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당(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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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대의원 로고.png 유고슬라비아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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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야노비치 내각 
(2032~)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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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
 101석 
적녹연합 로고.png
적녹연합
 70석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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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당
 108석 
NU(Yugo).png
국민연합
 12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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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당
 9석 
재적의석  300석 

유고슬라비아 원로원 로고.png 유고슬라비아 원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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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SDP(Yugo).png
사회민주당
 33석 
적녹연합 로고.png
적녹연합
 6석 
야당
People's Party logo2(Yugo).png
인민당
 47석 
NU(Yugo).png
국민연합
 3석 
AP2(Yugo).png
행동당
 1석 
재적의석  90석 

People's Party logo.P(Yugo).png
Народна странка
한글 명칭
인민당
약칭
HC, PP
창당일
1881년 1월 8일 (인민급진당)
당명 변경
1945년 11월 30일
슬로건
Нека будућност Југославије блиста.
유고슬라비아의 내일이 더욱 빛나도록.
이념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왕실유지론
친유럽주의

내부계파 :

자유보수주의
사회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
우익대중주의
유럽회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대표
안테 파블로비치
대의원 원내대표
밀로시 요바노비치
원로원 원내대표
마르코 니콜리치
대의원 의원
145석 / 300석 (48.3%)
원로원 의원
41석 / 100석 (45.5%)
당색
보라 (#404371)
국제 조직
국제민주연대
청년 조직
신세대 인민당 (Народна странка нове генерације)
당원 수
534,902명

개요

100%
Нека будућност Југославије блиста.
유고슬라비아의 내일이 더욱 빛나도록.
인민당 슬로건

인민당유고슬라비아의 집권 여당이자 보수주의 정당이다. 사회민주당, 적녹연합(녹색 운동, 진보당)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3대 정당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세르비아 공국 시절인 1881년에 창당된 인민급진당을 공식적인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인민급진당 시절부터 현재까지 16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인민당과 함께 가장 유서가 깊다고 간주되는 사회민주당이 9명의 총리를 배출한 것과 비교하면 인민당이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바로 알 수 있다.[1]

지지기반

30대 이하

청년층은 진보정당을, 중장년층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반대의 상황이다. 1945년 티토의 집권을 시작으로 1990년까지 이어졌던 사회민주당 집권기, 일명 '사회민주당의 40년' 시기에 태어나 사회민주당 정권의 복지의 수혜를 입었던 50대 이상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우위이고, 40대는 경합, 30대 이하는 인민당이 우위로 나타난다.

크로아티아와 동부 지역

지역별로 보면 중산층의 비율이 높은 크로아티아와, 다뉴브, 모라바, 베오그라드, 제타와 같은 동부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다. 드라바도 중산층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기는 하나 사회민주당 우세 지역인 점이 눈여겨 볼만하다.

농어민, 자영업자와 중산층

중산층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의 높은 지지율과 맞물려, 중산층의 지지율이 상당하다. 이들은 주로 자영업자 혹은 개인사업자, 전문직 종사자들로서, 이들이 많이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와 베오그라드, 모라바 등지에서 인민당의 지지율이 높게 집계된다. 2028년 총선 당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도 중산층 사이의 인민당 지지율은 50%대로 나타난 반면, 사회민주당은 20%대, 높게는 30%대에 그쳤다.

농어민들의 지지세도 강하다. 동부의 농촌과 크로아티아, 제타의 어촌에서 인민당 지지세가 강한데, 이들은 본인 소유의 농지나 어선이 있는 개인사업가로 등록되어 있으며, 인민당의 감세 및 농어촌 보조금 정책의 수혜 집단이다. 50대 이상에서 사회민주당의 지지가 강하긴 해도 농어민 비율이 많은 65세 이상에서는 사회민주당과 비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왕실유지론자

왕실폐지론자의 지지가 강한 사회민주당과는 달리[2], 인민당 지지자=왕실유지론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민당 지지층 내에서는 왕실유지론자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보수 언론

  • Политика(Politika, 폴리티카): 1904년 1월 25일 창간 이래 일편단심으로 인민당만을 지지해온 신문이다. 인민급진당1938년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유고슬라비아 급진 연합에 가담했을 땐 지지를 철회했지만, 이내 반(反)연합전선에 가담하자 다시 지지 선언을 냈다. 또한 베오그라드와 모라바 유권자들이 즐겨보는 신문이다. 2030년 인민당 당대표 경선에서 루카 이바노비치를 지지하기도 했다.

