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 로고 화이트.svg
역대 롯데 회장
1대
신격호
2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격호
辛格浩 | Shin Kyuk-ho
신격호.jpg
출생1921년 11월 3일
사망2020년 1월 19일 (향년 98세)
국적대한제국 (스펙터 유니버스) 대한국
본관영산 신씨
상전(象殿)
부모아버지 신진수 어머니 김필순
형제자매남동생 신철호, 신춘호, 신선호, 신준호
여동생 신소하, 신경애, 신경숙 신정숙, 신정희
경력롯데(일본) 대표이사 사장 (1948 ~ 2009)
롯데제과 대표이사 사장 (1967 ~ 1978)
롯데그룹 회장 (1978 ~ 2011)
호텔롯데 대표이사 회장 (1998 ~ 2016)
롯데쇼핑 대표이사 회장 (1998 ~ 2017)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 (2009 ~ 2019)
롯데홀딩스 명예회장 (2017~2020)
롯데그룹 총괄회장 (2011 ~ 2018)
롯데그룹 명예회장 (2018 ~ 2020)

개요

대한민국일본기업인. 롯데그룹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 신씨. 호는 상전(象殿),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1]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1세대 재벌 총수 중에서는 정주영과 함께 손꼽히는 자수성가 재벌이기도 하다.[2]

2020년 향년 98세 사망 전까지 대한민국 1세대 대기업의 기업인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출생과 일본으로

1921년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빈농인 신진수(辛鎭洙)의 5남5녀 중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 (현 언양초등학교)를 마치고[3]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1938년 졸업하면서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는데 주 업무는 양털깎기와 양돈 등이었고 박봉이었다.

부산 남포동광복동 일대에 머물며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신격호는 1941년 부인 노순화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신영자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성공하겠다면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도쿄에 도착해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달 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기회가 찾아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하나미츠(花光)라는 사람이 5만 엔[4]이라는 거금을 빌려주면서 공장을 해보라고 했다. 이 돈으로 전쟁통에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파되는 바람에 완전히 쫄딱 망했다. 다시 하나미츠에게 돈을 빌려서 다시 커팅오일 공장을 운영하는데 1년 반 뒤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고, 하나미츠도 살길을 찾으라 위로를 하며 거액의 투자금을 포기한다.[5] 진짜 자살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까지 몰렸으나,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땐 죽더라도 자신에게 거금을 빌려준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1946년엔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채까지 선물했다. 신격호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돈을 빌려준 하나미츠나 그런 그에게 빌린 돈을 갚고자 죽기살기로 노력해서 1년 반만에 갚고 집까지 선물해 주는 신격호나 대단한듯.

이후 신격호는 약간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리고 유지류나 특수고무같은 물질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시에 시판되고 있는 들을 죄다 사다가 한 번씩 다 씹어보고 각각의 껌들에 한두 가지씩 존재하는 장점들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그런데 신격호가 이렇게 개발한 껌이 인기가 엄청 좋아서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격호의 연구소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 이에 신격호는 투자자를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서 껌을 팔기로 했는데,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창립 시기 일본 정부가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한 '식품위생법'은 오히려 롯데의 성장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는데, 단속 당시 롯데껌이 타 업체보다 품질이 앞서서 공신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엔 신주쿠에 새 공장을 지었다.

