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 拜火敎
مزدیسناㅣ Zoroastrianism
100%
계통 인도-이란 계통의 종교
└ 이란 계통의 종교
유형 일신론
유일신교
창시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
창시 시기 기원전 1800년경 ~ 기원전 640년경
페르시아
규모 약 12만 명[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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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유적의 파라바하르 부조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또는 배화교(拜火敎)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며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2]일신교로 꼽힌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보면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두고 이원적으로 세상을 보는 단일신교에 해당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배화교'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묘사한 이들의 모습이 주로 을 숭상한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실제로는 조로아스터교도가 하루에 5번 진행되는 의식을 신성히 여기기 때문에 의식에 쓰이는 성화를 보존하려고 한 것이지, 토속 신앙에서처럼 불을 숭배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이란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란 국민들에게는 전통적인 페르시아를 상징하던 유서 깊은 종교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현재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묻히게 되어 조로아스터교를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히려 본고장인 이란보다 저 멀리 유럽에서 더 인기가 많을 정도.[3]

경전은 아베스타이다.

신화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png 자세한 내용은 이란 신화 문서에서 참고하십시오

역사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Zaraϑuštra, 조로아스터)가 세운 종교라고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자라투스트라에게서 유래한다. 본래 이름은 아베스타어로 '자라수슈트라(𐬰𐬀𐬭𐬀𐬚𐬎𐬱𐬙𐬭𐬀Zaraϑuštra)'인데, 이게 그리스에서 전사라는 뜻의 '조로아스트레스(Ζωροάστρης, Zōroastrēs)'가 되었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되었다. 창시 시기와 자라투스트라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550년경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다.[4]

고로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연구는 창시자로 알려진 자라투스트라의 생년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자라투스트라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9세기 말까지는 소위 '전통적인 연대'라고 하는 기원전 6세기의 주장이 지배적이었으나 19세기 말 이후부터 바르톨로메아(Bartholomea)와 크리스텐센(Christensen)과 같은 학자들이 '전통적인 연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자라투스트라의 글로 알려진 가타스의 고대 아베스타 언어와[5] 리그베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가타스와[6] 리그베다의 언어가 비슷한 시기의 언어라고 주장했다.[7] 즉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중 가장 오래된 언어로 쓰여진 가타스부분은 인도 브라만교리그베다[8]보다 기원이 오래되었다는 주장이다.[9]

다만 이런 언어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아베스탄어에 대한 자료가 조로아스터교 자료 외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아베스탄 문자 자체가 4세기 사산제국 당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조로아스터 경전과 노래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아베스탄 언어는 그 이전에도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로아스터교 자료 외에는 이에 대해 현존하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살아남은 아베스탄 문자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88년경 자료이다. # 물론 이 부분은 이 주장의 타당성 문제라기 보다는 고고학적 연구의 한계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봐야 한다.

2. 구 아베스탄어의 기원 시점을 확실하게 입증할 증거가 없다
1번 문제와 함께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남아있는 구 아베스탄어(Old Avestan)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가타스 뿐인 데다가, 이 언어가 구 아베스탄어이고 신 아베스탄어(Young Avestan)와 구분되는 이전 언어라는 근거는 Vedic 산스크리트어와의 발음적 유사성 뿐이다.[10]

하지만 기원전 7세기 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없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로아스터의 활동시기에 대한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서 제1천년기 초 사이이다.[11]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창시와 전파

창시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생몰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기원전 2000년에서 600년으로 다양하다. 이란 동부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하며, 박트리아 출신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는 안정적 통치를 위해 토착종교와 관습을 용인하는 태도를 견지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이란계 종족들의 범위 이상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일부 소수민족들은 출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다. 특히 미트라 숭배는 헬레니즘 세계를 거쳐 이후 로마 제국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사산 왕조 시대

이 추세가 반전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이다.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때 파르티아 동부에서 번영했던 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중동에서 몰락했다.[12] 이후 제국의 정통 교리에 반하는 마니교,[13] 마즈다크교 등이 등장하여 세력을 늘리거나 고위 성직자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으로 몰려 탄압당했다.

