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Союз Либеральных Совет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Liberal Soviet Republics
신소련 국기.jpeg
국기
신소련 국장.png
국장
국호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Союз Либеральных Советских Республик
상징국가소련 찬가
표어인민의 나라, 자랑스런 모국
Народная страна, гордая родина
국화카밀레
수도모스크바
자연환경면적(영토)21,999,443km²
인문환경인구279,210,000명
인구밀도12.7명/km²
공용어러시아어
정치국체민주공화제
정부형태이원집정부제
연방대통령예카테리나 일린
최고회의의장빅토르 마르쇼프
경제GDP$2,091,043,000,000
1인당 GDP$45,297
GDP(PPP)$6,133,584,000
1인당 GDP(PPP)$24,660
공식 화폐소련 루블(₽)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
시간대UTC +2~+12

개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위시한 9개국[1]의 소련 공화국들이 모스크바에서 신연방조약을 체결하여 탄생한 국가이다. 신연방조약은 1991년 8월 16일에 체결되었고, 이 날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구소련, 이후는 신소련이라고 부른다.

명칭

러시아어 : Союз Либеральных Советских Республик


벨라루스어 : Саюз ліберальных савецкіх рэспублік


우크라이나어 : Союз ліберальних радянських республік


타지크어 : Иттифоқи ҷумҳуриҳои Иттиҳоди Шӯравӣ


카자흐어 : Либералдық Кеңестік Республикалар Одағы


키르기스어 : Либералдык союздук республикасы


우즈베크어 : Либералдық Кеңестік Республикалар Одағы


투르크멘어 : Совет Азатлыкистик Республикалары Союзы


불가리아어 : Съюз на либералните съветски републики


아제르바이잔어 : Liberal Sovet Respublikaları Birliyi


라트비아어 : Liberālo Padomju Republiku savienība


리투아니아어 : Liberalų Tarybų respublikų sąjunga


에스토니아어 : Liberaalide Nõukogude Liidu liit


루마니아어 : Uniunea Republicilor Sovietice Liberale


영어 : Union of Liberal Soviet Republics


핀란드어 : Liberaalisten Neuvostoliittojen Liitto


체코어 : Svaz liberálních sovětských republik


슬로바키아어 : Zväz liberálnych sovietskych republík


폴란드어 : Związek Liberalnych Republik Radzieckich


한국어(표준어) : 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한국어(문화어) : 자유 쏘베트 공화국 련맹


중국어(간체) : 苏维埃共和国联盟

중국어(번체) : 蘇維埃共和國聯盟


다만, 여기서 주의할 건 구소련이나 신소련이나 똑같이 공화국들이 모여 만들어진 연방이므로 '자유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아니라 '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이 올바른 명칭이다.

역사

구소련의 몰락, 신소련의 건국

1985년, 경제침체로 매우 암울해진 상황에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고 그가 실시한 급진적 개혁은 구소련의 몰락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는 노멘클라투라의 문제점, 소련의 비대해진 관료화, 과도한 군비축적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서기장이 되기 전부터 소련 체제의 변혁을 주장하였다. 결국 노멘클라투라들은 1990년에 대부분이 청산되었고, 군비를 축소하고 다시 경공업에 투자한 결과, 소련은 경제침체를 겨우 탈출한다.

그의 정책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 사상 탄압, 언론 탄압 등 경찰국가주의의 폐기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 정치적 변혁 : 부패한 관료화 청산
- 소련 체제의 점진적인 시장개방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두려웠던 노멘클라투라들은 소련 공산당원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 내의 내부고발자에 의해 쿠데타는 물거품이 되었고, 분노한 고르바초프는 쿠데타에 연루된 노멘클라투라 90명을 전원 총살하고, 170여명의 공산당원들은 공산당원에서 해임시키거나 직위 해제, 추방까지 집행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8월 쿠데타 미수사건[2]이라 불리게 된다.

쿠데타는 미수로 그쳤지만 시도조차 소련 체제에 치명타를 가하기엔 충분하였다. 발트 3국을 시작으로 퍼져나가고 1989년 동유럽 혁명이 겹쳐버려 민주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화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1991년 3월,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투표를 실시하였고 1991년 8월 16일, 존속에 동의한 9개국을 모아 신연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69년간 제2세계를 지탱해온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는 민주화의 물결을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국, 인민 그리고 자유

1991년 9월, 소련 대통령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자유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으로 국명을 수정하였고, 점진적 시장개방과 군비축소로 경제침체를 점차 이겨나갔다. 그 후, 개혁에 동참한 당원들을 모아 소련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노멘클라투라 몇몇은 여전히 살아남아, 소비에트 공산당을 세워 현실사회주의의 회귀를 주장하고, 사민주의자들과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조국인민당을 창당하여 중도주의적 정책을 제시한다. 더불어 일부 극우파세력은 러시아 민족사회당을 만들어 러시아 제국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여 정치계가 난장판이 되어갔다.