역사

창당

기원으로 따지자면 18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외에서 교육을 받으며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세르비아 청년들은 헌법 개정, 언론의 자유 보장, 투명하고 열린 정치, 사법부의 독립, 교육 체계 개혁, 지방자치 보장을 요구하며 인민급진당을 창당했다. 1882년 크라구예바츠에서 열린 첫 당대회에서 프랑스 급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급진주의를 당 강령으로 채택했고, 니콜라 파시치를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민주주의와 대중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고자 당 기관지인 Samouprava를 창간했다. 그러는 한편 세르비아의 농민과 지방 중산층, 지식인을 주요 지지층으로 포섭하는 데에 성공했다.

티모츠카 반란과 시련

1883년 밀란 1세가 농민들로부터 개인 무기를 반납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자 이에 맞서 티모츠카 반란이 발생했다. 밀란 1세는 티모츠카 반란이 인민급진당이 농민들을 선동해 발생했다고 여겨 인민급진당을 탄압했다. 니콜라 파시치는 불가리아로 도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세르비아에 남아 있던 몇몇의 지도부와 당원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밀란 1세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급진파의 혁명 정신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밀란 1세와 타협하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결국 타협 끝에 1887년 일부 급진파를 사면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면 이후 니콜라 파시치는 마르코비치의 사상을 버리고 민족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1888년 헌법과 10월 헌법

민주주의의 확립과 개인의 자유 보장을 위한 인민급진당의 노력은 1888년 세르비아 헌법이 제정되면서 실현되었다. 이 세르비아 헌법은 의원내각제의 도입, 개인의 자유 보장과 지방자치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1901년 밀란 1세가 사망하면서 개헌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러시아는 알렉산다르에게 급진파와 타협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결과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헌법이 탄생했다. 한편 인민급진당과 세르비아 진보당[3]의 합동 정부 창설도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급진당의 노선에 반발하여 독립급진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1월 6일 독재와 또 한번의 시련

1926년 니콜라 파시치가 사망하고 아카 스타노예비치가 대표가 되었다. 3년 뒤 알렉산다르 1세가 당의 활동을 금지하고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는 1월 6일 독재를 선언하면서 인민급진당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스타노예비치는 알렉산다르의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보장을 촉구하기도 했다.

알렉산다르 1세 암살 이후 실시된 1935년 총선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그 다음 선거인 1938년 총선에 참가했다. 극우 성향의 유고슬라비아 급진 연합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크로아티아 농민당, 민주당 등과 반 연합(유고슬라비아 급진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사회민주당의 40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적극적인 항전 활동으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 종전 후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고, 1945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인민당은 정권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민주당의 40년' 동안 인민당은 만년 야당 신세를 지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피로감과 결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부지출로 인한 경제 악화가 원인이 되어 사회민주당 집권세력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자 인민당이 40년만에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판 메시치 총리는 정부지출 축소, 감세, 규제 완화 등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여 악회된 경제를 되살림으로써 인민당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현재

중간에 3년 간 사회민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긴 했지만, 2011년까지 약 20년을 집권했다. 조란 밀라노비치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2011년부터 2027년까지 정권을 잡으면서 인민당은 다시 야당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사회민주당이 스캔들로 실각하자 인민당이 다시 정권을 탈환했다. 말년에 비록 많은 말이 오가고는 했지만, 미하일로 페트로비치 총리가 국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무난하게 재집권에 성공했다.

페트로비치 총리의 뒤를 이어 루카 이바노비치가 2030년 12월 17일 총리로 공식 취임했다. 취임식에서 "안정과 신뢰의 국정을 이끌겠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직후 발표된 내각 인선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전임 내각의 인사를 유임시키는 한편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책에는 검증된 인사를 앉혀 '안정성을 중시한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고슬라비아 각지의 여론조사를 보면 인민당은 사회민주당과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간중간 좁혀지는 결과도 나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10%p 정도의 격차로 사회민주당을 누르고 있다. 사회민주당이 획기적인 전략으로 지지율을 급상승시키지 않는 한, 차기 총선 역시 인민당의 승리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역대 당수

다른 당과의 관계

의원 모임(계파)

인민당 계파 현황(찐막 수정본).png
인민당 3대 의원 모임

인민당 하원의원들은 의원 모임이라는 일종의 계파를 형성하고 있다. 크게 루카 이바노비치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자유주의 포럼, 미하일로 페트로비치 전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보수주의 그룹, 보스코 오브라도비치 의원을 의장으로 하는 드베리 파티의 3대 의원 모임이 있다.

자유주의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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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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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베리 파티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 드베리 파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대 선거 결과

  1. 다만 사회민주당 출신 총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이 약 7년 정도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2. 그런데 정작 사회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왕실 폐지를 주장한 적도 없을뿐더러 당 내에서 왕실폐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 아이러니
  3. 진보당과는 엄연히 다른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