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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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국의 역사
平私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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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3세기, 소규모의 원주민 부락만 있던 태평도에 한 중국인이 일가 식솔 전체를 동반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현재 성서 현 지역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들은 ‘최(崔)’씨 가문의 시초가 된다. 5세기, 최씨 가문은 성서 현 부근에 평사국 최초의 봉건제 국가인 서도를 건국하였다. 각각 8개 지방의 귀족인 봉서, 운서, 운북, 봉동, 인남, 인북, 온동, 온남이 있었는데 국왕은 이 지방귀족에 의해 선출되었고 이로 인해 세습은 적었다.

중세

567년, 6세기 들어 강화되던 왕권에 대립하여 봉씨와 운씨가 도동국을 건국하였다. 도동국은 현재의 성도 성에 위치한 국가로, 초반에는 서도국보다 퇴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정을 펼치는 선거군주들과 귀족의 타협, 태평도 동부의 비옥한 땅 덕분에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른 603년, 선거군주제인 도동국이 귀족들의 요청으로 세습군주제로 바뀌었다. 세습군주제가 되자, 국정이 안정되었고, 그 결과 서도국과 도동국의 국력의 격차가 2배 이상 나게 된다. 또한, 593년에 서도국은 온씨의 독립으로 신온국이 세워져 더욱 약해진 상태였고, 610년 도동국은 서도국을 침공하여 합병하였다. 서도국을 합병한 도동국은 국호를 정도국으로 바꾸고 신온국을 정복하여 성서 현과 성도 성 일대를 전부 장악한다.

677년, 정도국은 현재의 난본 지역으로 확장을 시도하였다. 난본 지역에는 원주민 국가와 도망자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도국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주민과 도망자들이 연합해 반격하여, 정도국은 300명 정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한다. 그리고 이 승리를 통해 원주민과 도망자들의 국가인 남서국이 세워지고, 856년까지 정도국과 남서국은 전쟁을 치루게 된다. 남서국은 천혜의 요새인 중앙 산맥을 끼고 방어전을 치루었으며,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인해 정도국의 피해가 남서국의 피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725년, 남서국이 성도 성의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804년에 당과 관계를 수립한 정도국은 중국 호족이 보내준 돈으로 전쟁을 계속하고, 남서국은 829년 성도 지역을 다시 상실한다. 남서국은 착취당하던 정도국의 농민들에게 군수품을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856년 도동국이 항복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승리한 남서국은 평온국으로 국호를 바꾼다. 평온국이 각 지역에 맞는 정치를 하며 국력을 강하게 키우던 1136년, 옛 정도국의 성서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평온국은 군축의 결과로 순식간에 멸망한다. 평온국 멸망인 1140년부터 1325년까지는 통일 세력이 나오지 않은 전란의 시대가 되었다.

근세

세(世)씨를 왕으로 모시는 평남국은 거의 50개에 달하던 군소 국가들을 전부 통합시켰고, 평온국의 영토를 전부 되찾은 거대 국가가 되었다. 평남국은 중앙집권적인 세습군주국가였고, 또한 풍요로운 동쪽 지방, 평범한 서쪽 지방으로 나뉘어(동쪽•농업 서쪽•상업) 국가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들은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규모는 대체로 1만명 내외였다. 17세기 무렵, 평남국에 3년간 지속된 전국적인 흉작이 발생하였다. 흉작으로 인해 농민들이 살기 힘들게 되었고, 서쪽은 상업의 필요성 때문에 동쪽에 세금을 그대로 매기자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동쪽 농민들의 반란이 발생하여 18세기까지 이어졌다.

1735년, 평남국은 에스파냐 제국과 접촉하였다. 에스파냐 제국은 평남국에 100명 정도의 부대를 보내 공격을 시도해보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한 평남국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이후 3차례 지속된 스페인의 패배는 필리핀 식민당국에게 무력을 포기시킨 이유가 되었고, 결국 무력 대신 상업으로 이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때 스페인에서 전해진 좀 더 진보된 총기와 건조공법 등은 평남국을 꽤나 준수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1759년에 평남국은 서양 현 지방을 합병하고, 광서 현 지방 역시 통치권 아래에 넣어 국토의 거대화를 맞이했다.

근대

19세기, 영국의 군함 한척이 난주 성 부분의 도시인 남시 시에 찾아와 정박을 요청한다. 이미 스페인과 교역하며 개항이 되어 있던 평남국은 영국군의 군함을 입항 시켜주는데, 그 군함에서 나온 400명의 병력은 남시 지역(현 난주)를 점령한다. 그 뒤에 들어온 3척의 영국 군함이 남시와 성도 근처로 향하자 결국 평남국은 영국에게 8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난주의 영유권을 판다.

평남국은 1823년에 근대 국가로서 거듭나겠다는 의지와 함께 국호를 평사국로 바꾸고, 난주와 가까운 난본 지역에 첫 공장을 세운다. 이때 평사국에 첫 지폐 도입이 있었고, 이는 ‘평사 파운드’ 라고 칭해지며 평사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평사국은 난주 지역 대학에서 영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개혁파들이 국왕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평사국의 1호 철갑 증기선인 ‘세화호’를 건조하였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기, 필리핀 함락 전에 사실상 가장 빠르게 함락된 큰 섬으로는 평사국이 제일 먼저였다.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영국 식민지로 꼬아서 평사국을 공격한 일본군 1만명과 전차부대, 또한 수많은 공군과 해군 앞에 평사국의 영국식 무장을 한 5000명의 평사국군은 전국에서 저항하나 결국 항복한다.

현대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게 난주를 돌려받고 공산화된 중국 아래에서 미국의 원조을 통해 반공 방패의 일부로 커진 평사국은 한국 전쟁에 병력 원조를 보냈으며, 베트남전에도 미국의 요청을 받고 미 해군의 정박권을 승인하며 참전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바로 그 다음해인 1992년 극좌 혁명파가 아닌 사회주의 정당을 용인했고, 1996년에는 중국과 수교하지만 2000년 중국의 첫 ‘중화 평사’ 사태로 단교하고 2001년 중화민국과 수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