양국은 더더욱 치열한 전쟁을 치루게 되고, 800년이 시작된 그 해에는 양국 다 완전히 피폐해진 모습이였습니다.
 
 
그러나, 804년에 중국과 관계를 수립한 정도국은 중국 호족이 보내준 돈으로 전쟁을 계속하고, 남서국은 829년 성도 지역을 다시 상실합니다.
 
 
그러나 남서국은 농민을 자극시켰습니다. 힘든 지배를 받던 9세기의 농민들을 시켜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이 긴 전쟁은 856년 남서국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승리한 남서국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평온국(이런 이름들은 옛 평사국 사람들의 네이밍 센스가 아주 뭣같다는 것을 알려줍니다.)이라고 국호를 바꿉니다.
 
 
각 지역에 맞는 정치를 하며 국력을 강하게 키운 평온국은 12세기까지 태평도의 유일한 주인이였습니다.
 
 
그러던 1136년, 옛 정도국의 성서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유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이 일어나고, 평온국은 군축의 결과로 순식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평온국 멸망인 1140년부터 1325년까지는 통일 세력이 나오지 않은 전란의 시대였고, 결국 세상은 혼돈의 연속이게 되었습니다.
 
  
== 근세, 근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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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국은 1823년에 근대 국가로서 거듭나겠다는 의지와 함께 국호를 [[평사국]]로 바꾸고, 난주와 가까운 난본 지역에 첫 공장을 세운다. 이때 평사국에 첫 지폐 도입이 있었고, 이는 ‘평사 파운드’ 라고 칭해지며 평사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평사국은 난주 지역 대학에서 영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개혁파들이 국왕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평사국의 1호 철갑 증기선인 ‘세화호’를 건조하였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기, 필리핀 함락 전에 사실상 가장 빠르게 함락된 큰 섬으로는 평사국이 제일 먼저였다.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영국 식민지로 꼬아서 평사국을 공격한 일본군 1만명과 전차부대, 또한 수많은 공군과 해군 앞에 평사국의 영국식 무장을 한 5000명의 평사국군은 전국에서 저항하나 결국 항복한다.
평사국의 역사 
 
 
평온국 멸망 이후 14세기까지 지속된 전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세(世)씨를 왕으로 모시는 평남국(平南國)이였다.
 
 
평남국은 거의 50개에 달하던 군소 국가들을 전부 통합시켰고, 평온국의 영토를 전부 되찾은 거대 국가가 되어 있었다.
 
 
평남국은 중앙집권적인 세습군주국가였고, 또한 풍요로운 동쪽 지방, 평범한 서쪽 지방으로 나뉘어(동쪽•농업 서쪽•상업) 국가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들은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규모는 대체로 1만명 내외였다고 전해진다.
 
 
17세기 무렵, 평남국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이때까지 거의 없던 대 흉작의 기간 때문이였다. 3년 지속된 전국적인 흉작은 농민들이 살기 힘들게 되었고, 서쪽은 상업의 필요성 때문에 동쪽에 세금을 그대로 매기자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그렇게 되버린 평남국은 동쪽 농민들의 반란을 거치게 되는데, 이게 완전히 끝나는 것은 18세기였을 정도로 지독한 문제였다.
 
 
1735년, 막 농민들의 반란을 완전히 끝맺은 때에 처음으로 유럽 국가와 마주한다.
 
 
바로 스페인(에스파냐 제국) 이였는데, 필리핀 바로 근처인 평사국의 지리 특성 상 가장 먼저 이들과 접촉한 것이다.
 
 
이들은 평남국에 100명 정도의 부대를 보내 공격을 시도해보지만, 평남국은 당시 이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화승총이 상비군 1만명 중 1/20에게 지급된 상태(태평도 중앙산맥은 화약의 산지다)였다.
 
 
3차례 지속된 스페인의 패배는 필리핀 식민당국에게 무력을 포기시킨 이유가 되었고, 결국 무력 대신 상업으로 이들과 교류하게 된다.
 
 
스페인에서 전해진 좀 더 진보된 총기와 건조공법 등은 평남국을 꽤나 준수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이 무렵(1759년)에 평남국은 서양 현 지방을 재패하고, 광서 현 지방 역시 통치권 아래에 넣어 국토의 거대화를 맞이했다.
 
 
그렇게 별 일 없이 18세기를 보내고 19세기, 영국의 군함 한척이 난주 성 부분의 원조이던 ‘남시 시’에 찾아와 정박을 요청한다.
 
 
이미 스페인과 교역하며 개항이 되어 있던 평남국은 영국군의 군함을 입항 시켜주는데, 그 군함에서 뛰쳐 나온 400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남시 지역(현 난주)를 지배한다.
 
 
그 뒤에 후속으로 들어온 세척의 영국 군함이 한척은 남시, 두척은 성도 근처로 향하자 결국 평남국은 영국에게 8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난주의 영유권을 판다.
 