사산 왕조 시대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제국 영내에서 국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로아스터교 교리가 폐쇄적으로 배타적으로 변하면서 사산 제국 영토 바깥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를 무너트리는 시점에 등장한, 기독교와 유대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자이나교를 혼합한 마니교가 기존 조로아스터교 대신에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궤를 같이 한다. 아나톨리아와 유럽 지방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과 달리 이란은 모든 영토가 궁극적으로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했고, 사산 왕조의 국가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슬람 시대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사이의 악연은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니샤푸르에서 의학을 배워와서 메카에 병원을 차린 안 나디르 빈 알 하리스(An Nadhir Ibn Al Harith)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카야니아 왕조[14] 연대기에 나오는 에스판디야르 왕이나 로스탐 신화를 들려준 후

“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는 바드르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관대한 처우[15]가 내려졌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바로 참수당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은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동로마 군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를 격퇴하자 이를 매우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아랍 정복자들도 페르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상 유대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꽤 남아 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 취급 받던 마즈다크교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 우선주의, 비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 부과, 그리고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아바스 왕조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릴 때 이란의 비 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튀르크화와 순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아래 서술할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16]

현대

중국 산시성 진중시 관할 제슈시에 남아있는 옛 조로아스터교 사원 건물.webp

중국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 관할 제슈시(介休市 개휴시)에 남아있는 옛 조로아스터교 사원 건물.

현재도 적게나마 신자가 있다. 이란, 인도,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밴드 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으로 유명하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이슬람 극단주의에 질린 쿠르드족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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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즈드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아타쉬 베람(2).webp

야즈드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아타쉬 베람(آتش بهرام): 우측의 불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이던 470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 한다.[17]

이란에서는 2011년 인구조사 결과 2만 5천 명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하며, 중부 야즈드(Yazd) 지역이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성전 아베스타는 대략 전성기의 20분의 1 정도 분량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은 분량만 해도 꽤 많고, 조로아스터교는 아베스타 이외에도 중세 시기에 작성된 여러 문서도 함께 사용한다.

1906년의 페르시아 헌법 규정에서는 의회 의석 중 겨우 1석을 반드시 조로아스터교도에게 할당하도록[18] 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란 혁명 이후인 지금도 유효하다. 팔레비 왕조의 국가인 <황례포>의 3절에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들어가 있다.

호메이니는 조로아스터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조로아스터교가 과거 대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점이 있어서 팔레비 왕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1971년 페르시아 건국 2500년 제전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이 대표처럼 나온 적이 있었는데 수구 이슬람주의자답게 이걸 이단 행위라고 욕하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서야 그냥저냥 공존하게 놔두었다. 그러나 차별과 박해는 존재했고, 2000년대 이후에 망명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한때 부활 운동이 펼쳐졌었다. 워낙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종교이기도 해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조로아스터교 부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현 이란인들이 과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때는 엄청난 기세를 보였지만, 이란 지도부에서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그냥 별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인도

인도로 피난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소수민족 집단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의미)가 되어 잔존하게 된다. 힌두교 신자들은 이들을 카스트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이들은 인도의 지배종교인 힌두교와 대립하지 않기 위해 교리에 일부 규정을 더하였는데, 현재 그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파르시파르시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만이 파르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이 규정을 계속 지킬 경우 현대 사회에서 파르시는 2, 3세대 안에 거의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때문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개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생활방식이 서구화되고 뭄바이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은 파르시들은 출생률도 낮아 인구가 감소중이다.

파르시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인도의 여러 민족 중에서 파르시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익힌 덕분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근현대에 와서 이들의 상권이 더 강화되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 그룹 타타 그룹을 소유한 타타 가문이 파르시이다. 재규어와 랜드로버도 타타 모터스 소유이다. 타타 모터스뿐만 아니라 타타 그룹 자체가 농업에서 항공우주 산업까지 안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인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영국의 전설적 록그룹 프레디 머큐리 역시 파르시 혈통이었다.[19] 그리고 피아노 분야에서 가장 난해하고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남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도 파르시였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는 이란에서 영국령 인도로 떠나는 추가 조로아교도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이라니"라고 불리고 있다. 통계상으로도 다르게 집계되고, 파르시와 이질감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기 때문에 통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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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는 흔히 을 숭상한다 하여 배화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불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도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하루 5번의 예식에 쓰이는 성스러운 불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창조자의 피조물인 공기, 땅, 불, 물,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런고로 당시 유행하던 짐승을 죽여 피로 땅을 더럽히는 제사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는 것, 식물성 마약에 취해서 마음을 더럽히는 것 모두 금기시한 것이다. 불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이유로는 사산 왕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식의 '성상 파괴'가 일어나서 예술로 쓰이는 것 외에 종교 의식에서 성상을 쓰는 것을 금지하고 불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0]

시체로 불이나 땅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화장을 기피하고,[21] 조장(鳥葬)을 선호하고 있다. 언덕에 벽돌이나 돌로 쌓고 시체를 안치할 받침대를 설치한 '다크마(dakhma)'라는 8m 정도 높이의 장례용 탑을 만들고, 대머리수리들이 시체를 뜯어먹게 하면 깨끗한 뼈만 땅으로 떨어진다나. 문제는 환경오염으로 조장에 쓰이는 대머리수리의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본고장인 이란에서는 이슬람 정권 수립 이후 금지된 장례법이어서 이 풍습도 위협받는 중.