이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91년 10월, 조국인민당원들을 수용하여 제1차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조국인민당 내의 분열로 연방사회당이 창당되면서 1차 연립내각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었다.[3] 가까스로 조국인민당과 연방사회당을 일시적으로 연합시켜 제2차 연립내각을 구성한다.

그러한 노력에도 정치계는 진정될 줄 몰랐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비에트 공산당과 연방사회당의 연합으로 제1당의 자리를 빼앗길 뻔하였다. 이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경제개발 7개년 계획(헬라오프 계획)을 실시하여 신소련의 경제를 다시 끌어올리고 지지율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헬라오프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경제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실시되지 못했다. 결국 임기 동안 충분한 결과를 내보이지 못했고, 여론은 점차 야당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 결과, 1993년에 진행된 총선거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겨우 20.81%에 그쳤고, 오히려 최근 소련 사회민주당에서 연방사회당으로 옮긴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이었다. 그는 52.90%을 기록하며 제2대 소련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끝내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원하던 소련의 변혁을 끝까지 이루지 못한 채 권력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불안한 새출발과 위기

1993년 7월, 제2대 대통령이 된 보리스 옐친은 즉시 국가개헌위원회[4]를 설립하여 강력한 권한이 주어지는 대통령제로 개헌하려 했고 최고기구 등 연방정부와 소련 민주사회당, 여당조차 그런 행위에 대해 위헌행위라며 저지하려했다. 하지만 옐친은 강행했고 투표에 부쳤다. 투표에서 패배하자 옐친은 아예 연방해체를 각오하고 군을 동원하여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군부는 완전히 정부의 편으로 돌아섰고, 최고기구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탄핵을 연방헌법재판소에 소추하였고, 10인 중 8인의 과반수 동의로 보리스 옐친은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당한다.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보리스 옐친은 일부 급진파 민병대를 동원하여 스몰렌스크를 점거하여 러시아 공화국을 세웠으나, 스몰렌스크 시민군과 신소련군의 합동공격으로 러시아 공화국은 허무하게 일주일만에 붕괴되고 보리스 옐친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보리스 옐친은 신소련 최초로 <최소기간 대통령>이라는 비웃음 받을 닉네임을 얻으며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5] 그러자, 고르바초프가 다시 재조명받았고 보리스 옐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국민의 지지에 따라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국가개헌위원회 출신 인원 일부를 정권에 기용하여 법률적 기반의 강화를 꾀했다. 동시에 할 수 없었던 헬라오프 계획을 전국적인 국민의 지지로 실시하였다. 의외로 그의 방식은 먹혀들어갔고, 헬라오프 계획은 신소련의 경제력을 구소련 전성기 시절 1/3 수준까지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더불어 1993년 9월, 동유럽 순방을 실시하여 신소련의 쇄신을 약속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서는 프라하의 봄과 헝가리 혁명의 강경진압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임기가 끝날 무렵의 1997년,[6] 조국인민당 소속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점차 급부상해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정책, 지도자, 연방

1997년 8월, 총선거에 따라 제3대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은 42.08%로,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강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두뇌로 옐친보다 큰 지지를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최고회의의 발언권을 낮추기 위해 인민회의의 의석수를 늘리고 다소 높은 우선순위를 지정했다.[7] 다행히도 최고회의에서 큰 반발은 없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고회의의 수준이 추락할 것이라 여긴 최고회의의장 이반 골로포프는 반푸틴운동을 실시했고, 거기에 소비에트 공산당이 개입하여 소련 복권 운동을 전개한다.[8]

그러나 이러한 전개를 대비하여 푸틴 대통령은 과거사건을 기반으로 사후대처방법을 모두 마련해두었고 역으로 모스크바 시민항쟁[9]을 일으켜 소련 복권 운동 세력을 축소시켰다.

그에 따라, 민심이 푸틴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날리기 시작했고 이반 골로포프는 점차 지지기반을 순식간에 빼앗겨갔다. 결국 푸틴 대통령은 최고회의에 상정하여 이반 골로포프를 최고회의의장직에서 파면시키고 새로운 의장을 취임시킨다. 권력을 한순간에 잃은 이반 골로포프는 모스크바 대혁명이라는 허황한 꿈을 쫓다 1999년 4월 20일, 의문사당한다.