당시 일본 껌 시장은 판껌 선두주자였던 '하리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주력 시장이던 풍선껌 외에 판껌 시장에도 진입해 1953년엔 하리스를 따라잡았고, 1960년대까지 미스롯데 선발대회(1953년)나 TV광고 같은 홍보매체를 적극 활용해 일본 껌 시장점유율을 70%까지 올렸다. 이렇게 승부를 결정짓게 한 계기는 미국 리글리와 천연 치클을 50:50 비율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1962년에 스위스 초콜릿 장인 막스 브락크까지 스카우트한 후 초콜릿 개발에 착수해내 1964년 '가나초콜릿'을 선보였고, 1969년엔 캔디, 1972년 아이스크림까지 각각 손을 댔다. 더 나아가 롯데애드, 롯데부동산, 패밀리, 롯데리아 등 계열사 설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국으로 오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당시 경제개발을 위해 해외자본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던 때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일본에서 제과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신격호 회장에게 정부가 외자도입법에 따라 지원을 해줄테니 고국에 투자하라고 권유했다. 이에 신 회장은 모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했고 1967년 4월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신격호 자신은 사장을 맡았고, 회장엔 유창순 전 경제부총리를 추대했다. 다음해 1968년에 두번째로 부산 거제동 출장소를 열어 사업을 확장했으며 롯데제과는 이미 일본에서 성공한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당시 해태, 크라운, 오리온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제과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1970년에는 껌과 과자 포장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하여 '롯데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고만고만한 제과회사로 그칠 뻔 했던 롯데의 명운이 바뀌게 된 것은 엉뚱한 사건 때문이었다. 1970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부정식품 단속 결과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이것이 롯데가 한국에서 급성장하여 재벌과 대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변변한 고급호텔이 없어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묵을 만한 장소조차 마땅치 않았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국격을 위해서라도 서울에 고급호텔이 하나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여건상 고급호텔 사업은 수지가 맞지 않다고 여겨 기업들이 발벗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때 롯데제과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구실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신격호 회장을 이용하여 호텔을 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정부는 롯데제과에 3개월 제조 정지 명령을 내렸고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신격호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 호텔을 지어 호텔사업을 하면 롯데제과의 정지 처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이라고 쓰고 지시라고 읽는다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맡고 있었던 손정목 교수는 이날을 '롯데재벌 탄생이 결정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롯데호텔 건립은 197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신 회장은 1973년 '호텔롯데'를 설립했고, 1974년 정부의 반도호텔 민영화 공개입찰에 롯데가 단독 입찰하여 낙찰받았다. 이후 김종필 국무총리와 양택식 서울시장이 나서서 롯데호텔 건설을 지원했다. 정부는 롯데호텔 부지 마련을 위해 정부 소유의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신 회장에게 매각했다. 정부는 신 회장에게 국립중앙도서관을 헐값에 매각한 후 남산 어린이회관(현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건물)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신 회장에게 부동산취득세, 재산세, 소득세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법적 근거는 외자도입법이었다. 신 회장이 일본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외자도입법에 근거하여 관련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하여 1979년에 '롯데호텔 서울'을 준공했다. 신 회장은 롯데호텔 건설 중에 롯데호텔 옆에 백화점을 짓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정부가 도심 과밀화 억제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던 때라 도심에 백화점 허가가 어려웠으나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쇼핑 시설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후 설계를 변경하여 당초 허가 때보다 훨씬 크게 지어 롯데호텔과 동시에 롯데쇼핑센터를 완공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건립하면서 롯데는 제과업에서 유통업, 서비스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유통업을 통해 롯데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1970년의 제조 정지 위기를 무사히 넘긴 롯데제과는 이후 급격한 매출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70년대 중반에 제과 시장의 최강자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인수합병을 통해 식품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1974년 칠성한미음료(현 롯데칠성)를 인수했고 1977년엔 삼강산업(현 롯데푸드)을 인수하였으며 1978년 롯데유업까지 세워 종합 식품사업군을 구축시켰다.

한편 1973년에는 일본 파이오니아사와의 합작으로 롯데파이오니아를 세워 카세트, 오디오 등 음향 전자기기를 생산했다. 1980년 출시한 오디오 파이오니아는 큰 인기를 얻었다. 80~90년대 대한민국에서 오디오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고가 오디오를 1대씩 장만하는 것이 유행했는데[6] 롯데 오디오는 인켈에 이은 국내 2위의 오디오 생산 업체였고 그 뒤를 태광, 아남 등이 이었다.

1978년 그룹회장으로 추대된 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창기 식음료사업군 중심에서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점차 바뀌었고, 1997년 차남 신동빈이 부회장이 되면서 2세 승계작업은 점차 속도를 더해갔으며, 무차입 경영을 고수해 외환위기 역시 비켜나갔다. 2007년엔 일본 (주)롯데를 '롯데홀딩스'로 출범시켜 기존 계열사들을 '투자법인'으로 만들어 사업부를 신 법인에 넘겼다. 2011년에는 신동빈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자신은 '총괄회장'으로 추대됐다. 2017년 6월 24일 오전 롯데홀딩스는 서울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임기가 만료된 신 총괄회장을 새 이사진에서 배제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주)롯데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롯데그룹을 창립한 지 약 70년 만에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7] 명예회장직을 대신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불명예 퇴진이나 다름없다.

  1. 당연한 얘기지만, 신격호는 전술했듯이 일본 국적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존재하는 본명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 특별영주권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법적으로 존재하는 본명일수도 있다.
  2. 1세대 재벌 중에서는 지주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병철, 조중훈도 있고 적산기업을 불하받아 재벌로 키운 사람으로는 최종건, 김종희가 있다. 조홍제, 구인회, 허만정 역시 만석꾼 자손으로 태어났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밑바닥부터 고생을 해가며 재벌의 위치까지 성장한 사례는 정주영과 신격호가 대표적이다.
  3. 학업성적은 57명중 42등
  4. 지금 가치로 무려 3억 엔 정도 된다. 한국 돈으로 30억 원 정도
  5.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걸 감안해도 오늘날로 치면 3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주고 못 받게 되자 오히려 채무자를 위로해주고 채무를 면제해준 것이다. 어찌보면 대인배.
  6. 당시 오디오는 자동차에 이어 두번째로 비싼 소비재였다.
  7. 일본 롯데 역시 지부로 격하되며 일본 롯데그룹은 소멸됐다. 신격호 회장이 만든 것들의 대부분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