주신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종교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울의 양면으로 해석되는 "이원론적 일신교 종교"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고, 악과 어둠은 선과 빛에게 결국 패배하게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적극적인 자유 의지로 단순히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에 맞서서 투쟁할 것을 주문한다. 영적전쟁 개념과 다소 비슷하다. 또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신화의 여러 신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신은 여럿 있지만, 결국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만물의 주인, "주신"은 오직 아후라마즈다/오르마즈드뿐이다. 조로아스터교 내의 다른 신들은 유일신인 아후라마즈다를 돕는 보조적인 신이자 선한 영으로, 기독교의 천사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22] 다시 말해 조로아스터교는 비록 고대의 다신교적 성격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다.

현재 남아있는 아베스타를 보면 평화와 화합, 도덕적 생활을 통한 번영을 중시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에피소드가 자라투스트라의 방문을 받은 마을이 거지처럼 못살다가 자라투스트라의 지도를 받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목축민과 유목민적인 성향이 많이 반영된 유대교와는 달리, 농민과 도시민의 성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베다 종교(브라만교, 힌두교)와 대비되는 경향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하는 신심은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세가지의 좋은 행동, 즉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 애초에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즉 아후라마즈다의 길을 따른다면 좋은 생각이 곧 좋은 말을 낳고, 다른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본다.

유일신교

사람들이 조로아스터교에 대해 혼란을 겪는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앙그라 마이뉴라는 각각의 존재에 의존해 펼쳐지는 것이 이 세계인데 왜 유일신교라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로아스터교 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존재인지가 조금 갈리는 듯하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관점에서는, 악의 힘인 앙그라 마이뉴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창조주이자 선의 힘인 아후라 마즈다가 나중에 그의 존재를 눈치챈다. 왜냐하면 창조는 그 자체로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교라고 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의 힘에 패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숭배한 대상은 오로지 아후라 마즈다뿐이었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사탄이 등장한다고 해서 유일신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조금 더 강한 사탄이라 할 수 있는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가 유일신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우에는 피조물이 타락한 경우이지만 앙그라 마이뉴의 경우에는 애초에 피조물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유일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빛이 승리하고 아무리 악이 날뛰어도 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앙그라 마이뉴와 동급의 존재는 스펜타 마이뉴다.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나온 쌍둥이로 각각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 후대에 오면서 스펜타 마이뉴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변화된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아후라 마즈다의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는 선의 길을 택하고 앙그라 마이뉴는 악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후라 마즈다하고 앙그라 마이뉴가 쌍둥이 영이라고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만든 것이 주르반이라고 말한다.

관련 사이트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앙그라 마이뉴가 창조된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대에 들어서 종교의 교리가 바뀌거나 아니면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프라쇼케레티

프라쇼케레티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종말론이다. 현재 알려진 종말론 중에 가장 오래된 종말론으로 기원전 500년 이전에 성립되었으며, 아브라함계열의 종말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거대한 운석이 추락하고 그 열로 모든 산에 묻혀있던 금속들이 녹아 강을 이루어 흐르고 이로써 세계가 멸망한 후 다시 세상이 시작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파생 종파

대충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워낙 오래된 종교라서 시대에 따라 교리나 사상에 변화가 많고, 이단 종파나 분파도 많다. 특히 이슬람의 침략 이후 신자들의 수가 격감하여 그 전통이 매우 약화된 탓이 크다.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페르시아의 토착 신앙과 구분되기는 하나 일부 신들은 그 연장선상에 있고, 향후 수백 년간 나타난 여러 다른 종파와도 모호하게 구분된다.