소련 복권 운동을 쉽게 제압한 푸틴 대통령은 여태까지 줄여왔던 군비를 더 축소시켜 각종 공업단지에 투자하여 군비에 의한 생산력 저하를 극복하려 하였다. 거기에 노멘클라투라들의 회사, 부지를 압류하여 국비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대중적인 지지로 묻혔다.

그 후, 이러한 행보에 친소세력들이 몰도바,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에서 다시 권력을 잡아갔다. 이에 발 맞춰, 푸틴 대통령은 1999년 5월 3일에 신소련을 위시한 정회원국 5개국[10]과 준회원국이나 참관국으로 가입한 7개국[11]으로 구성된 모스크바 조약기구를 설립한다. 그러나 EU와 NATO의 부단한 노력으로 모스크바 조약기구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신소련과 EU 회원국 사이에 10일의 열띤 토론이 거쳐진 결과, 모스크바 조약기구는 '유럽 다자안보협력 동맹' 으로 개칭되어 비록 유럽 연합이라는 같은 세력 내에 있지만 친러파와 친서방파가 협력하기도 대립하기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영광스러운 모국을 위하여!

2002년 8월, 블라디로프 푸틴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포퓰리즘 정책을 중심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2007년, 아무런 문제 없이 조용히 임기를 마친다.

2007년 8월, 제6대 대통령 이반 네르도프스키(Иван Нердовский)은 노멘클라투라와 부패한 관료들을 강력히 처벌하기 위해 재민영화,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정책에 따라, 전국의 노멘클라투라 47명이 무산시민으로 몰락하였고 정경유착, 뇌물 등 각종 범죄에 적발된 60여명의 관료들을 직위 해제시키고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그 반발력으로 보수주의 세력이 크게 결집하여 소비에트 공산당이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는 이반 네르도프스키 대통령에게 이어졌고, 소비에트 공산당은 다시 한번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자, 소비에트 공산당 내부에서도 보수파(현실사회주의)가 힘을 잃기 시작하고 중도파(마르크스주의)진보파(사민주의), 비주류(트로츠키주의 등)가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결국 소비에트 공산당은 당 내에서 힘을 얻기 시작한 진보 빅텐트의 대거 탈당으로 힘을 급격히 잃었다. 그 후, 진보 빅텐트는 연방민주당을 세웠으나, 결국엔 힘을 합치기 위해 연방사회당과 합당하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그 결과로, 연방사회당은 세력이 커지게 된다.

그 인기에 힘입어 이반 네르도프스키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고, '재민영화, 재분배 정책' 을 유지하여 연방 정치계를 싹 갈아엎게 된다. 덕분에 연방은 수많은 행정력을 잃었지만 그에 반하여 우수한 인재들을 무수히 영입할 수 있었다. 이후 최고회의는 고르바초프에게 요청하여 그에게 소련영웅훈장을 수여하였다.

2012년 8월,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니콜라이 멜라모비치(Николай Меламовичи)는 이반 네르도프스키와 같이 네르도프스키 개혁파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러 의혹들에 연관되며 대통령 자질에 관해 여러 의견들이 돌았고, 결국 한 일도 없이 2017년에 내려온다.

2017년 9월, 제8대 대통령 예카테리나 일린(Екатерина Илин)이 당선되어 현재까지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 8월 20일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프라하의 봄 50주년 추모식에 방문하여 추모사를 하고 정중히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4일 뒤, 헝가리로 이동하여 회담 중에도 "헝가리 혁명의 강경진압은 풀뿌리 민주화를 박살내버린 슬픈 역사였다. 너무 늦게도 이제야 사죄하는 것에 나 자신에게 유감스럽다." 라며 정중히 사죄했다. 이후 독일이나 폴란드 등 과거 구소련 영향력 내의 각국의 역사학자들을 모아 역사공정화위원회를 추진하였다.

상징

국기

신소련 국기.jpeg
신소련의 국기는 구소련의 국기와 다르지 않다. 다만, 색깔이 조금 옅어졌고 낫과 망치가 사라지고 3개의 별이 있다. 3개의 별은 연방(신소련), 유럽권 대표국(러시아), 중앙아시아권 대표국(카자흐스탄)을 의미한다. 일부 사람들은 오성홍기와 닮았다고 하나, 별 모양 자체가 구소련에서 쓰이던 별이기에 전혀 다르다.