 
이후에 평남국은 1823년에 근대 국가로서 거듭나겠다는 의지와 함께 국호를 평사국(평사어로 벚꽃의 나라)로 바꾸고, 난주와 가까운 난본 지역에 첫 공장을 세운다.
 
 
이때 평사국에 첫 지폐 도입이 있었고, 이는 ‘평사 파운드’ 라고 칭해지며 평사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의회까지 생긴(난주 지역 대학에서 영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개혁파들이 국왕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받아낸 산물, 그러나 그 뒤에는 영국군이 있었다.)평사국은 평사국의 1호 철갑 증기선인 ‘세화호’를 건조하고, 내외로 바쁘게 지낸다.
 
 
2차 세계대전기, 필리핀 함락 전에 사실상 가장 빠르게 함락된 큰 섬으로는 평사국이 제일 먼저였다.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영국 식민지로 꼬아서 평사국을 공격한 일본군 1만명과 전차부대, 또한 수많은 공군과 해군 앞에 평사국의 영국식 무장을 한(이때 평사국 내 무장은 영국산 라이센스가 다였다)5000명의 평사국군은 전국에서 저항하나 결국 항복한다.
 
 
이후 1945년 초 미국과 영국이 함께 평사국을 탈환할 때까지 3년 가량 평사국은 영국인에게도 받아본적 없는 차별을 받았다.
 
  
== 냉전기,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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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
평사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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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게 난주를 돌려받고 공산화된 중국 아래에서 미국의 원조을 통해 반공 방패의 일부로 커진 평사국은 한국 전쟁에 병력 원조를 보냈으며, 베트남전에도 미국의 요청을 받고 미 해군의 정박권을 승인하며 참전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바로 그 다음해인 1992년 극좌 혁명파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을 용인했고, 1996년에는 중국과 수교하지만 2000년 중국의 첫 ‘중화 평사’ 사태로 단교하고 2001년 중화민국과 수교한다.
 
1858년에 태평도 전체를 장악했던 평사국은 그때 북부와 중부의 왕국들과 동군 연합, 그리고 합병을 통해 연합 왕국(아무리 봐도 영국에게 이것을 배운듯 하다. 실제로 19세기 평사국의 의회 엘리트들은 전부 영국 유학파였다.)을 세운 것이다.
 
 
돌아와서,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게 난주를 돌려받고(다만 형식상의 2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공산화된 중국 아래에서 미국의 마셜 플랜 지원을 통해 반공 방패의 일부로 커진 평사국은 한국 전쟁도 병력 원조를 보냈고, 베트남전때에 미국의 요청을 받고 미 해군의 정박권을 승인하며 참전했다.
 
 
이때 대략 1개 연대 정도를 파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바로 그 다음해인 1992년 극좌 혁명파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을 용인했고, 1996년에는 중국과 수교하지만 2000년 중국의 첫 ‘중화 평사’ 사태로 단교하고 2001년 중화민국과 수교한다.
 
 
이 뒤로는 별로 서술할게 없고, 다음부터는 문화나 그런 것들을 서술할 생각입니다.
 
  
== 각주 ==
 
 
{{주석}}
 
{{주석}}
  
 
[[분류:태평도 프로젝트]]
 
[[분류:태평도 프로젝트]]

2019년 6월 30일 (일) 16: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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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국의 역사
平私史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삼산시대통일태평국시대전국시대삼국시대중세 평사국시대근세 평사국시대근대 평사국시대일제강점기연합군점령기현대 평사국시대
중산국태평국태평국태평도사화국평사국평사국일제강점기연합군 점령기평사국
성산국
태평국
진양국
고대 본주비사국
중세 본주 (중부)대화국
중세 본주 (북부)대화국

고대

3세기, 소규모의 원주민 부락만 있던 태평도에 한 중국인이 일가 식솔 전체를 동반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현재 성서 현 지역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들은 ‘최(崔)’씨 가문의 시초가 된다. 5세기, 최씨 가문은 성서 현 부근에 평사국 최초의 봉건제 국가인 서도를 건국하였다. 각각 8개 지방의 귀족인 봉서, 운서, 운북, 봉동, 인남, 인북, 온동, 온남이 있었는데 국왕은 이 지방귀족에 의해 선출되었고 이로 인해 세습은 적었다.

중세

567년, 6세기 들어 강화되던 왕권에 대립하여 봉씨와 운씨가 도동국을 건국하였다. 도동국은 현재의 성도 성에 위치한 국가로, 초반에는 서도국보다 퇴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정을 펼치는 선거군주들과 귀족의 타협, 태평도 동부의 비옥한 땅 덕분에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른 603년, 선거군주제인 도동국이 귀족들의 요청으로 세습군주제로 바뀌었다. 세습군주제가 되자, 국정이 안정되었고, 그 결과 서도국과 도동국의 국력의 격차가 2배 이상 나게 된다. 또한, 593년에 서도국은 온씨의 독립으로 신온국이 세워져 더욱 약해진 상태였고, 610년 도동국은 서도국을 침공하여 합병하였다. 서도국을 합병한 도동국은 국호를 정도국으로 바꾸고 신온국을 정복하여 성서 현과 성도 성 일대를 전부 장악한다.