  • 주르반교: 주르반교는 흔히 "쌍둥이 신"이라고 설명되는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세계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면, 그 동등한 쌍둥이를 만들어 낸 태초의 존재가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형성되었다. 시간과 관련된 신이었던 주르반이 바로 그 태초의 존재라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르반 항목 참조.
  • 미트라교: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하위신 가운데서 미트라를 특히 높이 보고 숭배하는 종파. 미트라교에서는 미트라를 아후라 마즈다와 동격, 혹은 아후라 마즈다의 계승자로 본다.
  • 마니교: 페르시아 출신의 예언자 마니가 조로아스터교에 불교, 기독교, 유대교 교리 등을 접목시켜 창시한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훼손시킨 변종 이단으로 간주되어 조로아스터교 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주류로부터 탄압받으며 키운 맷집 덕분인지 이슬람 칼리프조 시대에도 주류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압바스 칼리프조 시절에도 이슬람에 맞서 마니교를 대놓고 전교하고 다녔으며, 마니교 선교사들과 이슬람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중세 무타질라 학파[23]의 시발점이 되었다.
  • 마즈다크교: 5~6세기경 살았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마즈다크가 내세운 조로아스터교의 개혁 운동. 종교적으로 주류 성직자들과 대립하는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대귀족들을 공격하고 재산의 공동 소유 등을 주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재산의 공동 소유 교리에는 배우자를 공유해야 하는 사항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 귀족들의 하렘을 습격해서 여자들을 납치해서 마즈다크 교단에 편입시킨 사건 이후 결국 호스로 1세 치세에 이단으로 몰려 거의 절멸당했다.

  1. 신자의 대부분은 인도·이란 지역에 거주 중이다. 다만 이란의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로 인해 신자 수가 적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2. 가장 오래된 유일신 신앙은 이집트의 아케나톤 파라오의 종교개혁이 꼽히지만, 아케나톤 사후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체계를 갖춘 종교라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바빌론 유수 이전의 유대교는 일신교라 보지 않는다.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은 "유대인들은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였지 "다른 민족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니었다.
  3. 서양은 현대에 들어 오리엔탈 판타지 바람이 불며 동양 철학, 동양 종교 붐이 주기적으로 돌고 있다. 히틀러가 인도 사상에 심취했다는 말도 있듯 이런 현상은 그리 최근만의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구시대적 기독교적 가치나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모양. 오컬트적 요소에 대한 관심도 있다. 이건 불교도교 등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정작 본토에선 힌두교, 이슬람교, 공산주의 등에 밀려 사장되었으나 서양에선 뜨고 있는 아이러니.
  4. 고고학적 한계도 있지만 원래 존재하던 이란계 민족의 토속 신앙에 기반해서 성립된 종교라 기존의 토속 신앙과 신화의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어느 시기부터 유일신 종교로 변화했는지 알기 어렵다. 창시자에 대한 명확한 기록의 부재와 더불어 조로아스터교의 정확한 성립시기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
  5. 아베스탄어는 고대와 신대 아베스탄어로 나뉘는데, 고대 아베스탄어는 베다 경전이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한 어족인 동시에 같은 시대에 자매어로써 존재하였다.
  6. 조로아스터교 경전 중 하나인 가타스는 전통적으로 자라투스트라가 직접 작곡한 17곡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다.
  7. 신양섭. (2009). 페르시아 문화의 동진과 조로아스터교. 한국중동학회논총, 30(1), p44.
  8.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베다경전
  9. 신규섭. (2018). 전이과정에서 본 고대 문학의 원형 연구. 세계문학비교연구, 62, p178-179.
  10. 애초에 Vedic 산스크리트어 자체도 기원 시점이 불분명하다. 언어학적 추론으로 기원전 1,500년 이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
  11. Bruce Lincoln. Death, War, and Sacrifice, 1991, pg 150
  12. 혜초왕오천축국전 같은 사료를 보면 페르시아 일대에도 불교 사찰이 있으나 몇 안 되는 사찰들마저 승려 한두 명이 초라하게 지낸다는 서술이 나온다.
  13. 탄압 받고 몰락한 페르시아의 불교 세력을 흡수했다.
  14.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왕조
  15. 글을 모르는 무슬림 10명에게 글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해방한다든지.
  16. 중국으로 피난간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인도의 파르시처럼 부유한 무역 상인으로 유명했었다. 당나라 때 속담으로 “의사가 앓고 페르시아 사람이 궁한 상황”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중국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인도에서와 다르게 전부 현지인과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17. 본래 페르시아의 고장인 파르스 지방에 있었는데 15세기경 이곳으로 옮겨졌다.
  18.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유대인도 마찬가지 적용을 받음.
  19. 허나 프레디는 본인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를 부끄러워하고 항상 숨기려고 했으며, 부모와 달리 조로아스터신도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1991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프레디의 유가족들은 그를 조로아스터 전통 풍습인 조장으로 장례지내려 했으나 그의 평소 행실을 알던 퀸 멤버 등 주변인들의 반대로 화장되었다.
  20. 출처 - 페르시아: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
  21. 같은 이유에서 흡연을 절대 금기시한다.
  22. 다만 기독교의 천사와는 존재 목적 등 성격이 많이 다르다.
  23. 이슬람 사변철학