국장

신소련 국장.png
국장은 밀과 별을 제외하면 전부 싹 바뀌었다. 거기에 밀과 별 색깔도 더 밝아졌다. 가운데 큰 별은 연방(신소련)을, 스타 서클은 연방의 소속국(아니면 동유럽의 패자)을 의미한다. 두 문장은 각각 Наша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자유로운 우리의 조국), Нация одного народа(하나된 인민의 나라)라는 의미다.

자연환경

국토

신소련 영토.jpeg
영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세계 1위이다. 간단히 생각해도 러시아 하나만으로도 1위를 달성하지만, 세계 9위 카자흐스탄을 포함하여 여러 국가가 합쳐졌으니 면적으로는 따라올 국가는 전 세계에 없다. 애초에 발트 3국과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면적이 작아 큰 영향이 없었다.[12]

대체적으로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등 대도시 집중현상이 주를 이루지만, 시베리아는 과거 스탈린 정부때부터 이어져 온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토지개발을 개시하고 이주를 도모한지 이제야 반세기라 큰 발전이 없긴 하다.

자원

비중동권 산유국 중 1위이다. 이란과 이라크의 2~3배에 달하는 생산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오일머니, 그리고 원자재 수출로 먹고 산다. 다만 석유의존도가 높아 치킨게임이라도 터지는 날에는 석유값이 폭락해서 경제가 저하되기도 한다.

행정구역

자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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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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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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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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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카자흐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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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타지크 소비에트 공화국

자유 타지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참고할 것.

자유 우즈베크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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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키르기스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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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투르크멘 소비에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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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인 사회주의화를 이루려는' 사회민주주의로 이념노선을 교체하였기에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된다. 다만, 소련식 구조를 타파하진 않아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국가와는 조금 다른 점을 지닌다.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한 결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하면서 집단지도체제와 일당독재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런데 소련 대통령의 대척점에 최고회의의장이 서면서 아예 권력분할화를 하게 되어버린다. 즉 소련대통령은 행정부를, 최고회의의장은 최고회의(상원)과 인민회의(하원)를 대표하여 상호견제하고 도리어 사법부 그 둘을 중재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삼권분립이 일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반 네르도프스키 대통령의 재민영화, 재분배 정책에 따라, 최고회의의장이 정권을 쥐고 소련대통령은 비상사태시 개입하는, 정상적인 궤도에 가깝게 구성이 변경되었다. 그 덕분에 올바른 삼권분립이 성사될 수 있었다.


•최고회의와 인민회의?
본디 소련의 국회와 정부는 최고회의(입법부)와 장관회의(행정부)로 나뉘었지만, 연방국가중앙평의회[13]가 구성되자 양원제를 도입하여 최고회의가 상원의회로 변경되었고 기존의 최고회의를 대체하기 위한 하원의회로 인민회의가 구성된 것이었다.


•소련식 민주주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민주주의 도입 초기에 소련식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하였다. 당연히 북유럽식 사민주의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경제발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외화를 벌어온 것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 약간 틀어진 방향으로, 이반 네르도프스키 대통령때에 북유럽식 사민주의 + 소련식 공산주의 정책을 끼얹은 소련식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 그의 정책에 의해 정부구성 자체에 변화가 생겼지만 완전한 민주국가로 탄생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이반 네르도프스키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구소련 훈장, 소련영웅훈장을 수여받는다.

경제

신소련 초기에는 여전히 군비가 정부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에 실업률이 40%에 육박하고 경제발전에 투자할 돈이 부족했지만, 최근에 들어서 군비축소가 빛을 발하여 경공업을 중심으로 공산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공산품 수출로가 열렸지만 아직은 크기가 작아 효과는 알 수 없다.

이반 네르도프스키 대통령의 정책에 따라, 군비가 60% 미만으로 대폭 감소하여 공산품 생산에 필요한 설비지원비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실업률 또한 19%까지 감소하였다.

이미 자연환경/자원 칸에서 서술했다만, 수출품 대부분이 원자재와 석유이다보니 그만큼 석유의존도가 높고 앞으로도 의존도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군사

구소련 최후~신소련 초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군비축소는 군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막 줄이기 시작한 시점이라 T-72와 같은 구형전차들도 많이 분포해있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한 강경한 군비축소로 대부분 구형전차가 Т-80을 이룰 만큼 구형장비를 재활용하기도 하였다.

외교 및 안보

신소련은 구소련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구소련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현재, 미국과의 관계는 상당히 진전되어 베링 해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과의 수교관계도 회복했다.

