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효강태자의 폐태자비 폐태자비 유씨 廢太子妃 柳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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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185년 | ||||||||
| 고려 양광도 충주목 충주궁 | |||||||||
| 사망 | 1210년 2월 15일 | ||||||||
| 고려 전라도 나주목 유배지 | |||||||||
| 재위기간 | 고려 태자비 | ||||||||
| 1205년 1월 28일 ~ 1210년 2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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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비는 성여열화하고 성급이한하여, 한번 노하면 좌우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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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씨는 역적 이저후와 역적 유설의 누이인 이저후비의 장녀이다. 일찍이 태자비에 책봉되었으나, 효를 몰라 왕후 김씨와 말다툼을 하던 중 그 출신을 들어 비방받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망언하여 태조를 능멸하였다. 이에 죄를 물어 폐출하고 궁 밖으로 내치니, 어린 태손이 홀로 남아 의탁할 곳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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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정녕 죽고자 함이냐?” 하니, 폐비 유씨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넋을 잃은 듯 광성을 내지르며 외치기를, “그러하옵니다! 신첩 또한 살 뜻이 없사오니, 어서 죽이소서!” 하였다. 그 형상이 미친 사람과 같고 말이 몹시 패악하여, 좌우가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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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효강태자의 비로 태자비에 책봉되었으나 이후 품성과 언행의 문제로 폐출당했고 끝내 유배지에사 부검으로 발견되어 왕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1]
생애
태자비 시절
유씨(柳氏)는 이저후의 장녀로 이름은 규(珪)이다.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며 효강태자의 배동으로 지냈고, 태자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성장하였다.
훗날 이저후가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 과정에서 이저후와 왕각이 피살되었다. 조정에서는 혼인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컸으나, 효강태자가 금상에게 간곡히 청하여 마침내 유씨를 맞아 태자비로 삼았다.
유씨는 효강태자와의 사이에서 왕태손 왕석을 낳았다. 그러나 출산 이후 후유증으로 울증을 앓게 되었고, 성정 또한 점차 급하고 다혈질적으로 변하였다. 이후 술을 가까이하였는데, 취기가 오를때마다 유모인 상궁 여씨가 태자비를 처소에서 못나오게 했는데 술주정이 매우 심해서 그랬던것으로 보인다.
비록 성정이 변하고 기행이 잦아졌으나 효강태자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효강태자가 중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태자비 유씨는 시어머니인 왕후 김씨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왕후 김씨와 태자비 유씨는 태자의 생명을 구하고자 은밀히 뜻을 함께하였다. 두 사람은 태자의 행적을 숨긴 채 만령전에 머물게 하며 극비리에 치료를 이어갔으나, 끝내 금상에게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여러 신료들이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고, 왕후 김씨 또한 중궁전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일에 깊이 관여하였던 태자비 유씨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이후에도 태자비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폐출당하다.
왕후 김씨가 중궁전에 유폐되어 있을 때, 유씨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한 금령을 무시하고 여러 차례 왕후를 찾아가 문안을 올렸다.
어느 날 왕후가 유씨를 보자 태자의 병세를 물으며 이르기를,
"태자의 위중은 어떠하냐?"
하였다.
그러나 유씨는 마치 태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인 양 말하였고, 이를 들은 왕후는 크게 노하여 꾸짖었다.
왕후가 분노하자 유씨는 조금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아무리 아드님이 병석에 누워 계시어 상심하셨다 하나, 벌써 노망이 드신 것이옵니까?"
하였다.
왕후는 크게 노하여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유씨는 세 차례나 이를 거역하였다. 끝내 궁녀들이 나서 유씨를 끌어내었는데, 유씨는 끌려 나가면서도 고려가요 「가시리」를 부르며 왕후를 조롱하였다.
이후 낙랑공 부부가 왕후를 문안하기 위해 중궁전을 찾았을 때에도 유씨는 다시 따라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이에 금상마저 직접 중궁전에 이르러 유씨를 꾸짖으며,
"참으로 포악하구나."
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씨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저 천박한 민녀[2]는 요조숙녀라 하고, 신첩만 포악한 여인이라 하시는 것이옵니까?"
하며 금상에게까지 대들었다.
이에 왕후 김씨가 유씨의 출신을 들어 역적 이저후의 딸이라 꾸짖자, 이미 이성을 잃은 유씨는 크게 소리치며 말하였다.
"네년의 아비는 무엇이 그리 잘났단 말이냐! 그렇게 따지면 태조대왕 또한 태봉국의 왕위를 찬탈한 죄인이 아니더냐!"
하였다.
이는 곧 태조를 능멸한 대역무도한 발언으로 여겨졌다. 조정은 크게 진동하였고, 금상은 노하여 유씨의 태자비 작위를 삭탈한 뒤 전라도 나주로 폐출하였다.
유씨가 나주로 유배된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 유씨는 유배지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조정에서는 검시를 행하였으나 죽음의 연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였다.
이에 관에서 인근에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이후로도 사람들은 그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을 전하였다.
여담
취기가 오르면 종종 궁궐 후원에서 고려가요 「가시리」를 부르곤 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궁인들 사이에서는 새벽마다 후원에 처녀귀신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퍼지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