677년, 정도국은 현재의 난본 지역으로 확장을 시도하였다. 난본 지역에는 원주민 국가와 도망자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도국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주민과 도망자들이 연합해 반격하여, 정도국은 300명 정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한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 원주민과 도망자들의 국가인 남서국이 세워지고, 856년까지 정도국과 남서국은 전쟁을 치루게 된다. 남서국은 천혜의 요새인 중앙 산맥을 끼고 방어전을 치루었으며,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인해 정도국의 피해가 남서국의 피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725년, 남서국이 성도 성의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804년에 당과 관계를 수립한 정도국은 중국 호족이 보내준 돈으로 전쟁을 계속하고, 남서국은 829년 성도 지역을 다시 상실한다. 남서국은 착취당하던 정도국의 농민들에게 군수품을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856년 도동국이 항복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승리한 남서국은 평온국으로 국호를 바꾼다. 평온국이 각 지역에 맞는 정치를 하며 국력을 강하게 키우던 1136년, 옛 정도국의 성서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평온국은 군축의 결과로 순식간에 멸망한다. 평온국 멸망인 1140년부터 1325년까지는 통일 세력이 나오지 않은 전란의 시대가 되었다.

근세

세(世)씨를 왕으로 모시는 평남국은 거의 50개에 달하던 군소 국가들을 전부 통합시켰고, 평온국의 영토를 전부 되찾은 거대 국가가 되었다. 평남국은 중앙집권적인 세습군주국가였고, 또한 풍요로운 동쪽 지방, 평범한 서쪽 지방으로 나뉘어(동쪽•농업 서쪽•상업) 국가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들은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규모는 대체로 1만명 내외였다. 17세기 무렵, 평남국에 3년간 지속된 전국적인 흉작이 발생하였다. 흉작으로 인해 농민들이 살기 힘들게 되었고, 서쪽은 상업의 필요성 때문에 동쪽에 세금을 그대로 매기자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동쪽 농민들의 반란이 발생하여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735년, 평남국은 에스파냐 제국과 접촉하였다. 에스파냐 제국은 평남국에 100명 정도의 부대를 보내 공격을 시도해보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한 평남국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3차례 지속된 스페인의 패배는 필리핀 식민당국에게 무력을 포기시킨 이유가 되었고, 결국 무력 대신 상업으로 이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때 스페인에서 전해진 좀 더 진보된 총기와 건조공법 등은 평남국을 꽤나 준수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1759년에 평남국은 서양 현 지방을 합병하고, 광서 현 지방 역시 통치권 아래에 넣어 국토의 거대화를 맞이했다.

근대

19세기, 영국의 군함 한척이 난주 성 부분의 도시인 남시 시에 찾아와 정박을 요청한다. 이미 스페인과 교역하며 개항이 되어 있던 평남국은 영국군의 군함을 입항 시켜주는데, 그 군함에서 나온 400명의 병력은 남시 지역(현 난주)를 점령한다. 그 뒤에 들어온 3척의 영국 군함이 남시와 성도 근처로 향하자 결국 평남국은 영국에게 8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난주의 영유권을 판다.

평남국은 1823년에 근대 국가로서 거듭나겠다는 의지와 함께 국호를 평사국로 바꾸고, 난주와 가까운 난본 지역에 첫 공장을 세운다. 이때 평사국에 첫 지폐 도입이 있었고, 이는 ‘평사 파운드’ 라고 칭해지며 평사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평사국은 난주 지역 대학에서 영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개혁파들이 국왕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평사국의 1호 철갑 증기선인 ‘세화호’를 건조하였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기, 필리핀 함락 전에 사실상 가장 빠르게 함락된 큰 섬으로는 평사국이 제일 먼저였다.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영국 식민지로 꼬아서 평사국을 공격한 일본군 1만명과 전차부대, 또한 수많은 공군과 해군 앞에 평사국의 영국식 무장을 한 5000명의 평사국군은 전국에서 저항하나 결국 항복한다.

현대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게 난주를 돌려받고 공산화된 중국 아래에서 미국의 원조을 통해 반공 방패의 일부로 커진 평사국은 한국 전쟁에 병력 원조를 보냈으며, 베트남전에도 미국의 요청을 받고 미 해군의 정박권을 승인하며 참전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바로 그 다음해인 1992년 극좌 혁명파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을 용인했고, 1996년에는 중국과 수교하지만 2000년 중국의 첫 ‘중화 평사’ 사태로 단교하고 2001년 중화민국과 수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