다만 중국과는 여전히 중소분쟁의 씨앗을 완전히 해결짓지 못했지만, 니콜라이 멜라모비치 대통령은 카잔 중소회담을 열어 중국에 대해선 완전히 마음을 연 상태다. 대만 또한 수교를 맺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타이베이 대표부(주 타이베이 외교공관부)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과는 고르비초프 시대에 수교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남북한 통일협상에 니콜라이 멜라모비치 대통령이 중재를 맡아주기도 했으며, 남•북•러 3국 철도 공사계획을 따내는 등 여러 수출로를 열어두어 장기적으로는 신소련에 이득을 취했다. 다만, 현재에는 북한의 행보가 불안하여 예카테리나 일린 대통령은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과 싱가포르의 북미정상회담을 지키지 않는다면 단교도 불사하겠다." 라며 북한에 대해 조건부로 강력한 대북제재를 가한다는 압력을 가하였다.


그리고 현재 신소련은 '유럽 다자안보협력 동맹'의 맹주로 있으며, 아직까지 동유럽과 북아시아권, 중앙아시아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권에서도 일부 국가(시리아, 이란 등)에서 친러정권이 세워지는 등 여전히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위력이 남아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미국과의 수교로 곧 옛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사회

신소련의 공용어는 러시아어다. 단, 공용어가 러시아어인 것은 고르바초프 시대부터이며 구소련 시절 그대로 각각의 공화국에선 각자의 언어를 혼용해서 쓴다. 예로 들어, 자유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지만 벨라루스어를 혼용한다는 것이다. 아예 자체적으로 자국어를 공용어화 시킨 경우도 있다.[14]

푸틴-네르도프스키로 이어지는 대개혁시대에 힘입어 탈퇴한 국가들 사이에서도 친러정권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푸틴은 실제로 모스크바 조약기구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버금가는 동유럽 연합체제를 구상하려 했으나, ЕU의 끈질긴 협상으로 EU 편입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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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개국은 현재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가리킨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행정구역 문단을 참고.
  2. 1990년 5월에 보리스 푸고, 야나디 겐나예프 등을 위시한 소련 보수파는 여러 노멘클라투라, 공산당원과 접촉하여 정경유착 이후 쿠데타로 소련의 사민주의화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공산당원 중 한명이 밀고하여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었다. 결국 정경유착으로 확실한 90여명과 의심자 163명의 노멘클라투라와 겐나디 야나예프, 보리스 푸고 등 연관된 고위공직자 전원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밀고자였던 그 공산당원은 KGB에 배속시켜 정보공개가 기밀에 부쳐졌고, 나머지 연관된 공산당원들은 전원 공산당원 권리를 박탈하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렸다.
  3. 조국인민당서 사민주의 진영은 급진적인 성향을 띠며 자유주의 진영과 대립각을 세웠다.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끝내 의견은 좁혀지지 못하고 사민주의 진영이 연방사회당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4. 보리스 옐친이 급조한 위원회로, 실질적으로 연방정부 소속은 아니며 그가 급진적으로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 활용하려 했던 대통령 직속기구다. 그러나 1993년 7월 29일에 발생한 1993년 헌정 위기로 위원회는 옐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진해산하였다.
  5. 그는 1993년 7월 12일에 취임하여 1993년 8월 12일에 탄핵당했다. 정확히 2개월이 걸렸다.
  6. 1993년까지는 초대 대통령을 제외한 이후부터는 4년 단임제였으나, 1993년 헌정 위기 이후엔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따라 제3대 대통령부터 5년 중임제로 운영된다.
  7. 당시 최고회의(상원)는 소련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의회기관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가 자신의 정책실현에 방해될 것이라 생각한 푸틴은 인민회의(하원)의 의석수를 늘리고 높은 우선순위(발언권, 투표우선 등)를 부여하여 [ 최고회의<->대통령<->인민회의 ] 순의 3자구도를 구축하였다.
  8. 다만, 소련 복권 운동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미하일 페트로비치에 의한 1994년 필리버스터 분쟁, 니콜라이 게라모프에 의한 1992년 키예프 노동자봉기 등 연방 각지의 지지자들을 모아 구소련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이 진실이지만(...).
  9. 1998년 2월, 푸틴과 연방정부를 중심으로 이반 골로포프의 소련 복권 운동에 맞서 연방유지를 주장하는 전 세력의 대규모 시위•집회.
  10. 신소련,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11.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12. 신소련 다음으로 큰 나라인 캐나다가 9,984,670㎢이니 이미 말 다한 셈이다.(...)
  13. 1992년 8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명령으로 정치위원 알료나 토스타나야에 의해 실시된 알료나 개혁이라 불리는 일련의 정치개혁으로 장관회의가 대통령 산하의 자문기구로 승격되어 이름이 변경된 것.
  14. 대표적으로 자유 카자흐 소비에트 공화국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