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내전

월본의 역사
月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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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리 강의 기적
월본 내전
月本 內戰
날짜
1941년 12월 10일 ~ 1945년 8월 21일
장소
월본 전역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월본 왕국
영국
미국
중화민국
제2제국
일본 제국
나치 독일
지휘관구해민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장제스
구리하
조의치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아돌프 히틀러
병력월본 왕국군 50만여명
영국군 5만명
미국군 4만 5천명
중화민국군 5000여명
총합 60만명
전월본제국군 38만명
일본 제국군 4만 2천여명
. 나치 독일군 2100여명
총합 42만 5000여명
피해 규모23만 3000여명 사망19만여명 사망
결과
월본 왕국, 영국, 미국, 중화민국 연합군의 승리
기타
1945년 9월 시드니 조약으로 전월본제국-월본왕국 통일
무로-구리하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통일 월본의 군주로 계속 옹립
전월본제국 가담자 중 중요 인물 전범으로 처벌

월본 내전(月本 內戰)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월본에서 발생한 월본 왕국과 전월본제국간의 전쟁이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에 전월본제국의 보수강경파들이 우익 성향의 지역이 많던 남부에서 쿠데타를 선언하였으며, 이에 맞서 진보적이던 북부 지방과 중도적이였지만 반전 여론이 많던 중부 지방을 점유하고 있던 온건파들은 월본 왕국의 수립을 선언하며 전월본제국의 진압을 천명하며 월본 전역은 전쟁에 빠지게 되었다.

월본 왕국은 갑작스럽게 수립된 것이였고 물자와 병력도 수는 많았지만 장비의 노후와와 병사들의 질적 문제가 겹쳐 우수한 병력 자원이 많고 일본 제국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지급받은 전월본제국에 밀리기 시작하여 1942년 6월 수도 조번을 빼앗겼으며 9월에는 북부까지 밀리며 패퇴 직전까지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1942년 12월부터 전선을 가다듬고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 미국의 우수한 무기와 군사고문, 연합군의 파병 지원을 받은 월본 왕국은 다시 역습에 들어가 1943년 초부터 남진하였고, 12월에는 수도 조번을 탈환하였다.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제국이 쇠퇴하자 전월본제국도 함께 쇠퇴하였으며, 승기를 잡은 연합국과 월본 왕국은 공세를 지속해 1944년 중부 전역을 탈환하고 남부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1945년 3월부터 남부 주곤도를 최후방어선으로 삼은 전월본제국은 격한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곤도에서 소모전이 발생하며 양측간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8월 일본 제국이 항복하자 전월본제국도 함께 항복하였으며, 9월 시드니 조약으로 전월본제국과 월본 왕국은 통일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하여 월본의 지역 감정과 정치 성향이 심화되었는데,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적이던 북부는 월본 왕국의 기반이였고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보수적이던 남부는 전월본제국의 기반이였다. 이로부터 북부와 남부간의 지역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군사 정권 시절에는 남부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북부에 대한 차별을 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북부는 진보 성향의 정당의 텃밭이 되고 남부는 보수 성향 정당의 텃밭이 되는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중도적이였지만 반전 여론이 많았던 중부는 남북대립을 중재하고 정치에서도 캐스팅보드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